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의 역사는 이곳에서 시작 된다
야구의 역사는 이곳에서 시작 된다
  • 최서현 기자
  • 승인 2010.03.13
  • 호수 131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한국프로야구 역사에 전설로 기록된 야구인, 이만수<체육학과 78> 동문

최초였다. 프로야구 첫 안타, 첫 타점, 첫 홈런. 그리고 최고였다. 5년 연속 골든글러브, 3회 연속 홈런왕. 시련을 딛고 미국에서도 그는 전설이 됐다. 그는 한국인 최초 메이저리그 코치이자 선수들의 아버지였다. 거짓말 같은 ‘야구인 이만수’의 이야기에는 언제나 열정과 진심이 함께했다. 갑작스레 인터뷰를 요청한 기자에게 사람 좋게 웃으며 사인볼을 건네는 그를 보며 같이 따라 웃지 않을 수가 없다. 야구인생 30년, 그의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새벽보다 빠르게, 자정보다 열정적인
이 동문의 하루는 새벽 4시부터 시작된다. 하루를 길게 보내기 위함이다. 해도 뜨지 않은 시각에 일어나 운동을 하거나 책을 읽는다. 때로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어떤 생각을 한다고 정해져있는 것은 아니지만 주로 야구에 대한 것, 리더에 대한 것, 가족에 대한 것일 테다.

밤에는 일기를 쓴다. 글 읽는 것, 쓰는 것을 좋아해 하루도 빼놓지 않고 일기를 써왔고 이제는 가장 아끼는 보물이 됐단다. 일기뿐만이 아니다. 야구인답게 매일 야구일지를 쓴다. 어린 선수시절부터 계속 해온 것들이다. 오늘 하루의 연습을 기록하고, 실수를 돌아본다. ‘내가 감독이라면’이라는 생각으로 자신의 문제를 되짚어보기도 한다.

“야구일지를 쓰면서 감독이 될 제 모습을 상상해 보곤 해요. 이런 과정이 지금의 저를 성장케 했다고 생각해요. 집중해서 쓰다보면 늦은 밤이 되기도 하지만, 어릴 적부터 해와서인지 귀찮다는 생각은 해본 적도 없어요.”

그의 새벽형 생활은 갑자기 시작한 것이 아니다. 무려 중학교 1학년, 14살 때부터다. 단지 야구가 재밌어보여서 시작하게 됐고 늦게 시작한 만큼 남들보다 뒤처지지 않기 위해 노력형 인간이 되기로 마음먹은 후, 바로였다. 처음 시작은 투수였다. 전국대회에서 우승을 할 정도로 출중한 실력이었지만 팔이 휘면서부터는 포수로 경기에 임했다. 너무나 열심히 했던 탓인지 중학교는 4년을 다닐 수밖에 없었지만, 야구에서만큼은 누구보다 열정적이었다. 당시 인기가 굉장했던 고교야구에서도 그는 두각을 드러냈고 그의 열정 또한 모자람이 없었다.

“고교야구에 몰려있던 관심은 그대로 대학교까지 이어졌어요. 가고 싶은 학교, 갈 수 있는 학교들이 있었지만 야구에서는 확실했던 한양대를 택했어요. 이 학교라면 야구를 제대로 할 수 있겠다 싶었죠.”
대학입학은 그의 ‘인생의 전성기’가 시작된 시점이다. 이 동문의 열정과 성실함, 그 능력을 본격적으로 드러내기 시작한 때다.

한양대 그리고 캠퍼스 낭만
그에게 한양대는 큰 의미를 지닌다. 재학시절 한양대는 그가 야구를 할 수 있는 좋은 환경이 충분히 갖춰져 있었다. 이런 환경 속에서 그는 무리 없이 1학년 때부터 국가대표로 발탁돼 기량을 선보였다. 대학입학 후에도 게을리 하지 않았던 연습 덕일 것이다.

이 동문이 학교에 의미를 두는 것은 이뿐만이 아니다. 자신의 인생에서, 야구인으로서 살 수 있는 힘이 돼준 아내를 만난 곳이기 때문이다.

“사실 대학에 오면서 미팅을 하는 게 가장 기대됐었어요(웃음). 고등학교 때까진 엄격한 아버지 때문에 저에게 온 팬레터 하나 받질 못했었거든요. 대학에 와서 처음 만난 그 사람이 지금의 아내입니다. 아직도 그 날을 기억해요. 10월 19일. 처음 만난 날이었는데, 그 다음날 저는 아침부터 학교로 불러 데이트를 했죠. 손을 꼭 붙잡고 ‘이 여잔 내거니까 넘보지 마라’는 포스로 학교를 한 바퀴 돌았었어요. 그러고 나니 아무도 넘보지 못하더라고요.”

