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이야 광화문
오랜만이야 광화문
  • 우지은 기자
  • 승인 2010.10.03
  • 호수 132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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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 복원, 전통과 현대를 잇다

지난 8월 15일 한일 강제 병합 100주년을 맞아 새로이 복원된 광화문과 경복궁이 모습을 드러냈다. 2006년 12월부터 약 3년 넘게 진행된 ‘광화문 제 모습 찾기’ 사업을 통해 원형 복원된 광화문은 무엇을 담고 있을까

한국의 역사와 함께해온 광화문
‘왕의 큰 덕이 온 나라를 비춘다’는 의미의 광화문은 1392년 조선 건국이후 1395년(태조4년)에 건립된 문으로 임금의 궁궐인 경복궁의 정문이다. 건립 당시의 이름은 사정문(四正門)이었으나 1425년(세종7년)에 광화문으로 바뀌었다.
이후 임진왜란과 여러 전투를 겪으며 훼손된 광화문은 270여 년 간 국가재정문제로 재건되지 못하다가 1865년(고종 2년),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재건됐다.
하지만 1927년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 청사가 들어오게 되면서 광화문은 경복궁의 동문인 건축문 위쪽으로 옮겨졌다. 이에 경복궁의 중심축과 5.6도 틀어지고 후면으로 14.5m물러나 자리하게 됐다. 조선 정궁의 정문을 옮겨 우리 민족의 정기를 말살시키려한 일제의 의도가 나타난 부분이다.
아픔의 역사는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한국전쟁을 겪으며 목조로 건축된 상부 다락부분이 소실돼 1968년 박정희 정부는 고증없이 철근콘트리트를 사용해 재현을 시도했다. 하지만 광화문 앞으로 도로가 개설돼 있어 일제에 의해 왜곡된 광화문의 배치 축과 위치는 바로잡지 못했다.
복원답지 못한 복원으로 논란거리를 사게 된 광화문은 김영삼 정부시절 경복궁 장기복원계획에 들어가 경복궁 내 다른 건물의 복원을 마친 후 2006년 12월 4일 복원이 시작됐다.  철저한 고증을 바탕으로 복원하기 위해 최초 광화문이 위치했던 곳의 발굴조사도 병행됐다. 광화문이 근정전-근정문-흥례문으로 이어지는 경복궁의 주요 전각ㆍ문의 남북 방향 직선 축과 정확히 일치한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조선 초 태조 때의 광화문 잔존물도 확인됐다. 이때의 조사결과는 고종 때 광화문이 태조 때의 광화문과 규모와 크기, 중심축이 거의 일치한다는 사실을 보여줌에 따라 과거와 현재를 잇는 역사적 전승 의미도 한층 깊어졌다.
복원된 광화문의 처마 두께는 일제 기록인 15㎝에서 21㎝로 두꺼워졌다. 광화문 복원공사의 도편수 신응수 대목장이 임금의 궁궐 정문 처마가 숭례문의 처마 두께인 21cm보다 작게 측정된 기록이 상식적으로 맞지 않다는 의구심을 제기한 것이다. 결국 서까래의 크기가 커짐에 따라 비례가 일치하게 돼 지금의 광화문은 더욱 근엄한 모습을 띄게 됐다.

