희망에는 장애가 없다
희망에는 장애가 없다
  • 김유진 기자
  • 승인 2011.09.03
  • 호수 134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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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루’같은 사람, 가수 박마루

가수 박마루 씨의 이름에는 여러 가지 뜻이 담겨있다. 파도의 끝점, 정상, 쉴 수 있도록 만들어진 우리 전통 가옥의 구조물…. 이름의 영향인 걸까.인터뷰 내내 그는 산마루처럼 당당해보였다. 동시에 먼저 손을 내밀며 악수하고 헤어지는 순간까지 웃음이 얼굴에서 떠나지 않는, 마루처럼 편안한 사람이기도 했다.


변화의 싹이 트다


그는 어릴 적 앓은 소아마비로 양쪽다리를 못 쓰게 됐다.

“걸어 본 기억은 없어요. 기어 다닌 기억은 많죠. 어머니께서 제가 태어난 지 1, 2년 후에 이렇게 된 거 같다고 하시더라고요."

자신의 장애에 대해 언급하는 것을 꺼려할 것 같아 내심 조마조마 했지만 그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부모님과 주변의 도움이 없었으면 남들처럼 살 수 없었을 거에요. 친구들이 저보고 어렸을 때 개구쟁이였대요. 제가 장애인인 걸 의식하지 않은 거죠. 저 덕분에 다른 장애인들을 보면 편하다고도 해요. 돌이켜 생각해보면 이런 환경이 사회생활 하는데 많은 도움이 된 것 같아요.”

어쩌면 누군가는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을 부모님과 친구들의 사랑을 그는 진심으로 감사해했다. 모든 것은 그 감사함에서부터 시작됐으리라. 사람이 얼마나 행복한가는 감사의 깊이에 달려 있다고 했다. 그가 행복해 보이는 이유는 이 때문인 것 같다.

그는 받은 사랑을 다른 사람에게도 나눠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의 이런 생각은 한 사건을 통해 발전했다.

“82년에 어머니가 돌아가셨어요. 오시는 문상객들마다 제가 어머니 없이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지 걱정하시는 거에요. 그런 시선 때문에 장례식장에서 제대로 울지도 못했어요. 그렇게 어머니 장례를 치르고 그 해 겨울 교회에서 칸타타(독창, 중창, 합창과 기악 반주로 이루어진 성악곡의 한 형식)를 연습하며 크리스마스 준비를 시작했어요. 그런데 갑자기 눈물이 펑펑 나는 거에요. 장례식 때 울지 못했던 걸 그때 다 운 것 같아요. 그러고 나서 깨달았죠. 나에게는 나를 사랑해주시던 어머니, 내가 믿는 하나님이 계시다는 걸.”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종교는 그에게 큰 힘이 됐다. 힘을 얻고 나서 그는 ‘의미 있는 삶을 살면서 자신의 모습을 당당하게 다른 사람들한테 보여줘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생각이 행동을 지배한다고 했던가. 이 생각은 그를 변화시켰다.

“어렸을 때 교회에서 성가대 활동을 했어요. 부끄러움이 많은 탓에 매번 나가서 찬송가를 부를 때마다 힘들었어요. 그런데 그렇게 울고 나니까 왠지 모를 자신감이 생기더라고요. 그러고 나선 돈키호테처럼 바뀌었죠. 그 이후로 어떤 일을 하던지 당당하게, 적극적으로 하게 됐어요.”

 

 

선율로 전하는 희망의 불빛

그는 어렸을 때부터 종종 목소리가 좋다는 소리를 들어왔다. 그런 목소리를 살려 아르바이트로 DJ를 시작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생계를 이어가기 위해서였다. 그러다 기타에 관심을 가지게 됐고 가수가 되고 싶어졌다. 연습생 시절을 거쳐 92년에 첫 싱글 앨범을 냈지만 현실은 녹록치 않았다. 장애인이 무대에 서기에는 제한이 너무 많았던 것이다.

“당시 방송국에서 하는 말이 텔레비전에 장애인이 나오면 분위기가 어두워져서 시청률이 떨어진다고 그러더라고요. 또 저 때문에 세트 설치비용이 많이 든대요. 현실적인 벽을 깨달았어요. 그냥 즐기면서 하기로 했죠. 대신 음악으로 자원봉사를 하자고 생각했어요.”

