벼랑 끝에 선 노장의 회고
벼랑 끝에 선 노장의 회고
  • 김명지 기자
  • 승인 2011.02.27
  • 호수 133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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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89년 2월 4일 송시열의 제주도 귀향
내가 태어난 때가 선조대왕 40년의 일이다. 정계에 본격적으로 나선 인조대왕 때부터 효종대왕, 현종대왕을 거쳐 지금의 주상 전하에 이르렀으니 새삼스레 돌이켜보면 조선왕조와 나의 인연이 가히 가볍지만은 않다. 나는 무려 4대 왕을 도와 조선의 정치에 힘 쓴 것이다. 특히 내가 주장한 ‘노비 종모 종량법’은 조선의 정치에 대단한 혁신이었다. 아버지가 노비이더라도 어머니가 양인이면 자식은 양인이 되는 것이 이 법의 핵심인데, 이렇게 되면 양민의 수가 늘어 각 집의 군역 부담을 줄일 수 있고 자영농으로서의 성장을 꾀할 수도 있다. 율곡 선생이 처음 이를 제시하신지 100년 만에 내가 비로소 이뤄낸 것이다. 그러나 지난 1673년 대비마마께서 돌아가시고 얼마 동안 상복을 입느냐는 예송논쟁으로 인해 내가 실각한 후 그 법은 사실상 폐기됐었다. 내가 정계로 돌아왔을 때 다시 법제화되긴 했으나 이제 또 제주도로 유배길을 떠나니 노비 종모 종량법의 앞날이 참으로 어둡구나.

아예 예상치 못했던 일은 아니었다. 소의 장씨가 첫 아들을 낳았을 때부터 이미 끝난 일인지도 모른다. 전하께서 그동안 벼르고 계셨을 정권 교체, ‘환국’의 빌미가 자연스럽게 던져졌던 것 아닌가. 그렇지만 아무리 그렇더라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는 처사다. 중전 마마(인현왕후)께서 아직도 새파랗게 어리기만 하신데, 후궁이 낳은 아들을 원자(元子)로 책봉하다니. 원자가 무슨 의미인가. 전하를 이어 다음 왕이 되실 세자로 책봉되기 바로 전의 자리라 해도 무방하지 않은가. 그런 귀한 자리를 어찌 그리도 성급히 채워 넣으시는가. 그것도 모자라 그 어미인 소의 장씨를 희빈으로 승격시키셨으니, 이만저만 문제가 아니다.

문제의 핵심은 희빈이 출신은 천하지만 어쨌거나 우리 서인(西人)과 적대적인 남인(南人)에 관련된 사람이란 사실이다. 서인과 남인의 계보가 어떻게 돼왔나. 사실 우린 보수적인 훈구 세력에 맞섰던 사림에서 출발했다. 사림이 갈라진 것은 동인(東人)과 서인에서부터 시작됐다. 지지 세력도, 추종 학파도 달랐다. 이황 선생과 조식 선생을 잇고자 하는 동인과 이이 선생을 잇고자했던 우리 서인. 광해군의 왕좌를 뒤엎은 인조대왕의 거사가 있었던 이후 많은 변화가 있었다. 동인에서 갈라져 나온 남인이 서인의 주도 아래 정치에 간간이 참여하는 수준이 된 것이다. 그러나 호시탐탐 기회만 엿보며 어떻게든 서인을 깎아내리려 했던 남인들 탓에 지금에 이르렀다.

물론 나는 붕당정치를 옹호한다. 조선은 신권의 나라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썩어빠진 남인 정권을 받아일 수 있다는 것은 아니다. 폭군 광해군의 치세 동안 어떤 일이 있었나. 명나라에서 여진족의 청나라가 일어났을 때 광해군은 명나라를 돕지 않고 오랑캐인 청나라와 화친을 맺고자 했다. 성리학을 높이 하고 명나라를 도와 청나라를 무찔러야 하는 조선이 앞장서 ‘주화(主和)’를 외치며 청나라를 맞이하고자 했으니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남인은 그런 사실을 답습하려 하는 족속들이 아닌가.

나는 전하의 조부(祖父)가 되시는 효종대왕을 가르쳤던 스승이기도 하다. 어찌 전하께선 이런 내 말을 듣지 않으시고 고집을 부리셔서 조정을 남인의 판으로 만드시는가. 직접적이고 표면적인 원인이 고작 천한 출신의 여인인 희빈 장씨이니 뭐라 여쭙기조차 부끄럽다. 어쨌거나 나를 비롯한 서인 무리들이 조정을 떠나게 됐으니 중전 마마의 위태로움이 바람 앞 등불과 같구나.

도움: 지두환<국민대ㆍ국사학과> 교수, 논문 「우암 송시열의 경세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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