대학생 때 생각나는 이야기를 듣고 싶다하니 죄다 아내와 데이트했던 이야기뿐이다. 눈이 쌓인 밤에는 운동장 가장자리에 눈을 거두고 모닥불을 피우고 앉아 아내에게 스윙을 보여주곤 했단다. 지나가던 여학생들은 달밤에 웬 체조냐며 비웃었지만 그에게는 결코 잊을 수 없는 밤이었다. 또 새벽에는 아내의 집까지 달려가곤 했다. 창문에 돌멩이를 던지면, 마치 로미오와 줄리엣이 된 기분이 들었다고. 그러나 아내가 아닌 언니가 나와 당황했던 기억이 한두 번이 아니라한다. 그렇게 그의 대학시절은 애틋한 낭만이 있었다.

자신의 경험 때문에 이 동문은 선수들에게 ‘꼭 연애를 하라’고 당부한다. 이 동문의 아버지만 해도 야구선수는 야구만 해야 한다며 연애는커녕 팬레터도 못 읽게 하셨지만, 이 동문은 아내와의 연애가 있었기에 지금의 자신이 있을 수 있다고 말한다.

“사실 야구는 힘듭니다. 슬럼프도 올 수 있고, 마음이 끌리지 않을 때도 있고 몸이 좋지 않을 때도 있죠. 그럴 때를 대비해 빠져나올 ‘구멍’이 필요한 겁니다. 야구 때문에 힘들 때 야구에만 빠져있으면 더 깊은 수렁에 빠져버리고 맙니다. 힘들 때일수록 야구에서 한 발 물러나서 데이트도 하고 기분전환을 하다보면, 슬럼프도 금방 이겨낼 수 있죠.”

연애의 필요성을 아무리 설명을 해줘도 선수들은 아직 잘 이해를 못한다고. 특히 이 동문은 ‘되도록이면 한 사람만을 사귈 것’을 권장한다. 아내와의 이야기를 설렘 가득한 얼굴로 말하는 그를 보니 그가 대학시절 느꼈던 ‘캠퍼스 낭만’이 무엇인지 알듯하다.

화려하기만 했던 ‘이만수’
그의 선수 시절 이야기는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아도 충분하다. 야구팬이라면 그의 역사적인 기록을 다들 들어봄직 하다. 82년부터 97년까지 16년간 통산 1449번의 경기, 5034번의 타석, 625 득점, 1276개의 안타, 252개의 홈런, 861개의 타점. 한국야구 역사상 길이 남을 골든글러브 수상 5회, 최고 타격상 연속 3회, 홈런 타이틀 연속 3회, 최고타점 타이틀 3회 수상…. MBC 예능프로그램 ‘무릎팍 도사’에서도 나왔듯, 나열하기에도 힘든 이 기록들을 직접 이루는 데는 얼마나 많은 시간과 노력이 걸렸을까.

최초, 최고 소릴 들으며 달려온 그였지만, 그 역시 나이를 무시할 수 없었다. 물론 실력과 체력은 부족하지 않았지만 보통 30대 후반이 되면 ‘폐물’ 취급을 받는 한국 야구에서 그 역시 살아남기 힘들었다. 미국으로 가는 것이 어떻겠냐는 ‘방출’ 혹은 ‘명예퇴직’에 그는 고향과 같았던 삼성라이온즈 팀을 떠나 미국 마이너리그 코치를 하게 된다.

미국에서 무엇이 가장 힘들었느냐 물으니 단연 영어란다. 사실 미국으로 가기 전 영어 학원까지 다녔다한다. 30대 후반이나 되는 사람이 대학생들 사이에서 영어를 배우려니 부끄럽기 그지없었지만, 배움에는 부끄러움이 없다는 선생님의 말에 용기를 얻었다고.

“처음에 영어학원에서 자기소개를 할 때 저를 알아보는 사람들이 아우성을 치기도 했어요. 많이 부끄럽더라고요. 시기도 시기였고, 대학생들 사이에서 배운다는 것도 부끄러웠고. 그래도 나름 열심히 다녔는데 사실 미국에서 생활하는 데 도움은 안 되더라고요(웃음).”

우스갯소리처럼 말했지만 그가 미국에서 적응하는 것은 생각보다 어려웠다. 그의 웃음 많고 활달한 성격이 한국구단보다는 미국구단에 조금 더 맞는 성격이기는 했지만, 다른 나라, 다른 문화에 적응하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닐 터. 심지어 미국 생활 초기 2년간은 가족들과도 떨어져 지내 마음 기댈 곳이 없었다. 도살장 끌려가듯 야구장 가는 게 너무나 괴로웠을 정도로 심리적 압박이 컸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그는 자기성찰을 그만두지 않았다.

