닌텐도 vs 소니 사활 건 3라운드
닌텐도 vs 소니 사활 건 3라운드
  • 주상호 기자
  • 승인 2011.03.12
  • 호수 133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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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디오게임 시장을 지배하라

닌텐도, 비디오게임 시대를 열다
대다수 사람들은 비디오 게임을 어린이용 장난감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닌텐도에서 슈퍼마리오 게임을 출시한 이후 비디오 게임은 실로 급속히 성장하는 사업 분야가 됐다. 그 게임 하나가 창출한 수익은 미국에서만 무려 5억 달러에 달했다. 그때까지 오락산업에서 이보다 많은 수익을 창출한 상품은 없었다.

슈퍼마리오는 닌텐도 게임으로 1985년에 최초로 등장했다. 총격과 대량 살상만이 난무하던 테마들 사이에서 재치와 유머라는 컴퓨터 단말기나 컨트롤러와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아 보이는 요소들로 비디오게임 시장에 일대 혁명을 일으켰다.

비디오게임과 그것을 작동시키는 게임기 판매해 벌어들인 수익금은 닌텐도를 세계 최고의 수익률을 자랑하는 기업들 가운데 하나로 변모시켰다. 1991년 당시, 성장력, 수익률, 시장 침투도, 주가 상승률 등의 지표들을 살펴보면 일본에서 가장 성공적인 기업인 도요타를 추월하고 있었다. 1992년 닌텐도가 벌어들인 돈은 10억 달러를 상회했다.

닌텐도는 미국 컴퓨터 산업계의 약점도 완벽히 파고들었다. 개인용 컴퓨터 혁명의 선도자들은 1980년대 초반에 컴퓨터도 토스터처럼 단기간에 대다수 가정이 보유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러나 PC가 출시된 지 10년이 지났을 때에도 미국에서는 컴퓨터를 2,400만 가구밖에 보유하지 않았지만 같은 시기에 닌텐도 게임기를 보유한 가구는 3,400만 가구에 달했다.

닌텐도의 성공은 세계 전역의 수많은 산업에 충격을 가했다. 경쟁하던 하드웨어 회사들뿐 아니라 100개가 넘는 비디오게임 회사들까지 개당 평균 40달러짜리 게임 1억 7천만 개를 판매했는데 매출액으로 따지면 거의 70억 달러에 육박했다.

사람들은 비디오게임을 하지 않는 시간에도 닌텐도 문화에 흠뻑 젖어 있었다. 닌텐도 게임과 캐릭터들을 기초로 제작된 TV 만화영화는 다른 어떤 프로그램보다 시청률이 높았다. 닌텐도와 관련해 책, 비디오, 음료, 퍼즐 등 수많은 상품들이 계속해서 시장에 등장했다.

정치인이나 영화배우 같은 유명인사들의 인기도를 설문조사로 산출해 보여주는 Q지수에 따르면 1991년 당시 닌텐도의 슈퍼 마리오에 대한 미국 어린이들의 인지도가 미키마우스보다 높게 나타났다. 이제 닌텐도는 일본 최대의 문화수출기업으로 거듭난 것이다. 1991년 10월 한 일간지의 보도에서 닌텐도 게임기 슈퍼 패미컴이 1분마다 열두 대씩, 혹은 5초마다 한 대씩 판매되고 있다고 밝혔다. 닌텐도는 1992년 경기침체와 모든 암울한 전망에도 아랑곳없이 미국에서만 47억달러의 매출액을 기록했다.

소니, 닌텐도를 넘어 세계로
1988년 소니는 비디오 게임 시장이 이미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커졌음을 인정하고 닌텐도와 협력계약을 체결했다. 91년 6월 1일, 시카고에서 열린 가전쇼에서 소니는 닌텐도와 1991년에 가진 공동개발 계약을 토대로 슈퍼패미컴과 호환이 될 CD-ROM을 사용한 차세대기기를 발표했다.

그러나 다음날 닌텐도는 갑자기 소니와의 계약을 깨고 당시 소니의 경쟁사였던 필립스사와 손을 잡고 차세대기기의 개발을 추진한다고 선언했다. 소니 측은 당황스러웠지만 닌텐도가 비디오게임의 시장을 거머쥐고 있었으므로 비디오게임 시장에서 물러나자는 측이었다.