문화재는 보존진행형
광화문과 숭례문 뿐 아니라 학교 주변에서도 복원되고 있는 문화재들을 만날 수 있다. 신소재공학관의 구름다리에서 한눈에 보이는 살곶이 다리(이하 전곶교)가 그 예다. 이는 서울에서 동쪽 교외로 통하는 교통의 요지로 임금의 별궁 행차 시 많이 이용되던 조선시대의 가장 긴 다리다.
이러한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1967년 사적 제160호로 지정됐지만 88올림픽 당시 한양대체육관이 배구경기장으로 사용되며 차선을 넓히기 위한 아스팔트 공사의 대상이 됐다. 2005년 10월엔 다리에서 금 간 돌이 발견돼 성동구청은 문화재청에 세 차례나 복원 지원 예산을 요청했지만 순위에 밀려나는 바람에 복원되지 못했다. 그러다 2009년 국비와 시비를 지원받아 한양대박물관과 함께 올해 초 발굴조사를 마쳤다.
김희원<성동구청ㆍ문화재관리과> 주무관은 “발굴 조사 결과 추가 발굴 작업이 필요하다고 판단돼 현재 문화재청의 지원을 받기 위한 조사 보고서를 작성하는 단계로 그 후 본격적인 복원 작업이 시작될 것”이라고 전했다.
한양대박물관은 전곶교의 발굴조사를 기념해 지난 해 말부터 올해 초까지 ‘다시 옛 다리를 건너다’라는 기획전을 개최했다. 배현준<한양대박물관ㆍ학예실> 연구원은 “발굴 조사는 복원 작업을 위한 기초 과정”이라며 “전곶교 이외에도 발굴이 끝나면 다시 재개발 될 피맛골과 아직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지 못한 노거수 등 시급히 보존돼야 할 문화재들이 우리 주위에 많다”고 말했다.
서울 성곽도 복원되는 문화재 중 세간의 이목을 끄는 대표적 문화재다. 성곽은 특히 요즘 확산되고 있는 올레길, 순례길 등과 맞물려 파급효과를 내고 있다. 서울 성곽은 조선 건축물 중 가장 오래된 역사 유물로 사적 제10호로 지정돼 있는 문화재지만 도시 발전과 근대화 시절, 성곽의 상당부가 도로 및 철도를 만들기 위해 파괴됐다.
서울시가 성곽복원을 위한 사업을 서둘러 진행 중에 있지만 실제 성벽 복원 작업은 현대적인 기술로 다듬어진 석재를 쌓아 시멘트로 접착하는 방식으로 현대식 벽과 다를 바 없다.
『서울 성곽 그 경계를 넘어』의 저자 박진호<인하대ㆍ건축학부> 교수는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성곽을 이루던 돌들을 빌딩의 축대나 학교 건물의 기초로 사용한 경우가 있다”며 “성벽이 심하게 훼손돼 원형 복원이 어려운 경우에는 무리한 복원보다는 현 상태 그대로 보존하는 방법이 낫다”고 설명했다. 박 교수는 책을 통해 성벽이 단순히 역사적 흔적을 답습하기 보단 미래 도시와의 양립을 중시하는 관점으로 창의적인 대안을 제시하기도 했다.
문화재에는 건축물만 포함되는 것은 아니다. 수령이 오래된 나무 인 노거수는 보호수나 천연기념물, 시도 기념물 등 다양한 방법을 통해 보호ㆍ보존된다. 2008년까지 우리나라에는 156그루의 노거수가 천연기념물로 지정돼 있다. 정대영<문화재청ㆍ천연기념물과> 직원은 “보호수는 산림청이 총괄하게 되고 천연기념물은 문화재보호법의 적용을 받아 주변 토지 매입 등의 문화재청 지원을 받는다”며 “더욱이 천연기념물관리 입법을 관련 전문가가 하게 되므로 효과적”이라고 전했다.

옛것과 새것의 조화, 문화재 복원
문화재 복원은 첨단 신기술이 동원되는 작업의 과정이기도 하다. 최초 양녕대군의 글씨라고 알려진 숭례문 현판은 한국전쟁을 겪으며 훼손됐다. 조각난 현판을 땜질로 이어붙이는 복원과정에서 변형이 일어났다. 이후 2008년 방화사건 당시 추락해 다시 쪼개진 현판은 이번 복원을 계기로 원본에 더욱 가까워지게 됐다.
X선을 이용해 타다 남은 목재에 포함된 수분의 양과 비슷한 목재를 찾는 기술도 등장했다. 이는 잔존 목재와 복원될 목재의 수분 함유율이 달라 현판의 뒤틀림이 일어날 우려를 사전 방지 해주는 해결책이다.
방사선도 목제 문화재 보존에 기여하고 있다. 한국원자력연구원 부설 정읍방사선과학연구소가 발견한 감마선은 목제 문화재의 원형을 손상하지 않고 그 속에 숨은 각종 미생물을 죽인다. 숭례문 복원에 다시 쓰일 목제 자재들을 살충하지 않고 그대로 사용할 경우 흰개미ㆍ권련벌레와 같은 해충들이 번식해 목재를 갉아먹기 때문이다. 연구소 측은 “감마선은 목재의 경우 35cm나 깊이 들어가 살충할 수 있으며 그 외 단청색이나 목재 강도, 내부구조에 영향을 주지 않으며 화학 약물로 인한 2차 오염 등의 우려 발생이 없고 많은 양을 단시간내 처리할 수 있어 여러 문화재에 적용할 수 있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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