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아직도 해방되지 않았어”
“우리는 아직도 해방되지 않았어”
  • 안원경 기자
  • 승인 2010.03.06
  • 호수 131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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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물지 않은 역사의 상처, 나눔의 집을 가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항복을 알리는 천황의 라디오 방송이 서울 시내 곳곳에 퍼졌다. 광화문 네거리로 쏟아져 나온 시민들은 태극기를 흔들며 만세를 외쳤다. 우리나라가 일제로부터 해방된 순간이었다. 온 국민이 기뻐할 때에 타지에서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몸과 마음에 상처 입은 소녀들은 마냥 눈물만 흘려야 했다.

일본군의 성노예로 살아가야만 했던 이들의 지난날 상처가 고스란히 나타나는 곳, 일본군 위안부 나눔의 집을 방문했다. 경기도 광주시 퇴촌면에 위치한 이곳은 일본군 위안부의 실상을 보여주는 일본군 위안부 역사관(이하 역사관)과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 8명이 공동체를 이루며 살아가는 보금자리가 있는 곳이다.

나눔의 집에 들어서자 한 일본인이 어설픈 한국말로 기자를 맞이한다. 국가가 저질렀던 만행을 사죄하기 위해 이곳에서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고 한다. 할머니를 만나기 전에 역사관을 먼저 둘러보라는 일본인의 안내에 따라 역사관에 들어섰다.

관람객이 아무도 없어 스산함이 느껴지는 역사관엔 과거 위안부 할머니가 생활했던 위안소가 그대로 재현돼 있었다. 군인클럽, 군인오락소라고 불렸던 위안소에는 2평도 되지 않는 방 다닥다닥 붙어있다.

그 방 안엔 덩그러니 놓인 침대 하나와 녹슨 세숫대야, 그리고 ‘몸도 마음도 바치는 일본 아가씨의 서비스’라고 적힌 푯말을 보니 이 작은 방에서 아침 7시부터 잠들 때까지 쉬지 않고 일본군을 받아내야 했던 어린 소녀들의 고통과 아픔이 그대로 느껴져 가슴을 파고든다.

돌아가신 위안부 할머니들을 추모하기 위해 마련된 2층 공간으로 올라가는 계단 벽에는 위안부 할머니들의 그림이 이어진다. 검은 치마에 하얀 저고리를 입은 그림 속 소녀들은 두려운 눈빛으로 일본 순사복을 입은 남자들에게 강제로 끌려가고, 군인들이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채 얼굴을 가린 소녀를 범하려는 그림이 걸려있다. 할머니들이 차마 입 밖으로 꺼낼 수 없었던 과거를 그림으로나마 표현한 것이다.

역사관을 다 돌아보고 나서 직원의 안내에 따라 한 할머니의 방으로 들어갔다. 많은 위안부 할머니께선 힘들었던 과거의 이야기를 하는 것을 꺼리지만 일본과 미국까지 다니시며 증언을 해주신다는 이옥선 할머니<경기도ㆍ광주시 84>가 반겼다.

이 할머니는 “무슨 재미도 없는 얘기를 들으려고 여지까지 왔는가”라며 지난 날 이야기를 꺼낸다. 16살 심부름 가는 길에 괴한에 의해 강제로 알 수 없는 곳으로 끌려간 일, 전기 철망이 처진 곳에서 잠들기 전까지 해야 했던 강제 노동, 매일 30~40명되는 일본병사들을 받아내다 지쳐 도망치다 칼에 찔려 신음해야 했던 아픔, 위안부라는 딱지가 계속 붙어 다녀 해방 후에도 평범한 가정을 꾸리지 못했던 일까지 모두 쏟아낸다. 빼앗긴 나라에 산 죄로 평생을 순탄치 못한 삶을 살아온 할머니의 목소리엔 울분이 묻어났다.     

“해방된 후에도 한국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중국을 전전하다 머리가 하얗게 변해 다시 조국으로 돌아왔는데 내가 없는 사람이 돼있더라. 무국적자였던 말이지. 몇 년을 거쳐 소송을 통해 다시 국적을 힘들게 회복했지. 근데 어느 날은 ‘과거사는 덮고 가자’는 일본 놈의 말에 국가 원수라는 게 흔쾌히 그러자는 걸 보고나니 너무 화가 나는 거야. 다시 소송을 걸어 국적을 포기했지. 우리 얘기 한마디만 해줬으면 됐는데, 우리는 국민도 아닌거여.”

이 할머니는 위안부 할머니의 아픔을 이해하지 못하고 일본 정부에게 저자세를 취하는 우리정부에 대한 섭섭함을 토로했다. 이 할머니는 떠나려는 기자의 손을 붙잡으며 마지막 말을 남겼다. 

“학생들이 억울한 우리의 삶과 불행했던 역사를 잊지 않고 기억해줬으면 좋겠어. 이제 여기 남은 할머니들도 8명밖에 없어. 우리가 다 죽고 나면 누가 싸워줄껴. 지금 일본 놈들은 다 죽으면 조용해지겠지 하고 우리 죽기만을 기다리고 있어. 헌디 우리는 죽어도 편안히 갈 수 없어. 그 놈들이 우리 명예를 회복해주고 사과할 때까지 죽을 수가 없어. 해방된 지 60년이 넘었지만 우리는 아직도 투쟁중이여. 해방됐어도 해방된 것이 아니란 말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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