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은 삶이에요”
“음악은 삶이에요”
  • 심소연 기자
  • 승인 2011.02.27
  • 호수 133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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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색을 음표에 담다, 학과장 이승환<예체능대ㆍ실용음악학과> 교수

올해 첫 학기를 맞는 실용음악학과의 정시 경쟁률. 95:1. 2800여명이 지원해서 30명이 겨우 합격했다. 처음 시작하는 학과인 것을 감안하면 놀라운 수치다. 박효신, 윤미래, 성시경 등 유명 가수들의 곡을 작곡했던 이 교수와 명성있는 다른 교수진의 힘이 아니었을까. 이제부터 문을 여는 ERICA 캠퍼스 실용음악학과의 선장 이 교수를 만나봤다.

나에게 음악이란
클래식 피아노, 작곡, 프로듀서, 교수까지. 음악 속에 푹 담겨 지내는 이 교수. 그런 그에게 음악의 매력은 무엇일까.

“음악은 뭐가 매력이라고 말하기 힘든 것 같아요. ‘내 삶이 너무 매력적이야’라고 보통 하지 않잖아요. 음악은 내가 살아가는 것의 연장선이기 때문에 그냥 내 삶인 것 같아요. 단 한 번도 음악을 따로 떨어트려놓고 생각해본 적이 없어요.”

이 교수가 처음으로 음악을 시작한건 6살, 부모님의 권유로 시작했던 때다. 작은 손으로 피아노를 치던 어렴풋한 기억들. 이 교수는 이미 자신이 깨닫기 전부터 음악을 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제 의지보다는 부모님의 의견대로 음악을 했어요. 그러다 중학교 올라갈 때 음악을 그만두고 싶다는 마음이 들어 부모님께 말씀드렸죠. 하지만 고등학교 2학년이 됐는데 문과, 이과 어느 곳에도 속하지 않는 나를 발견했어요(웃음). 그리고 정말로 음악을 하고 싶다고 느꼈죠. 그때부터 음악을 본격적으로 시작했어요.”

흔히 같은 일을 계속해서 하다보면 싫증을 느끼고 포기하고 싶을 때가 있다. 하지만 이 교수는 단호히 말한다. 음악을 하겠다고 결심한 이후로는 단 한 번도 포기하고 싶다는 생각을 해보지 않았다고. 다작을 하지 않는 편인 이 교수는 작곡이 잘 안되면 차라리 잠시 손을 놓는다. 그러다 영감이 떠오르면 곡을 써내려 간다.

“나의 기억 속에 있는 잔향들. 저는 여기에 영향을 많이 받아서 작곡을 해요. 어떤 기억이 내가 지금 만들려고 하는 곡과 비슷하게 느껴질 때 곡을 쓰는 거죠. 그래서 작곡은 매력적인 것 같아요. 내가 상상한대로 모든 악기들을 다 다루면서 자유롭게 그림을 그릴 수 있으니까요.”

부족한 듯 부족하지 않게
음악을 통해 자신의 그림을 그려나가고 싶다는 이 교수. 그는 환한 노란색과 같이 밝고 깨끗한 감성을 표현하고 싶다고 했다. 이 교수가 원한 색감은 그가 출전했던 제4회 유재하 가요제의 은상 수상작 ‘우산과 아이’에서 잘 드러난다.

“제 기억 속에 있던 조그만 아이가 우산을 쓰고 가는 모습이 제 감성과 많이 맞았어요. 저를 동심으로 돌아가게 해줬죠. 그래서 우산과 아이라는 곡을 쓰게 됐어요. 지금은 때가 많이 묻어서 그런 느낌의 곡을 못 쓰겠지만(웃음).”

서울대 작곡과를 입학하며 이 교수는 본격적으로 음악을 시작했다. 누구나 처음은 힘들 듯 그 또한 학업과 금전적인 문제로 고민을 많이 했다. 하지만 운 좋게도 흔히 말하는 ‘혼자 데모를 돌리는 시기’는 짧게 끝나고 가수 김연우와 만나 처음 프로듀서로 일을 시작했다.

“처음 프로듀싱한 곡을 김연우씨에게 줬어요. 같은 내무반에서 군 생활을 해서 알고 있던 사이였죠. 처음으로 한 작업이었기 때문에 미숙한 점도 많았어요. 전체적인 일 진행이 잘 이뤄지지 못했고 곡이 짜임새가 부족하고 세련되지 못했었죠. 하지만 처음이기 때문에 덜 세련되더라도 그만의 맛이 있었던 것 같아요. 약간 투박하지만 조금 빈 듯한 느낌이 주는 친근함 같은 거죠.”

