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 당신은 무엇을 보고 들었나
5·18, 당신은 무엇을 보고 들었나
  • 김명지 기자
  • 승인 2011.05.15
  • 호수 134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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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의 광주 6년 후, 어느 제3자의 충격
큰 충격으로 잠이 오지 않는 밤이다. 오늘 낮, 광주 출신의 한 후배와 함께 있던 중 우연히 ‘그날’의 ‘진짜 얘기’를 듣게 됐기 때문이다. 1980년 5월 18일, 6년 전 그때 나는 19세의 나이로 경기도의 A시에 살고 있었다. 까마득하게 잊고 있었던 그때 내가 무엇을 보고 들었던 것인지 돌이켜 생각해보려니 구체적으로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나는 서둘러 창고로 가 지난 신문들을 모아놓은 박스를 뒤적여 봤다. 1980년 5월 쯤 발간된 신문들을 살펴보니 과연 당시의 기사가 있기는 했다. ‘광주사태에 대한 계엄사 발표 전문’이란 제목의 이 기사에서는 “광주시내 대학생시위에서 발단해 … 폭동사태는 국가안보를 위태롭게 하고 … 국민여러분에게도 큰 불안과 깊은 염려를 끼치게 한 유례없는 비극”이라며 “다행히도 5월 27일 계엄군의 효과적인 진압에 의해 질서와 평정을 되찾게 되었다”고 밝히고 있었다. 그렇다. 내가 아는 그날의 광주는 그뿐이었다.

그러나 오늘 후배가 들려준 얘기는 그것을 완전히 뒤집어 엎어버렸다. 평화롭던 광주를 피로 물들인 것은 무단으로 침입해 시민들을 학살한 신군부의 계엄사령부였다는 것이 후배의 설명이었다.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심지어 임산부에게도 행해지던 잔인한 폭력은 얘기를 듣는 내내 나의 입을 다물지 못하게 만들었다.

후배의 말이 도저히 믿기지가 않았던 나는 언론사에서 일하고 있는 한 선배에게 연락을 했다. 돌아온 대답은 나를 더 고통스럽게 만들었다. 후배의 말은 사실이었다. 내가 본 뉴스와 신문은 신군부에 의해 장악된 언론이 생산한 결과물이었다. 선배는 심지어 최근 ‘보도지침’이란 것까지 전해지고 있다고 말했다. 문화공보부에서 매일 각 언론사에 보내는 이 보도지침이 ‘가능’, ‘불가능’. ‘절대불가능’ 등의 구분을 통해 특정 사건의 보도 여부는 물론 형식과 방향까지 구체적으로 간섭하고 있다는 하소연이었다. 그러나 선배는 “오래 가진 못할 것이다”라며 “안 그래도 이에 대해 기자들이 폭로의 움직임을 보이는 중”이라고 말했다. 망연자실한 나는 그 용기 있는 기자들이 해직이나 당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선배는 “박정희 정권의 언론 압박에 비해서도 전두환 정권은 그 수준이 더 심하다”며 그들이 언론을 아예 ‘애완견’으로 만들어 이용하겠다는 의지를 보인다고 했다. 권정달, 이상재, 정도영, 허삼수, 허화평의 ‘5인방’이 이른바 K(King)공작이라 일컬어지는 작전을 시행하며 시청에 검열단을 두고 검열 활동을 한 것도 한 예라고 선배는 설명했다. 선배의 푸념을 끝으로 전화를 끊었다.

나는 사건 당시 출입이 철저하게 통제됐던 광주와 전혀 상관없는 지역에 머물고 있었다. 따라서 진실을 알 수 없었다. 물론 비난과 원망의 화살을 맞아야 하는 이들이 분명히 있다. 그러나 문제는 그뿐만이 아니다. 나 역시도 1980년의 5월을 살아갔다. 나는 비난과 원망의 화살을 조준하는 사람인 동시에 맞아야 할 사람이기도 한 것이다. 

도움: 조맹기<서강대대학원ㆍ신문출판전공> 교수
참고: ‘동아일보’ 기사(1980. 5. 31.) 「광주사태에 대한 계엄사 발표 전문」
일러스트 김명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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