“미국생활은 한마디로, 힘들었죠. 힘들었지만 그만큼 배운 것도 많아요. 나 자신에 대해 생각했어요. 처음으로 ‘이만수는 두 명이다’라고 생각했어요.”

그는 오랜 자기성찰 끝에 이제껏 자신이 알고 있던 ‘이만수’와 진심 속의 ‘이만수’가 달랐다는 걸 깨달았다. 언제나 사람들로부터 대접받고 좋은 환경에서 좋은 말을 들으며 화려하게 살아온 이만수와, 지극히 평범하고 명성보다는 따뜻한 관계를 바라는 이만수. 이제까지 바라본 자신은 화려하기만한 ‘이만수’임을 깨달은 그는 자신만의 길을 찾게 된다.

미국과 한국 사이
샤워기를 틀어놓고 울던 나날이 적지 않았다. 동양인이라는 이유로 자신을 비하하는 사람도 적지 않았고, 인정해주지 않는 사람도 있었다. 미국에 온 첫 해는 고난의 연속이었지만 그는 곧, 그것을 기회로 바꿨다. 3루 작전 코치로 활약하게 된 이후 다시 힘을 얻고 야구에 임했다. 그의 활달한 모습이 미국 야구팬들의 관심을 끌었고 코치와 감독들의 호감을 얻었다. 감독, 코치들, 선수들 앞에서 시원한 홈런 실력을 선보여 능력까지 인정받았다.

그 이후 트리플A팀 샤롯트 나이츠에서 스카우트 제의가 들어왔다. 싱글A에서 트리플A까지, 무려 두 단계 상승이었다. 싱글A 코치 시절보다는 좋은 대우를 받았지만 이 역시 쉽지만은 않았다.

“게리워드라는 타격코치가 원수 같은 존재였죠. 냄새나는 동양인이라며 인격적 모독까지 당했었어요. 제가 선수 몇 명을 ‘불법과외’해준 것이 들통나 쫓겨나기 직전 상황까지 치달았죠. 하지만 저에게 배운 두 선수가 그 해 활약을 하면서 팀이 우승하게 됐고, 그 이후로 게리워드도 절 인정하고 미안하다고까지 했었죠. 지금은 친한 친구에요.”

힘든 상황에서도 그는 실력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 언제나 열정적으로 선수들을 가르치고, 관중과 함께 야구를 즐기는 모습을 본 사람들은 그를 진정한 야구인으로 믿고 따랐다. 결국 철천지원수 같았던 게리워드의 추천으로 한국인 최초로 미국 메이저리그 코치가 될 수 있었다. 메이저리그 코치가 된 이후, 선수들의 장단점을 철저히 분석하며 코치로 활약했다. 그러다가 다시 기회가 오는 듯했다. 한국구단에서 코치 제의를 해 온 것이다.

“화이트 삭스 팀에 있던 저에게 한국에서 코치제의가 들어왔어요. 고향인 한국에 돌아가고 싶었으니 수락을 했죠. 그런데 저에게 어떤 통보도 없이 갑자기 한국에 보도되더라고요. ‘이만수와 계약 파기’라고. 그 때의 낙심은 이루 설명할 수 없어요. 정말 야구를 그만둬버릴까 하는 생각까지 하게 될 정도였어요.”

자신을 믿어주던 화이트 삭스 팀을 뒤로하고 결심한 한국행이었던 만큼 낙심이 컸다. 야구를 그만두고 장사를 해볼까하는 생각까지 했다고. 미국에도 한국에도 있을 수 없었던 그에게 다시 고마운 손길이 왔다. 화이트 삭스 팀에서 재계약을 제안한 것이다.

“정말 힘들었던 이 때, 장경철 목사가 저에게 좋은 이야기를 많이 해줬었어요. 당신이 야구를 관두는 건 야구에도, 당신에게도 손해가 될 것이라고. 당신만큼 열심히 하는 사람이 있더라도 그가 당신의 위치까지 가려면 훨씬 많은 시간이 걸리게 될 것이라고. 여기서 좌절하지 말고 이제까지 해온 것처럼 진심과 열성을 다해 최고의 지도자가 되라고. 그 분의 이야기를 듣고 다시 마음을 가다듬고 있을 즈음, 화이트 삭스 팀에서 저에게 재계약을 제안했어요. 언제 생각해도 정말 고마운 기억이에요.”

