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란 무엇인가”를 다시 생각하며
“정의란 무엇인가”를 다시 생각하며
  • 김차동<법대ㆍ법학과> 교수
  • 승인 2011.06.04
  • 호수 1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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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차동<법대ㆍ법학과> 교수

▲ 김차동<법대ㆍ법학과> 교수
참 부럽다. 나는 하버드대학교에서 20년 연속 최고의 명강의를 했다는 마이클 샌델이라는 교수가 참 부럽다. 그 대학교에 재학 중인 약 2만 1천 명의 학생들 중 매년 1,천 명이상이 그의 ‘정의’라는 강의를 수강하고 있다고 한다. 수만리 떨어진 한국 땅에서도 그의 번역서가 발매 11개월만에 100만부나 팔렸다고 한다. 과히 그는 한국사회에서 화제의 초점이 되고 있는 인물이다. 그 번역서가 출간된 이래 한국사회에서는 ‘정의’를 둘러싼 많은 논쟁들이 있었다. 수많은 논객들이 자신들이 생각하는 정의론을 샌델의 입장과 비교하여 설명하였다. 다시 이 주제를 꺼내서 말한다는 것은 다소 진부해 보인다. 하지만 대학생으로서 정의란 논쟁은 졸업할 때까지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져야 할 매우 중요한 주제임이 틀림없다.

나는 ‘법경제학’이라는 과목명으로 효율성에 초점을 맞추어 강의하고 있기 때문에 평소 정의론에 관심이 많다. 법경제학은 법이란 대상물을 경제학적 방법으로 분석하는 학문으로 경제학적 분석의 가장 중요한 기준은 배분적 효율성이다. 배분적 효율성은 한정된 재화를 최고효용평가자에게 배분함으로써 사회후생의 합을 최대화할 수 있다는 개념이다.

임마누엘 칸트의 정의론은 독특하다. 앞선 4가지의 정의론은 정의의 내용으로 무엇을 담을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나, 칸트의 경우는 정의에 접근하는 방법에 대한 고민의 끝자락인 것이다. 인간은 이성을 갖고 있고 자신이 주체가 되어 자율적으로 정의의 내용에 관해 고민하여 이르는 결론은 결국 정의의 내용이 될 수 있다는 입장이다. 과거 읽었던 절대주의와 상대적 상대주의의 차이점을 구분해 주는 글귀가 생각나는 순간이다. 상대적 상대주의란 너와 나의 차이를 인정하여 가치가 상대적일 수 있다는 점을 받아들이다가도 이런 상대주의를 악용하는 경우에는 ‘상대적’으로 무관용이 된다는 가치 절대적 상대주의이다. 이 번역서에서 정의론에 관한 묶음방법이나 각 입장에 대한 소상한 설명은 문외한이라도 쉽게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평이하면서도 핵심에 닿아 있다. 그러나 그가 정의의 기준으로 공동선을 제시하는 순간 정의에 대한 보편적 이해를 떠나 분파적 접근의 오류를 범하게 된다. 결국 공동선을 지나치게 강조하다가 보면 전체주의적 정치이론의 이론적 기초를 제공할 위험성이 있다는 비판에 직면하게 된다. 이것이 그의 한계가 되는 셈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칸트의 정의론은 정의의 내용적 획정을 포기하여 빈칸으로 남겨 두고 정의구현의 방법론적 인식에 초점을 맞추었다는 점에서 시대를 관통하여 영원할 수 있는 정의론을 제시하였다는 칭찬을 받을 만하다. 비판의 대상이 되었든 간에 다른 사람의 연구의 대상이 될 만한 학문적 업적을 남겼다는 점에서 나는 마이클 샌델 교수가 한없이 부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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