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을 향한 투쟁, 아나키스트 이회영
독립을 향한 투쟁, 아나키스트 이회영
  • 김미연 수습기자
  • 승인 2010.10.30
  • 호수 132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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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2년 11월, 우당 이회영 선생은 만주로 떠나기 위해 아들 이규창과 함께 상해의 황포강 부두로 향했다. 그는 만주에 연락 근거지를 만들고 지하 조직을 건설하는 등의 사명을 띠고 홀로 만주행의 배를 탔다.
그런데 며칠 후 이규창은 이회영 선생이 대련 수상경찰서에서 사망했다는 전보를 받는다. 우당 선생은 67세의 몸으로 12일간의 혹독한 심문을 침묵으로 견디다가 죽음에 이른 것이다. 

이회영 선생의 집안은 대대로 문벌이 높아 ‘삼한갑족’이라 불릴 만큼 명문 집안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나라가 위기에 처하자 명문의 기득권을 과감히 포기하고 평등사상을 몸소 실천에 옮겼다.

사람들에게 많이 알려지지 않았지만 우당 선생은 헤이그 특사 사건과 고종 국외 망명을 계획하는 등 조국 독립을 위한 여러 가지 사건을 기획하고 참여했다. 이 두 계획은 비록 실패하긴 했지만 성공했다면 일제에 큰 충격을 줄 수 있는 것들이었다.

이외에도 그는 1907년 4월경 이동녕, 양기탁, 전덕기 등과 함께 비밀리에 신민회를 결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신민회는 민족교육과 민족문화발전에 힘썼으며 만주지역에 독립기지를 건설하고 신흥무관학교를 세우는데 공헌했다.

신흥 무관학교는 독립운동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입학한 학생들은 평생을 독립운동에 바칠 것을 맹세하며 졸업 후에 대부분이 독립군의 병사나 비밀결사대원으로서 일제에 맞선다. 김좌진 장군이 이끈 독립군 부대가 만주에서 일본군을 통쾌하게 격파한 청산리 대첩에도 신흥무관학교 출신이 대거 가담했다.
아나키스트로서의 이회영 선생의 모습이 나타난 것은 1920년대 초반 북경으로 망명해 아나키즘의 사상을 접하면서 부터였다. 그 이전에도 이회영 선생은 3ㆍ1운동을 계기로 독립운동에 대한 열의가 높아지고 임시정부 수립의 의견이 나오자 정부라는 행정적인 조직보다는 각 조직이 협동ㆍ협력할 수 있는 독립운동본부를 조직하자고 주장해 아나키스트로서의 면모를 보여줬다.

아나키즘은 무정부주의로 잘못 번역돼 “정부 조직이 없는 혼란상태”라는 의미로 받아들여져 많은 오해를 받아왔다. 그러나 아나키즘의 본질적 의미는 정치 조직과 국가 행정기관이 행사하는 권위주의를 반대하며 ‘인간 상호간에 서로 돕는 것이 사회 발전을 가져온다’는 러시아의 크로포트킨의 상호부조론을 바탕으로 한 자유연합주의다. 

이회영 선생의 아나키즘은 ‘만인이 평등하다’는 평등 원리를 실천하면서도 공산주의와 같은 독재에 빠지지 않고 자유를 확장할 현실적 방책을 세우기 위한 것이다.

그가 꿈꾸던 조국은 국민 상호 간 일체의 불평등과 부자유가 없으며 권력이 중앙에 집중되는 것을 피해 지방 분권적 지방자치제를 확립한 뒤 지방자치제들이 연합해 중앙 정치 기구를 구성하는 사회였다.

서중석<성균관대ㆍ사학과> 교수는 “이회영 선생은 독립운동가로서 아나키즘을 수용했으며 만주에 공동농장을 건설해 이상적 사회를 만들고자 했다”며 “이회영 선생은 이론가보다는 행동하는 아나키스트로서 다른 아나키스트들의 중심에서 운동을 주도했다”고 말했다.
 김미연 기자 horokkaa@hanyang.ac.kr
 일러스트 김나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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