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양무역의 보석, 수에즈운하 쟁탈전
해양무역의 보석, 수에즈운하 쟁탈전
  • 유지수 수습기자
  • 승인 2010.11.20
  • 호수 133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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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하는 이집트에 위치하고 있으나 이집트의 소유가 아니다”이집트의 총독 무하마드 사이드가 수에즈 운하 건설과정을 비유해 남긴 말이다. 오늘날 수에즈운하는 이집트 경제뿐만 아니라 세계 경제 흐름 해석에도 중요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전 세계 물동량의 중심이었던 수에즈운하는 기술의 발전으로 대형선박들을 수용하기 위해 7차에 걸친 확장공사를 진행하여 현재 전 세계 물동량 7.5% 통과를 유지하고 있고 수에즈운하 선박통행료는 관광, 외국 근로자 송금과 함께 이집트의 3대 외화 수입원이다. 과거 수에즈 지역은 유럽에서 동방으로 향하는 관문이자 아프리카 대륙의 식민 지배를 위한 거점지였다. 케이프타운을 돌아가야 했던 기존 항로보다 훨씬 짧은 항로를 제시함으로써 해상무역의 부흥을 가져왔다. 하지만 경제적 중요지인 만큼 개발과 성장에 열강들의 입김이 작용했다.

프랑스인 페르디낭 드 레셉스는 1858년 이집트 정부에게 운하건설을 제안했다. 당시 오스만제국의 지배에 있던 이집트는 경제적 이익과 자주적 독립기회 마련을 위해 건설을 추진했으나 오스만제국은 공사허가를 거부했다. 송경근<조선대ㆍ아랍어과> 교수는 “운하개통 후 이집트에 대한 서구 열강의 개입이 커질 것을 우려해 공사허가를 거부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영국 또한 운하건설을 반대했다. 운하가 건설되는 이집트가 특정 나라에 의해 지배된다면 영국의 지중해 진출이 불가능해지며 더군다나 프랑스는 경쟁국이기 때문이다.

운하 건설이 어려워지자 레셉스는 ‘수에즈 운하 회사’를 설립해 파리 시민에게 직접 주식 지분을 판매하여 자금을 모았고 팔리지 않은 남은 주식들은 무하마드 사이드가 매입하여 건설을 시작할 수 있었다. 이후 건설추진 과정에서 오스만제국과 마찰이 있었지만 나폴레옹 3세의 중재로 오스만제국 황제의 최종공사허가서가 나왔다.

우여곡절 끝에 1869년 11월 17일 수에즈운하가 개통되었으나 영국의 방해로 길어진 공사기간 때문에 예상치 못한 수입 적자가 발생했다. 운하 회사의 지분은 프랑스와 이집트가 절반씩 소유하고 있었지만 적자에 따른 부담은 전부 이집트가 부담해야했다.

재정위기가 찾아온 이집트는 소유지분을 영국에게 넘겨 1880년대 초부터 수에즈운하는 프랑스와 영국의 공동소유가 됐다. 영국은 지속적으로 운하를 확장하며 경영권을 잡았으며 정치적으로 이용해 국제 사회에서 영향력을 행사했다. 이집트가 반제국주의 반란을 일으키자 군대를 파견하고 운하를 폐쇄했다. 이후 군사 점령을 지속하다 1904년 영ㆍ프 협정에서 영국의 이집트 지배 인정 조약을 맺은 후 군대를 철수했다. 그러나 영국은 여전히 자국의 판단으로 운하를 폐쇄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다른 국가들도 수에즈운하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당시 제국주의 흐름에 있던 이탈리아가 운하의 국제 관리를 주장했다. 이후 독일이 이탈리아와 함께 운하의 군사점령을 계획했으나 실행되지 못했다. 이집트 정부는 영국에게 수에즈운하의 반환을 요구했으나 거절당했다. 이후 나세르 이집트대통령이 1956년에 수에즈운하 국유화를 선언했다. 이에 반발한 영국과 프랑스는 이스라엘과 함께 제2차 중동전쟁을 일으켰으나 미ㆍ소의 개입으로 수에즈운하는 이집트의 품으로 돌아왔다.

논문「수에즈운하회사의 성립과정과 국유화 전의 소유권변화에 관한연구」에서 박명섭<성균관대학원ㆍ경영학부>교수는 소유권 경쟁에 대해 “19세기는 해운을 이용한 식민지 개발을 위한 거점 확보의 경쟁시대였기 때문에 운하를 둘러싼 경쟁이 치열했던 것”이라며 “소유권의 변화는 당시의 해운력 및 제국주의 세력 변화를 반영한다”고 말했다.

또 송 교수는 “수에즈 운하가 이집트에게 엄청난 이익과 국가 전략적 가치를 높여준 것은 사실이나 그 과정을 봤을 때는 이집트의 주권 침해를 보여주는 대표적 상징물이다”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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