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을 지탱해준 낙관의 힘
인생을 지탱해준 낙관의 힘
  • 류민하 수습기자
  • 승인 2010.07.23
  • 호수 132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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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리지만 꾸준히, 노병준<울산 현대 호랑이> 선수

"노병은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질 뿐. 더 나은 미래를 기약하며 또 한번 뛰어보자." K리그의 조커, 노 선수의 미니홈피 대문글이다. 그의 이름이 들어가는 격언에 웃음이 나기도 하지만 그가 선수생활 내내 지녔던 신념이 그대로 드러난다. 새 소속팀 울산 현대에서 선수생활의 남은 꿈을 꾸는 노 선수와 이야기를 나눴다. 그가 굴곡진 선수생활을 버텨온 힘은 상황에 대한 긍정이었다.

축구인생의 인연
그는 많은 선수들이 그렇듯 어렸을 때부터 축구를 시작했다.

“5살 때부터 외삼촌이랑 축구를 했어요. 외삼촌이 하석주 현 전남 드래곤즈 수석코치와 대학동기 셨는데 대학팀에서 주장을 맡으시고 실업팀에서도 뛰셨던 분이에요. 군 복무 중에도 휴가 때마다 나와서 축구를 가르쳐 주셨어요. 그런 외삼촌 모습을 보면서 축구선수의 꿈을 키웠죠.”

그가 본격적으로 축구를 시작한건 초등학교 3학년 때 학교팀에 들어가면서다. 그렇게 초등학교, 중학교 시절을 거치고 동래고로 진학했다. 그곳에서 축구선수 인생에 중요한 인연을 만난다. 이회택 현 대한축구협회 부회장의 눈에 띄게 된 것이다. 당시 우리학교 체육부장으로 있었던 이 부회장은 실력있는 고교 유망주를 뽑기 위해 전국 고등학교를 돌아다니는 중이었다.

“스카웃 하려고 오신줄은 몰랐어요. 그때는 누가 오셨다고 하면 아무것도 모르고 나가서 무작정 인사했었으니까요. 몇 번이나 저를 데려가기 위해서 찾아오셨대요. 알고보니 저를 고 1 때부터 마음에 들어 하셨대요. 다른 대학들에서도 오라는 요청이 있었지만 축구팀이 강했던 한양대를 선택했죠.”

우리학교에 입학한 노 선수는 여러 대회에 참여해 축구선수로서의 커리어를 쌓아갔다. 그는 가장 기억에 남았던 경기로 2000년 춘계 대학 연맹전 결승을 꼽았다. 당시 우리학교 축구팀은 결승에 올라 고려대와 만났다. 그는 두 골을 넣어 득점상과 어시스트상을 수상했지만 팀은 끝내 3대 4으로 분패했다.

“경기종료 휘슬이 울리고 나서 골대를 붙잡고 원없이 엉엉 울었어요. 정말 아쉽고 속상했죠. 팀이 졌는데 제가 상을 받은건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어요.”

노 선수를 대학팀으로 이끈 이회택 감독과의 인연은 프로 데뷔로까지 이어졌다. 대학팀시절에도 노병준의 플레이를 마음에 들어 했던 이 감독은 이후 지휘봉을 잡고 있던 전남 드래곤즈로 노 선수를 불렀다. 그는 2002년 졸업과 동시에 전남 드래곤즈에 입단했다.

낙관으로 이겨낸 언덕의 오르내림
대학 졸업 후 바로 전남 드래곤즈에 들어갔지만 노 선수가 탄탄대로를 걸은 것은 아니었다. 입단 후 받은 메디컬 테스트에서 간염이 발견된 것이다. 간염보균자는 빨리 피로해지는 증상이 있다. 설상가상으로 아킬레스건 부상까지 겹치는 악재가 더해졌다. 간간이 경기에 출전해 뛸 수는 있었지만 몸 상태 때문에 노 선수는 입단 첫 해에 이렇다 할 활약을 펼치지 못했다. 

“제가 간염이 있다는 걸 처음 알았어요. 원래는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주위에서 간염이 있으면 쉽게 피로해진다는 말을 들으니까 괜히 더 힘들더라고요. 거기에 아킬레스건 부상도 겹치니 더 힘들었죠. 그해 겨울에 정말 마음고생이 심했어요. 축구화 끈을 더 조여매야 겠구나 하는 생각뿐이었죠. 풀타임을 뛸 수 없더라도 주어진 시간만큼은 최선을 다하자고 다짐했어요.”