그러나 이후 플레이스테이션을 개발할 기술자 구타라기는 이번 위기야말로 기회를 잡을 수 있다는 입장이었다. “컴퓨터를 엔터테인먼트 도구로 사용해 인생을 풍요롭게 한다는 건 여러분이 생각하시는 것처럼 차원이 낮은 이야기가 아닙니다. 소니가 지금까지 세계에 내보낸 워크맨이나 8밀리 비디오는 어땠습니까? CD는 어땠습니까? 세계의 문화를 바꿨다고 하는 소니가 고작 닌텐도에 밀린다고 생각하십니까?” 구타라기의 고집스러운 눈길은 오가를 향하고 있었다. 다른 누구에게 하는 이야기가 아니었다. 그는 콤팩트 카세트를 비롯해 CD등에 이르기까지 기술자들과 함께 열정적으로 꿈을 쫓아온 오가 사장의 마음에 호소하고 싶었다.

구타라기의 게임 팀은 아오야미에서 이미 개발을 진행 중이었다. “3차원의 영상이 나타나 움직이게 돼 있습니다”고 구타라기는 전했다.

오가가 이 프로젝트는 성공한다는 확신을 갖게 된 것은 1993년 10월 28일, 고텐야마의 소니 10호관 대강당에 전국 소프트 메이커를 모아 기술설명회를 열었을 때였다.

바로 전날 게임기기 설명회 개최를 신문에 발표한 상황이었다. 업계의 패권을 쥐고 있는 닌텐도는 소프트 메이커에 여전히 막대한 힘을 갖고 있고, 닌텐도에 등을 돌리면서까지 설명회에 와줄 관계자가 얼마나 있을지 초조했지만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회장에는 약 60개사 대표와 소프트 엔지니어들로 빼곡하게 차 있었다.
“우리 소니는 앞으로 가정용 게임기에 본격적으로 진출할 것입니다만, 성패 여부는 여러분이 소프트웨어를 만들어주실지 여부에 달려 있다는 것은 두 말할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이야기가 끝나자 구타라기의 지시로 6대의 게임기를 덮고 있던 하얀 천이 벗겨지고 전원에 스위치가 꽂혔다. 플레이스테이션이 처음 모습을 드러낸 순간이었다.

박진감 넘치는 3차원 영상이 디스플레이에 구현되고 있었다. 물체고 인물이고 그 움직임은 평면이 아니라 깊이가 있는 3차원이다. 한 점에서 확 퍼지는 폭발의 굉장함. 낙하는 법칙대로 가속도가 붙어 그 공포가 표현되고 있었다.

그때까지는 수천 엔을 들인 항공회사 훈련용의 거대한 시뮬레이션으로밖에 볼 수 없었던 화면이 작은 텔레비전 게임기가 돼 가정에 들어오게 되는 것이다. 구타라기 팀이 이뤄낸 기술은 일본뿐 아니라 구미의 소프트 업계에도 충격을 줘 이 설명회 이후로 전 세계 소프트 메이커가 물밀 듯이 소니 진영으로 옮겨오게 된다.

다시 한 번 맞붙다
2000년 2월 소니는 비디오게임 시장에서 확고히 자리매김하기 위해 플레이스테이션을 잇는 차세대 게임기 플레이스테이션2의 발매를 시작했다. 그러나 오픈 직후 1분 동안 10만 건의 액세스가 집중됐으며 계속해서 분당 액세스 수가 최대 50만 건에 달하자 결국 서버가 다운되면서 온라인 예약 서비스 역시 일시 중지되고 말았다. 예상을 뛰어넘는 열기로 인해 결국 소니는 서버 증강작업을 해 18일 다시 예약을 받을 수 밖에 없었다. 이러한 폭발적인 인기는 일본뿐 아니라 미국과 한국 등의 뉴스와 신문에 보도됐다.

닌텐도도 이에 맞서 새로운 기종인 게임보이 어드밴스를 이듬해 여름에 출시할 예정이었다. 이들은 시장에 접근하기 위해 엄청난 홍보 계획을 세웠고 새로운 게임기의 광고에 사용한 비용은 15억 달러가 넘었다. 이 광고들은 한결 같이 게임이 마니아들을 위한 기분 전환용이 아니며 세상에서 가장 멋진 여가 활동이라고 추켜세웠다.

닌텐도, 소니의 게임은 현재도 진행 중이다. 고영혁 게임평론가는 “현재 다시 한 번 닌텐도와 소니가 맞붙으려고 한다”며 “닌텐도는 3DS를 출시하고 소니는 NGP(Next Generation PSP)를 내세워 비디오 게임 시장을 점유하려 한다”고 전했다.

일러스트 심소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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