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피지 못한 그들의 봄
꽃피지 못한 그들의 봄
  • 안원경 기자
  • 승인 2011.04.09
  • 호수 134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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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이다. 이제 막 적응한 새내기와 코끝을 스치는 싱그러움으로 캠퍼스는 활기를 되찾았다.  하지만 캠퍼스의 봄을 누리지 못한 사람들이 있다. 봄에 떨어지는 벚꽃 마냥 4명의 수재들은 한창 청춘에 자살을 택했다. 과학 영재로 불리며 주위의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자란 이들에게 끊임없이 경쟁을 요구했던 캠퍼스는 버티기 힘든 곳이었다.

학생들의 자살 이유는 다양하지만 성적 부진에 따른 심적 부담과 학점에 따른 상실감, ‘징벌적 수업료’가 주요 요인이라는 분석이 우세했다. 이에 서남표 카이스트 총장은 고개 숙여 사과하며 자살 사건 이후 논란이 됐던 학점별 수업료 징수제를 폐지하겠다고 밝혔다. 지금까지 고수했던 경쟁체제에 대해 원점에서 개선해 나갈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이들의 슬픈 선택은 단지 과하게 부과된 등록금 때문만은 아니다. 이들에겐 탈출구가 없었고 스승이 없었다. 어느 자리엘 가나 1,2등은 놓치지 않았던 이들은 성적 때문에 ‘벌금’을 내야 하는 굴욕감을 느껴야만 했고 이를 위로해 줄 이 또한 없었다.

학생들이 밀려드는 공부량과 끝없는 경쟁체제에 놓이는 것처럼 교수들 또한 끝없는 경쟁체제에 몰렸다. 이는 카이스트가 세계대학 평가 순위, 즉 2008년 종합 95위에서 2009년 26단계를 올라 69위를 차지한 것만으로도 유추할 수 있다. 교수는 세계적인 학술저널에 얼마나 많은 논문을 실었느냐 등으로 연구 실적을 보여줘야만 한다. 이것이 교수 평가의 핵심적인 부분이고 교수 평가는 승진과 연봉 산정, 재임용의 결정적인 요소다.

대다수 대학들이 학생들의 강의평가를 교수 평가에 반영하곤 있지만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는다. ‘노련한’ 교수라면 강의보단 연구에 더 치중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상황에서 학생과 교수 간의 돈독한 유대관계 또한 기대하기 힘들다. 지도교수가 있지만 대다수 학생들은 심적으로 괴로울 때에 이들을 찾아가진 않는다.

만나기도 힘들 뿐더러 대개는 형식적인 진로상담에만 그친다. 교수는 교수대로 학교의 요구에 따라가기 버겁고 학생은 학생대로 교수를 어려운 존재고 바쁜 사람으로 여겨 개인적인 문제로 상담하는 것을 엄두조차 내기 어려워졌다. 이러한 멘토의 부재는 교수에만 국한된 문제가 아니다. 예전엔 동아리든 학과생활이든 구성원 간의 끈끈한 유대관계가 있었다. 같이 고민을 나눌 친구가 있었고 강하게 나무랄 수 있는 선배가 있었다.

하지만 점차 개인화 돼가는 대학사회에서 멘토 역할을 해줄 선배를 찾기 힘든 실정이다. 동아리는 세대를 거듭할수록 비활성화되고 학점 관리 하느라, 영어 공부 하느라 바빠 학과 선ㆍ후배가 함께할 자리는 줄어들고 있다. 스트레스를 토로할 곳도, 고통을 같이 나눌 사람도, 시간도 없는 대학생들에겐 캠퍼스의 봄은 따뜻하지 않다.

카이스트 학생들의 연이은 자살로 불거진 문제는 비단 카이스트만의 문제가 아니다. 이는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현 대학이 모두 안고 있는 문제다. 이제 학생들에게 교수를 돌려줘야 한다. 대학 평가에 급급해 스무살들에게서 스승을 빼앗아가고 평생 인생 선배를 잃게 할 순 없다. 대학의 봄이 따뜻해지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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