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에 대한 열정이 오마이뉴스를 만들었다”
“진실에 대한 열정이 오마이뉴스를 만들었다”
  • 안원경 기자
  • 승인 2010.12.04
  • 호수 133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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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성 언론에 어퍼컷을 날린 오연호<오마이뉴스> 대표기자

2002년 2월 22일 2시 22분, 20세기 언론문화와 결별을 선언하고 21세기 저널리즘을 만들겠다는 한 신문사가 탄생했다. “모든시민은 기자다.” 뉴스는 기자가 쓴다는 고정관념을 뛰어넘은 반란이었고 사회와 언론의 권위에 대한 도전이었다. 이 변혁의 중심에는 오연호<오마이 뉴스> 대표기자가 있다.

나를 키운 건 8할이 연애편지
오연호 기자는 소설가가 되고 싶어 국문과에 진학했다. 하지만 군부독재가 횡행하던 시절, 사회는 작은 시골마을에서 상경한 순진한 청년을 가만두지 않았다. 대다수 언론이 전두환 군사 정권에 순응했고 오 기자가 학생운동을 하면서 경험하고 부딪힌 현실은 보도되지 않은 채 권력에 의해 묻혀갔다.

“부당한 현실을 겪으면서 소설을 쓰기 전에 사실을 알리는 사람이 되고 싶었어요. 그래서 고등학생들에게 연애편지를 보내기 시작했어요. 물론 평범한 연애편지는 아니었어요. 고교생들의 주소를 모조리 수집해 군부 독재에 대한 사실을 폭로하는 편지를 발송했죠. 연인에게 말하듯 고등학생들에게 보내는 유인물을 작성하면서 기자생활에 필요한 문장연습이 자연스럽게 됐죠”

연세대 총학생회 교육 부장이었던 그는 국부 독재에 대한 학생운동을 벌였고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1여년을 감옥에서 보내야 했다. 그의 수감에는 ‘연애편지필화사건’이 결정적이었단다.

“목숨이 위협받는 일이였지만 연애편지를 쓰고 돌리는 내내 가슴 뛰고 즐거운 일이였어요. 게다가 여느 언론도 진실을 보도하지 않는 현실에서 사회는 저에게 사실을 폭로하는 일을 요구했어요. 제가 신명나서 했던 일이 사회적으로도 신명나는 일이였던 셈이에요.”

오 기자는 대학 졸업 후에도 신명나는 일을 그치지 않는다. 당시 불법간행물로 간주되던 월간지 <말>에 입사한 것이다. 월간지 <말>은 ‘보도지침사건’ 등 주류 언론에서 감히 다루지 못하는 진실을 폭로해 정부로부터 ‘천덕꾸러기’로 낙인찍힌 비주류 언론이었다.

 89년부터 2000년까지 12년 동안 월간지<말> 기자로 활동했던 그는 심층취재를 통해 굵직한 기사를 쏟아냈다. 노근리 양민학살사건 또한 오 기자가 월간지<말>을 통해 처음으로 밝혀낸 사건이었단다. 2박 3일 동안 노근리 사건 현장을 돌아다니며 미군이 양민을 학살하는 상황을 목격한 유족들의 증언을 거의 완벽하게 담아내 약 3백여 명에 달하는 사상자 명단까지 도표로 만들었다.

“노근리 양민학살사건이 월간지<말> 1994년에 커버스토리로 실렸어요. 하지만 이 사건에 대해 관심을 가지는 주류 언론사는 어느 곳도 없었어요. 당시 한국사회 여론시장 지도가 8:2로 짜여있는 상황에서 아무리 공론화가 필요한 일이라도 8이 침묵해버리면 끝이였어요.” 월간지<말>에서 보도가 나간 지 5년 후 미국통신사인 AP통신이 노근리 양민학살사건을 특집으로 보도했다. 이후 국내 주류 언론들은 처음 보도된 사실인 마냥 대서특필했단다. 한국 정부 안팎으로 공론화됐고 AP통신 기자들은 노근리 양민학살사건 보도로 퓰리쳐상까지 받았다고.