이후 이 교수는 이소라, 신승훈, 조성모, 김현철 등 쟁쟁한 여러 가수들과 다양한 작업들을 이어간다. 그러다 어느 순간 그는 초심을 잃은 자신을 발견한다. 순수하게 음악을 좋아하던 자신은 사라지고 이런저런 조건을 따지고 있었다. 역겹게 느껴졌다. 이 교수는 무작정 다음 달 미국으로 가는 비행기 표를 샀다.

“재충전이 필요한 시기였는데. 그걸 느끼지 못하고 쳇바퀴 돌듯 일을 반복했어요. 그런 일상에 질려 외국으로 갔죠. 유학준비를 하고 간 게 아니라 어학원에 등록하고 바로 떠났어요. 이곳에서는 더 이상 일을 할 수 없겠다는 마음이 들었었죠. 내가 싫었어요. 그 안에 있는 내 자신이.”

무작정 떠난 여행이었지만 이 교수는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이후 그는 뉴욕대 영화음악과에 들어가 자신이 가야할 방향을 다잡기 시작했다.

음악을 통해 얻은 소중함과 즐거움
“영화음악에 대한 동경이 있었어요. 음악은 들리고 사라지잖아요. 그런데 영화음악은 영상과 연결이 돼서 기억에 남을 만한 다른 감동을 불러일으킬 수 있지 않을까 궁금했어요. 제 호기심 때문에 영화음악을 하게 된 거죠.”

하지만 계획 없이 떠났던 유학이었던 만큼 힘든 점도 있었다. 언어문제였다. 우리나라에서는 이미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왠만한 지적 능력을 갖춘 성인이었지만, 미국에서는 동사무소가 어디 있는지도 모르는 초등학생이 된 것 같았다. 그 괴리감은 이 교수에게 다소 벅찼다. 하지만 그는 곧 유학생활에 적응하고 뉴욕 링컨센터에서 열린 영화음악제에서 최종 결선자로 뽑혔다. 자신이 만든 음악이 무대에 선보여지는 모습. 그때의 행복감은 지금도 그의 머리 한 곳에 잘 녹음돼 있다.

그는 한국으로 다시 돌아와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음악을 하기 시작한다. 소중한 인연도 그를 따라왔다. 바로 유학을 가기 전부터 함께 작업을 했던 가수 이소라다.

“제가 피아노반주를 해주는 가수가 아무도 없어요. 그런데 딱 한명. 이소라씨만 해주고 있어요. 이소라씨는 자기가 얼마나 음악에 진지할 수 있는가를 항상 고민해요. ‘이곡이 히트가 돼야해’ ‘멋있어 보여야해’ 하고 생각하는 것 같은 가수들을 많이 봐왔어요. 그런데 이소라씨는 내가 정말 이 노래를 부를 수 있느냐를 먼저 생각하는 사람이에요.”

자신이 선택한 길에 대한 신념과 소중한 인연을 간직한 이 교수. 이후 그는 음악의 세계 속에서 자신의 색깔로 반주해나간다. 그러다가 작년 우리학교에 새롭게 신설되는 ERICA 캠퍼스 실용음악과 학과장직을 제의 받는다. 강의만 할 때와는 달리 하나부터 열까지 준비하는 일이 힘들기도 하다는 그. 하지만 음악과 하나인 덕분인지 재미있게 하고 있다고 한다. 그는 학생들도 자신이 하는 일을 즐기길 바란다.

“저는 아이들이 즐길 줄 알았으면 좋겠어요. 부모님들도 너 억지로 하지 말라고 자주 말씀하시잖아요. 억지로 하기보다 즐기면서 해야 뭔가 나올 수 있는 것 같아요.”

그는 마지막으로 자신과 상대방 모두가 감동할 수 있는 음악을 만들고 싶다고 전했다.

“음악은 하나에요. 세상에는 힙합, 락, 영화음악과 같이 다양한 장르의 음악이 산재해 있어요. 하지만 이건 결국 하나로 모이는 것 같아요. 감동할 수 있는 음악. 듣는 사람뿐만이 아니라 작곡한 자신이 감동해야 해요. 그래야 진정한 음악이 되는 거죠.”        

사진 류민하 기자
일러스트 심소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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