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휘대 위 40년, 원칙주의자의 음악인생
지휘대 위 40년, 원칙주의자의 음악인생
  • 류민하 기자
  • 승인 2010.11.20
  • 호수 133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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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교직생활 마감하는 박은성<음대·관현악과> 교수

25세, 믿기지 않는 나이로 지휘대에 설 때부터 '마에스트로'로 불리는 지금까지 박 교수는 전세계를 무대로 수많은 갈채를 받았다. 박 교수는 현란한 몸동작이 주는 화려함보다 작곡가의 의도를 정확히 구현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믿는 원칙주의자다. 이 원칙은 한 번도 변한적이 없다. 이번 학기를 끝으로 박 교수는 교단에서 물러난다. 교단에 서는 것은 마지막이지만 마에스트로 박은성의 음악은 끝나지 않는다. 박 교수의 퇴임을 맞아 그의 음악인생을 짚어봤다.

음악을 언제부터 시작하셨나요. 음악을 시작하신 계기가 궁금합니다.
"요즘의 음악인들에 비하면 비교적 늦은 나이지만 9살 때 시작했습니다. 부모님 중에 음악인도 계셨고, 항상 음악적인 분위기에서 자랐습니다. 그런 환경에 영향을 받아 자연스럽게 음악을 접하게 됐죠. 부모님도 적극 권유하셔서 시작하게 됐습니다."

약력을 보니 서울대 기악과에서 바이올린을 전공하셨는데 뒤늦게 지휘를 시작하신 이유는 무엇인가요.
"공부하면서 보니까 바이올리니스트나 피아니스트 지망생은 너무 많았습니다. 뭔가 구별되는 것을 하고 싶었죠. 지휘는 공부하기도 어렵고 당시엔 공부하는 사람도 별로 없었어요. 그러다가 임원식 교수님께서 제가 지휘자의 길을 가기를 권유하셔서 시작하게 됐습니다."

악기 다루기와 다른 지휘만의 매력은 무엇일까요.
"악기는 연주자가 연주함으로써 스스로 소리를 내지만 지휘는 몸의 움직임으로 오케스트라의 소리를 끌어냅니다. 여러 연주자가 동시에 같은 소리를 내게 하는 건 힘든 작업이지만 그 과정을 통해 각 악기들의 색깔이 조화를 이루게 하고 소리들을 배합해서 다른 세계를 열 수 있죠."

교수님을 처음 지휘의 길로 인도하셨던 임원식 교수님과 오스트리아 빈 유학시절 교수님을 사사하신 오트마 수이트너 거장은 교수님께 어떤 의미세요.
"임원식 교수님, 오트마 수이트너 교수님 두 분 모두 저에겐 중요한 은사님입니다. 대학교 다닐 때 오케스트라에서 악장을 맡고 있었는데 임원식 담당 교수님께서 연주자가 아닌 지휘자로서의 공부를 시작하게 인도해주셨고 빈 유학시절에는 오트마 수이트너 교수님을 통해 지휘기술, 곡의 해석, 음악의 역사 등을 많이 배우고 큰 도움을 받았습니다."

1970년 불과 25살의 나이로 국립교향악단 정기연주회에서 지휘자로 데뷔하셨습니다. 첫 무대를 기억하시나요. 가장 기억에 남았던 점을 말씀해주세요.
"그렇게 어린나이에 데뷔하는건 당시로서는 상상하기 힘들었죠. KBS교향악단 단원으로 활동하던 중이었는데 다른 단원들이 적극적으로 도와준 덕에 지휘자로서 무대에 설 수 있었습니다. 너무 어린 나이에 무대에 서서 그런지 많은 분들이 관심을 가져주셨고 축복해주셨습니다."

2002년 한국인 지휘자로는 처음 KBS교향악단을 이끌고 평양에서 연주하기도 하셨는데 어떻게 이 공연을 맡게 되셨는지요.
"그 연주회는 북한 오케스트라가 남한에 와서 먼저 연주한 것에 대한 보답의 의미였습니다. 당시 KBS교향악단 상임지휘자는 외국인이었고, 저는 수석객원 지휘자였습니다. 그래서 함께 평양에 갈 수 있었죠."

