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 세계를 비유해 체제의 정체를 논하다
미래 세계를 비유해 체제의 정체를 논하다
  • 차진세 기자
  • 승인 2010.03.22
  • 호수 131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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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라이트노벨의 시조가 된 「은하영웅전설」



21세기 중반, 여전히 자본주의진영과 공산주의진영 간의 냉전은 계속되고 있었다. 갈등이 심화된 끝에 핵전쟁이 발발하여 지구는 암흑기를 맞게 된다.

이후 식민지 행성과의 전쟁을 거치며 폐허가 된 지구는 우주에서의 주도권을 상실하게 되고, 독립을 이룬 식민지 행성들은 ‘은하연방’을 설립한다.

하지만 은하연방 역시 쇠락을 막을 수 없었고 마침내 ‘루돌프 폰 골덴바움’이라는 인물이 황제로 등극해 ‘은하제국’을 세운다. 그리고 ‘열성 유전자 배제법’ 등을 도입해 마치 히틀러와 같은 독재자가 된 골덴바움에 저항한 공화주의자들이 은하제국을 벗어나 민주공화정인 ‘자유행성동맹’을 세우게 된다. 이렇게 수백 년에 걸친 제정과 공화정 간의 대결이 벌어진다. 다나카 요시키의 소설 「은하영웅전설」의 배경이다.

「은하영웅전설」의 성공과 라이트노벨
1982년 처음 1권이 발표된 「은하영웅전설」은 10권의 본편과 4권의 외전으로 구성돼있다. 각 권마다 100만부 이상의 판매고를 올렸을 만큼 성공을 거뒀으며 애니메이션, 만화책, 게임 등으로 재창조됐다. SF(Science-Fiction)를 배경으로 한 미래소설이지만 SF적인 묘사가 별로 없고 오히려 중세나 근대의 전쟁 서사시와 같은 분위기가 흐른다는 점이 특징이다.

일각에서는 「은하영웅전설」을 최근 유행하고 있는 ‘라이트 노벨’의 시조로 놓기도 한다. 라이트 노벨은 말 그대로 ‘가벼운 소설’을 뜻하는 단어로, 보통 쉽게 읽히고 순수문학과 달리 SFㆍ판타지ㆍ액션 등 장르적 특성의 사용이 자유로운 소설을 의미한다.

대중문화평론가 김봉석 씨는 “라이트 노벨은 상황이나 배경을 서사적으로 설명하는 것보다는 등장인물의 캐릭터성에 치중하는 모습을 보인다”며 “「은하영웅전설」도 SF소설을 표방하지만 넓게 보면 라이트노벨의 범주에 들어간다”고 전했다.

라이트노벨은 표지나 삽화에 애니메이션 풍의 일러스트를 많이 사용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라이트노벨이 일본에서 본격적으로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2000년대 중반부터다. 최근에는 중고생뿐만 아니라 30대 젊은이들로 독자층이 넓어져가고 있는데, 시장 규모도 점차 커져가는 추세다.

김 씨는 “한 라이트노벨 공모전에서는 라이트노벨의 기준을 ‘비주얼화 되는 것을 의식한 엔터테인먼트 소설일 것, 판타지ㆍ미스터리ㆍ연애ㆍSF 등 장르 불문’으로 놓았다”며 “이는 라이트노벨이 기존의 장르를 모두 섭렵한 탈 장르화된 새로운 장르임을 의미한다”고 전했다.

일본의 서점가들은 1990년대 후반 미스터리 소설의 유행 이후 라이트노벨이 압도적으로 인기를 끌자, 서점의 라인업을 미스터리에서 라이트노벨로 일신하는 등 독자들의 움직임에 맞춰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다.

작가들의 장르 넘나들기는 이러한 유행과 무관하지 않다. 이미 작가들은 자신들의 '작품관'이나 '세계관'을 독자들에게 '파는' 것이 아니라, '장르' '스타일'로 소비된다. 독자가 작가와 스토리를 만들고 있는 셈이다.
라이트노벨 계열의 작가들은 작가의 이름이 작품을 말해주던 시대의 작가들과는 획을 달리 한다. 그리고 이제 라이트노벨은 서사가 아니라 비주얼, 즉 스타일로 넘어가고 있다. 위 라이트노벨 대회 응모 요령은 더는 서사가 스토리의 중심이 아님을 말해주고 있다.

또한 김 씨는 “라이트노벨은 애니메이션이나 게임 등으로 재창조되는 것을 노리고 나오는 경우가 많다”며 “라이트노벨이 작품이 아니라 조합된 이야기, 즉 애니메이션이나 게임 등의 스토리를 제공하는 스케치가 되고 있음을 잘 보여준다”고 주장했다.

「은하영웅전설」에 담긴 정치관
「은하영웅전설」은 선한 자는 보상을 받고 악한 자는 벌을 받는다는 전통적인 권선징악론을 파괴한 것으로 유명하다. 다나카 요시키는 5세기가 지난 전제주의와 민주주의는 반드시 부패가 된다고 주장했는데 이는 현실 역사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작품을 흐르는 큰 줄기는 ‘부패한 민주주의가 나은가, 효율적인 엘리트주의가 나은가?’에 있다.

이는 포퓰리즘(대중인기영합주의) 정치가 벌어지고 있던 ‘자유행성동맹’의 영웅 ‘양 웬리’와 수백년간 제정이 이어져오던 ‘은하제국’의 사령관 ‘라인하르트 폰 로엔그람’의 논쟁과 사상을 통해 드러난다.

논문 「은하영웅전설 등장인물의 이데올로기」의 저자 강성환 씨는 “저자 다나카 요시키는 반드시 민주주의 체제를 선택하는 것이 옳다고 하지 않는다”며 “민주주의를 표방한 국가도 중우정치에 빠질 수 있고 엘리트주의를 표방하는 전제주의도 항상 완벽한 지도자가 나올 수는 없다는 점에서 모든 체제는 영원하지 않다”고 주장했다.

또 “작가가 주장하는 것은 안정된 사회는 체제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정치에 참여하는 구성원 개개인에 달려있다”며 “「은하영웅전설」은 아무리 민주적인 정부라도 권력자에 의해 이용될 가능성이 충분하다는 것을 말하는 작품”이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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