그런 마음가짐 덕분인지 그는 다음 시즌에 7골 4도움을 폭발시키며 K리그의 조커로 부상했다. 하지만 난관은 끝이 아니었다. 전남에서의 선수생활을 마무리하고 2006년 오스트리아 리그의 그라츠 AK로 떠났지만 계약문제와 부상문제로 고생을 겪었다. 다음 해 팀이 파산해 한국으로 돌아와서도 선수 등록기간을 놓쳐 한동안 그라운드에 설 수 없었다. 독일과 스위스 리그에서 그에게 러브콜을 보내왔지만 허리 수술 후 휴식을 취하고 있던 때라 계약을 놓치고 말았다.

“소속된 팀이 없어서 혼자 헬스장에서 운동하고 찜질방에도 갔어요. 포항에 입단한 뒤에도 공백기간이 길어서인지 마음먹은 만큼 안되더라구요. 힘든 시간들이었죠. 다행히 2008 후기 리그부턴 팀에 완전히 적응했어요”

2009년은 노 선수와 포항 스틸러스에게 뜻깊은 한 해였다. FA컵과 피스컵 그리고 AFC 챔피언스리그 까지(이하 AFC). 포항은 여러 국내외 대회에서 우승을 휩쓸었다. 그는 피스컵 4강전에서 FC서울을 상대로 세 골을 넣어 팀을 결승으로 이끌었고, 나이지리아와의 AFC 결승전에선 그의 황금같은 프리킥 골이 포항의 우승을 결정지었다. 그는 AFC 최우수 선수로 선정됐다.

“실감이 하나도 나지 않았어요. 경기가 끝나고 선수들과 기쁨을 만끽하고 있는데 갑자기 관계자가 다가와서 수상대로 가자고 하는거에요. 어리둥절했죠. 같이 뛰었던 선수들 다같이 잘한 경기라 정말 누가 받아도 이상하지 않았는데 제가 받은거죠. 그래도 그동안의 시련을 보상받은 것 같아 행복했습니다. 언젠간 잘 풀릴거라는 기대가 헛되지 않았구나 하고 생각했어요”

12월엔 남아공 전지훈련에 참가하는 35명의 대표팀 예비명단에 포함되기도 했다. 지난 2000년 올림픽 대표팀에 뽑힌 이후 두 번째 태극마크와 인연을 맺게 된 셈이었다. 또 월드컵에 출전할 처음이자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기회였다. 하지만 그는 이미 세 개의 큰 대회를 치렀고 정규리그 일정과 클럽월드컵을 소화하고 있던 터라 체력을 많이 소모한 상태였다.

“제가 가진 모든 것을 보여주고 싶었는데 너무 안타까웠어요. 나이도 무시 못하겠더라고요. 그래도 선수생활이 끝나기 전에 성인 대표팀에 들어가봐서 영광이었어요. 제 축구인생에 나름대로 한 획을 그었다고 자부합니다.”

가슴 뛰는 경기를 만드는 선수
32세. 9년차 선수. 노 선수도 어느새 은퇴를 바라보는 나이다. 그는 은퇴 후에 어떤 선수로 기억되고 싶을까.

“처음 프로선수 생활을 시작했을 땐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평범한 선수로 팀에 있어도 괜찮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제가 잘하면 팬들이 절 기억해 주시는게 너무 기분 좋더라고요. 일단 어느 팀에 가든 최선을 다했던 선수로 기억하시면 좋겠어요.”

축구 경기를 보다보면 종종 지루해질 때가 있다. 후반전이 되면 선수들의 체력이 고갈되기 때문이다. 집중력이 떨어진 선수들은 실수가 잦아지고 경기 흐름은 군데군데 끊긴다. 그는 늘어진 경기장을 흔들었던 선수로 떠올려지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팬들은 재미있는 경기를 원합니다. 지지부진한 경기가 계속되서 슬슬 지루해지려고 하는데 어떤 선수가 들어와서 공은 별로 잡지 못하더라도 악착같이 상대선수에게 달려들고 여기저기 휘젓고 다니면 팬들은 기대하게 되죠. 곧 무슨 일이 터질 수도 있겠구나. 저 선수가 들어가기만 하면 경기가 흥미진진해졌다고 기억해주시면 정말 기쁠거 같아요.”

노 선수는 얼마 전 포항을 떠나 울산 현대 소속이었던 이진호 선수와 6개월간 맞임대 됐다. 그는 몇 차례 경기에 나섰지만 아직 공격포인트를 기록하진 못했다. 여전히 그의 우선순위는 자기가 속한 팀에서 최고의 기량으로 팀에 기여하는 것이다.

“이제 소속팀이 바뀌었으니 적응하는게 급선무겠죠. 선수는 어느팀에 속하든 잘 뛰어야 해요. 포항에서 많은 것을 이뤘지만 K리그 우승은 못해봤어요. 울산에서 제 축구인생의 마지막 꿈을 꼭 이루고 싶습니다.”       류민하 기자  rmh719@hanyang.ac.kr
 일러스트 주소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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