공연 소감이 어떠셨습니까.
"평양에서 하는 첫 무대라 많이 긴장했었지만 북한주민들도 우리 동포고 우리 모두 같은 생각을 하고있다 생각하니 더 애착이 가기도 했습니다. 공연이 끝나고 평양사람들이 진심으로 환호해줬습니다. 감격해서 눈물이 났죠."
40년이 넘게 세계 여러나라를 돌아다니며 공연하셨습니다. 그 중 91년 카네기홀에서 무대를 가지신 적도 있었는데 뉴욕타임즈 에서도 큰 호평을 했습니다. 그때 소감이 어떠셨나요?
"1977년 국립교향악단이 한국 오케스트라 최초로 카네기홀에서 연주했었습니다. 그 이후 청소년 오케스트라가 초청받아 연주하게 됐는데 미국 관계자들이 한국 청소년들의 훌륭한 실력을 보고 환호하고 극찬해줘서 너무 고마웠었습니다."

예술의 전당 교향악 축제에 정말 오랜 시간 참여하셨습니다. 가장 기억에 남았던 순간이 궁금합니다.
"19년 동안 교향악 축제에서 7개의 오케스트라와 18회 공연을 치렀습니다. 그 중 폴란드 작곡가 고레츠키의 교향곡 NO.3 '슬픈노래'를 연주했을 때가 기억에 남습니다. 2차대전 때 나치 수용소에 잡혀간 아들을 생각하며 작곡한 곡이죠. 우리나라에선 비교적 생소한 곡인데도 많은 관객들이 감동했었습니다. 역시 우리나라에 알려지지 않았던 브루크너 교향곡을 여러 회 공연하면서 관객들에게 많이 알리게 된 것도 교향악 축제를 떠올리면 항상 기억나는 부분입니다."

바이올린을 연주하시던 시절을 빼더라도 40년 이상 지휘봉을 잡으셨습니다. 교수님만의 지휘 철학을 알고싶습니다.
"오케스트라는 수십명이 모여 각기 다른 악기들로 한 가지 음악을 만들어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오케스트라가 '하나의 유기체'라는 생각으로 지휘봉을 잡았습니다. 지휘자는 무책임할 수도 있는 사람이에요. 연주자 중 유일하게 소리를 하나도 안 내면서 먹고 살죠. 그런데 박수도, 월급도 제일 많이 받아요. 그래서인지 지휘자 본연의 임무를 망각하는 경우가 보입니다. 음악을 만들어내는 것보다 쇼를 하고 멋진 몸동작으로 청중을 사로잡는 일에 신경을 쓰는 거죠. 저의 신념은 악보에 충실하는 것이고, 제 임무는 작곡가의 의도를 분명하게 전달하는 겁니다."

이번 해에 정년퇴임 하신다고 들었습니다.
"네 정년퇴임 하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애정을 가지고 있었던 교단을 떠난다니 믿어지지 않고 많이 아쉽습니다. 학생들과 많은 정이 들었는데 퇴임이후에도 좋은 연주로 계속 교류할 생각입니다."

스승으로써 마지막 해를 보내는 소감이 어떠신가요.
"한양대에서 재직한 시절은 제 인생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가르치는 입장이었지만 오히려 제가 학생들에게 배운 점이 많습니다. 학생들이 졸업 후 많은 분야에서 활동하는 모습을 볼 때 대견하고 뿌듯합니다. 그동안 정이 많이 들어서 아쉬운데 좋은 추억으로 갈무리하며 마지막 해를 정리하고 있습니다."

앞으로의 계획을 말씀해주세요.
"현재 맡고 있는 코리안 심포니 오케스트라에 전념하고 싶습니다. 기회가 닿는대로 오페라 지휘도 하고 싶고요. 지휘자를 꿈꾸는 어린 학생들에게 좋은 가르침을 주고 싶고 학생들에게도 제가 좋은 스승으로 남을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겠네요."
                                                  
류민하 기자 rmh719@hanyang.ac.kr
일러스트 김나래 기자
사진제공 예술의 전당 월간정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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