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장, 역전과 함께 사라져가다
노장, 역전과 함께 사라져가다
  • 김명지 기자
  • 승인 2011.04.03
  • 호수 134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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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년 4월 11일 해임당한 맥아더 장군
1950년 아시아 한국 땅에서 전쟁이 터졌을 때부터 나 맥아더는 유엔군 최고사령관으로서 최선을 다해왔다. 그런 내게 해임이라니, 황망한 마음뿐이다. 더구나 현재 연합군은 중공군의 공세에 밀려 후퇴를 거듭한 상황이 아닌가. 집중적인 공격을 통해 북진을 지속해도 모자랄 판에 한국에서 미군의 입지를 대표하는 내게 해임이라니, 트루먼 대통령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가. 아직 한국 땅에서 해야 할 일이 너무나 많은데 개운치 않은 마음으로 떠나야 한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다.

한국과 나의 인연이 그리 짧지만은 않은 것도 이 전쟁에서 손을 떼기 어려운 이유 중 하나다. 2차 대전 직후 나는 일본군 무장해제를 목적으로 일본 점령 총사령관으로 일했던 바 있다. 당시 나는 남한과 직접적인 관계를 맺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대신 하지 중장을 파견해 점령군 수칙 관련 포고문을 발표하게 했었다. 미군정이 끝난 지 얼마 안 된 1950년 6월 25일 전쟁이 터져 다시 한 번 한국과 만나게 된 것은 유감스런 일이었다. 그러나 나는 전쟁 직후 끝없이 밀리기만 했던 한국군이 인천상륙작전을 통해 전세의 반전을 도모할 수 있도록 열의를 다했다. 인천상륙작전은 가히 성공적이었고 이후 유엔군은 북진에 북진을 거듭했다.

트루먼 대통령은 기본적으로 나와 같은 반공산주의 노선을 추구했던 사람이다. 그러나 같은 생각을 가지고도 우리는 대립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가 공산주의로부터 지켜내야 하는 가장 중요한 요충지는 아시아다. 이는 태평양방면에서 각종 군사 활동을 지휘한 경험이 있는 나의 식견으로 내린 판단이다. 그러나 트루먼 대통령의 생각은 나와 달랐다. 그는 유럽이야말로 자유민주주의의 방어에 가장 중요한 지역이라 판단하며 아시아를 그 다음 순위로 치부했다. 또 그는 소련과 중국을 경계하느라 더 이상의 확전을 막고자 하는 다소 소심한 태도를 보였다. 유엔군의 북진이 그들을 자극할 수 있다는 견지였다.

그러나 사실 1950년 10월 15일에 개최된 ‘웨이크섬 회담’에서 중공군의 개입에 대한 트루먼과 나의 생각은 일치했었다. 중공군의 개입에 대한 낙관적 판단은 나 혼자만의 생각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당시 트루먼 역시 “중국의 전쟁 개입 가능성도 생각할 수 있지만 그럴 것 같지는 않고 인도차이나에 대한 중국의 개입도 일어날 것 같지 않다”고 밝혔었다.

나는 또한 당시 회담에서 사령관으로서 대통령과 면담을 한 것이다. 중공군의 참전 가능성 문제는 나보다는 상부인 워싱턴 당국에서 결정해야 할 것으로 판단했던 것뿐이다. 그러나 나를 해임하는 지금에 이르러 트루먼 대통령은 내가 이 회담에서 중공군의 참전 가능성을 의도적으로 축소했다고 비난했다. 천만에. 나는 전혀 그런 의도가 없었다. 이 회담에서 트루먼 대통령과 참모진들은 전 세계적인 여러 문제들을 피상적으로 다뤘고 중공군에 대한 문제 역시 대화 속에서 의례적으로 다뤄지고 넘어간 부분이었다. 게다가 그들 스스로도 결론적으론 북진에 동의했으면서 나에게만 그 책임을 몰아버리다니. 묵묵히 있으려 했지만 입을 열지 않을 수 없었다.

중공군의 침입에 대해 나는 중국 본토를 공격하거나 대만군의 지원을 받는 등의 여러 가지 방안을 제안했으나 이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계속된 나와 트루먼 대통령의 갈등이 결국 지금의 상황을 만든 것이다. 물론 세계를 향한 나의 신념은 앞으로도 변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모든 억울한 감정에도 어쨌거나 지금은 떠나야 할 때다. 노병은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질 뿐이다.

도움: 홍용표<사회대ㆍ정치외교학과> 교수,
논문 「웨이크 섬 회담과 중국군 참전에 대한 맥아더사령부의 정보 인식」

일러스트 심소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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