“비주류 언론단체에서 일하면서 누가 기사를 썼느냐에 따라 평가가 달라지는 상황이 종종 있었어요. 신문사의 지명도에 따라 기사의 영향력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기사가 담고 있는 진실의 가치에 따라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고 싶었어요. 오마이 뉴스를 만들기 10여 년 전부터 일부 선택된 기자만 기사를 쓰고 여론을 형성하는 것이 아닌, 모든 시민이 기자가 돼서 사회적 이슈를 만들어낼 수 있는 ‘시민저널리즘’에 대한 고민이 시작됐죠”

오마이 뉴스를 키운 건 8할이 시민
오 기자는 12년 동안 몸담고 있던 월간지<말>을 떠났다. 2000년대 인터넷 매체가 부상하면서 그가 꿈꾸던 시민들이 직접 참여할 수 있는 저널리즘 실현이 가능해진 것. 그는 대중의 참여를 바탕으로 4명의 상근기자와 727명으로 인터넷 신문 오마이 뉴스를 창간한다. 

“학생 운동 당시 대다수의 시민에겐 의견을 표명할 수 있는 권리자체가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제 소원이 공중파 방송에 30분만 출연하는 것이었어요. 하지만 지금은 좋은 컨텐츠를 생산할 수 있는 잠재력만 있다면 누구나 여론을 형성할 수 있어요.”

이러한 인터넷 발전과 시민 참여를 기반으로 오마이뉴스는 점차 성장해 창간 후 10년이 지난 현재 7만여 명의 시민기자들이 오마이뉴스에 컨텐츠를 공급하고 있다. 점차 수세를 넓혀가는 오마이뉴스도 처음에는 주류언론이 여론을 주도하고 있는 판에 끼어들기 쉽지 않았다.

“처음엔 인터넷 신문 기자라는 이유로 오마이뉴스 기자들은 기자회견장에 들어가지도 못했어요. 언론의 자유는 헌법이 보장하고 있는 권리임에도 정부부처는 주요 일간지 기자들에게만 관공서ㆍ청와대 출입을 허용하고 억지로 끼어 들어간다 해도 기자회견 당시 질문할 기회조차 주지 않았죠.”

이러한 관행을 깨기 위해 오마이뉴스 기자들은 초대받지 못한 기자회견에 기웃거리고 출입이 허용되지 않는 출입기자실에 들어가기 위해 물리적인 충돌을 감수했다. 이러한 장면을 오마이뉴스 웹페이지를 통해 생중계했고 이에 공감한 시민들에 의해 점차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했다고.

“세상은 점차 변화하고 있어요. 오마이뉴스를 구성하고 있는 시민기자들이 실핏줄 언론을 만들고 여러 블로거들이 사회적 이슈를 만들어내고 있어요. 변화의 흐름 속에 오마이 뉴스가 실현하고 있는 시민저널리즘은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세계 곳곳에서도 나타나고 있어요.”

오 기자가 시민저널리즘을 끌어내기 위해 고안한 ‘오마이뉴스’ 형태의 언론사가 점차 확대되가고 있단다. 미국 저널리즘 스쿨에선 오마이뉴스의 사례를 현 기성 언론이 가진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대안언론의 형태로 소개되고 있다고. 기성 언론에 편입하지 않고 새로운 대안을 제시하고 새로운 길을 열고 있는 오 기자는 대학생들에게 큰 판을 보라고 말한다.

“마라톤 같이 긴 인생에서 바로 눈앞에 보이는 것에 급급해 초초해하지 마세요. 누가 먼저 100미터를 멋있게 달렸느냐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늦더라도 지속적으로 좋아할 수 있는 일을 발견하세요. 그 시대의 흐름을 읽고 시대가 요구하는 일을 선택하세요.”
사진 심소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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