광대 같은, 하지만 고집 있는
메이저리그 코치로서의 생활은 ‘인생사 새옹지마’라는 말을 절실히 느낀 시기였다. 화이트 삭스 팀에서 다시 코치로 뛰게 되면서 만족스러운 생활을 하고 있었지만, 가족들은 그렇지 않았다. 야구와 가정밖에 몰랐던 그에게는 큰 충격이기도 했다.

“어느 날, 아내가 저에게 묻더라고요. 아이들이 지금 무엇 때문에 힘들어하고 있는지 알고 있느냐고. 충격이었어요. 가족밖에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정작 가족들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했다니.”

미국에 홀로 와서 힘들어할 때 이 동문은 가족을 원했다. 가족들은 힘들어하는 그를 위해 학업도 중단하고 미국으로 와주었다. 그는 가족들을 위해 늘 기도했지만, 정작 가까운 곳에서 그들의 이야기를 듣지 못했다. 자신의 야구 인생에 맞춰 살아온 가족들에게 아픔만 준 것 같았다. 이를 깨닫고 난 후 아이들과 가까워지기 위해 노력했다. 아이들에게 좋은 아버지가 되기 위해 더욱 열심히 야구를 했고, 친해지기 위해 함께 하는 시간도 늘렸다. 아이들과 비로소 가까워졌다고 느끼기까지 3년이 걸렸다.

아이들에게 좋은 아버지가 되는 것과 선수들에게 좋은 코치가 되는 것은 비슷한 점이 많다. 미국에서는 자유로운 분위기에 맞춰 언제나 그들과 같은 시선을 맞췄다. 2006년 SK 와이번스의 수석코치로 영입되면서 미국과는 다른 분위기에 적응해야 했지만, 태도를 바꾸지는 않았다. 언제나 선수와 같은 곳에서, 그들에게 가까이 다가서기 위해 노력했다.

“제 성격 상 선수를 엄격히 다루는 게 맞질 않아요. 감독과 코치의 눈치를 보고, 주눅이 든 선수들의 모습을 보고 가만히 있을 수 없었죠. 소위 광대 같은 코치가 되려고 했습니다. 다들 카리스마가 없다고 하지만, 사실 카리스마는 무섭고 엄격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매력 있는’ 성격을 말하는 거잖아요. 그런 의미에서의 ‘카리스마’있는 코치가 되고 싶어요.”

선수와 코치의 관계에 대해 묻자, 그는 ‘야구는 선수가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한국야구에서는 간혹 감독이나 코치가 선수에게 필요이상의 지도를 하는 모습을 보이곤 한다. 지도자는 말 그대로 선수가 옳은 길로 나아갈 수 있도록 이끄는 사람일 뿐, 그들이 할 일을 대신 해선 안 되는 법이다.

이 동문은 좋은 지도자가 되고 싶다. 실력도 있으면서 바른 길을 걷는 사람, 그런 리더가 되고 싶다. 이 동문은 한국에 온 이후 리더십 강연에 몇 번 초청되기도 했다. 그가 언제나 프로의 자세로 강조하는 ‘기본에 대한 고집’과 ‘섬세함’은 그가 리더로서 이루고픈 목표이기도 하다.

더불어 팬 없이는 야구도 없다는 생각이다. 경기를 이기는 것도 무시할 수 없는 것이고 코치로서 해내야 할 일이지만, 야구에서 승부보다 중요한 것은 팬들과의 교감이라고.

“팬을 위한 경기를 해야 합니다. 경기에서 이기는 것도 팬을 위해 할 수 있는 것 중 하나가 될 수 있겠지만, 이기기 위한 경기는 팬의 마음을 끌지 못합니다. 선수 스스로도 힘겹기만한 경기겠죠. 팬과 함께 경기를 즐기려는 마음, 승부에 상관없이 최선을 다했다는 것에 만족하는 마음. 그런 마음을 가질 때 자기 자신에게도, 팬에게도 기쁨과 신뢰를 줄 수 있는 겁니다.”

그가 팬을 생각하는 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얼마 전 인천 문학구장에서 3만 관중 앞에서 ‘팬티 퍼포먼스’까지 했다. ‘오늘 관중석이 만원이 되면 하겠다’는 약속을 망설임도 없이 지켜냈다.

“팬티 퍼포먼스 이후 한 팬 분이 고맙다는 말을 전하시더라고요. 팬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부끄러움도 불사하는 제 모습을 보고 팬 생활에 보상을 받는 기분까지 들었다고요. 저는 그런 분이 있기에 야구를 합니다. 그들에게 ‘야구인 이만수’로 기억되고 싶을 뿐입니다. 아, 참고로 그 분은 롯데 팬이셨어요(웃음).”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