이후 그는 장애인의 인권 개선을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 그 중 하나가 네 손가락의 피아니스트 이희아 씨와 함께 하고 있는 ‘희망으로’ 공연이다. 6년 째 이어지고 있는 이 공연은 장애인을 문화의 수혜자로만 보지 말고 공급자로 보자는 취지에서 그가 직접 당시 교육인적자원부에 제안한 것이다.

공연 중에는 장애가 있는 손과 다리를 직접 보여주며 토크 콘서트도 같이 진행한다. 함께 노래를 부르며 수화도 배우고 옆 사람을 안아 보기도 한다. 처음엔 모두 쑥스러워하지만 곧 즐기며 하게 된다고.

“몇 년 전에 어떤 학생이 게시판에 글을 올렸대요. 자살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우리 공연을 보고 그러지 않겠다 다짐했다고. 저분들은 저렇게 열심히 사는데 자기도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대요. 그 때 그 친구가 정말 고마웠어요. 또 한편으론 우리가 장애인 의식 개선에 도움이 되고 있는 것 같아 보람이 느껴졌어요.”

그는 대표적인 장애인 관련 프로그램 KBS 「사랑의 가족」에도 7년 동안 출연하고 있다. 매주 화요일에 패널로 나와 한 코너를 진행하는 것이다. 장애인이 리포터로 활동하는 것은 그가 최초다.

“처음에는 저한테 장애인 문화 프로그램 소개를 맡아 달라고 했어요. 그런데 전 장애인들의 고민을 듣고 해결해주는 프로그램을 하고 싶었어요. 그래서 제가 먼저 제안했고 지금까지 계속 하고 있죠. 휠체어, 중고차를 사드린 적도 있어요. 시를 쓰고 계시는 분들에겐 시집을 내드렸어요. 벌써 5번이나 내드린걸요.”


희망의 불빛을 켜다

장애인이라 불리는 사람들의 모습은 제각각이다. 스스로 자신을 가둬놓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용기를 가지고 세상에 나오는 사람도 있다. 그는 가수 뿐 아니라 방송인, 복지tv 이사, 희망 강사, 장애인 인권 운동가까지 5개나 되는 일을 소화하고 있다.

“보통 사람들은 장애인이라고 하면 도와줘야만 하는 개념으로 생각하거든요. 그런 인식이 많이 바뀌었으면 좋겠어요. 장애를 가지고 사회에서 활동하고 계시는 분들을 보면 배울 점이 정말 많거든요. 장애인이 보통사람과 같은 일을 해내면 사람들의 시선은 장애인 쪽으로 쏠릴 거에요. 그런 의미에서 저는 장애를 잘 극복한 사람들이 사회의 롤 모델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결국 장애는 우리 사회에 주는 메시지인 거죠. 저는 그 메시지를 희망으로 봤으면 좋겠어요.”

그는 강연을 다니며 ‘장애는 희망 브랜드’라고 말한다. 이런 가치관은 그의 노래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앨범에 실리는 곡들의 가사는 대부분 그의 손을 거쳐 탄생한 것이다. 4집 타이틀 곡 「I Can Do It」도 그가 직접 쓴 곡이다. ‘성공이란 내 속에 감춰진 꿈들을 찾아내는 것’, ‘믿음은 희망대로 되니까’란 가사에는 그의 경험이 담겨있다.

“우리는 항상 선택의 기로에 놓여 있고 그럴 때마다 매번 고민하고 힘들어하잖아요. 이럴 때 희망과 꿈을 가지고 있으면 쉽게 극복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내 안에 있는 꿈을 빨리 찾아 가는 것도 행복의 비결이라고 생각하고요.”

그는 지금 장애인 인권의 향상이라는 꿈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희망은 그의 원동력이다.

“희망이라는 사랑을 많은 사람들이 공유할 수 있는 사회적 분위기가 조성됐으면 좋겠어요. 또 사회가 어려운 분들의 이야기를 현장에서 들었으면 좋겠고요.”

사진 류민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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