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들려주는 인생의 하모니
그가 들려주는 인생의 하모니
  • 김상혁 기자
  • 승인 2010.02.26
  • 호수 131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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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을 진정으로 즐기는 성악가, 김호중<음대ㆍ성악과 10> 군

로마는 하루아침에 이뤄지지 않았지만 김호중 군은 하루아침에 일약 스타가 됐다. 발단은 SBS 예능프로그램 ‘스타킹’이었다. 스타킹에서 연속으로 2차례 우승을 차지한 김 군은 ‘고딩 파바로티’란 별명과 함께 전국적인 유명세를 얻었다. 그런데 이 친구, 그동안 살아온 나날들이 범상치 않다. 그의 굴곡진 인생 이야기는 입담 좋은 노인의 과거 이야기를 듣는 것처럼 흥미진진했다. 그의 이야기는 음악에서 시작해서 음악으로 끝났다.




음악, 그리고 좌절

“방황 시절 이야기를 세세하게 털어놓으면 3박 4일은 새워야할 것 같고…” 인터뷰를 시작할 때만 해도 천진난만하게 웃으며 경상도 사투리를 섞어 말하던 김 군의 표정은 과거 이야기를 꺼내자 약간 어두워졌다. 김 군이 겪었던 방황이 일반인이 생각하는 방황과는 차원이 다르기 때문이리라. 고등학교 시절 소위 ‘조직 활동’까지 했던 그였다.


이미 언론에 여러 차례 보도된 대로 그는 고교생 조폭이었다. 가게 관리도 하고 동생들 관리도 했다. 지금 알려진 ‘촉망받는 성악가’와는 정반대의 모습이다. 도대체 왜 조직에 들어갔을까.

“성악이 하고 싶었죠. 그런데 돈이 없었어요.” 그가 처음 ‘성악’이란 장르에 눈을 뜬건 중학교 2학년 말이었다. 평소 음악 CD를 즐겨샀던 그는 김범수 CD를 사러 음반 가게에 들어갔다. 그런데 김범수 옆에 웬 침팬지 닮은 노인이 앨범 자켓에 떡 하니 나와 있었단다.

“수염 무성한 이질적 외모에 눈이 확 갔죠. 그러다  왜 이런 사람이 한국 음반 가게에 진열돼있나, 호기심에 한번 샘플 CD를 들어봤어요.” 처음엔 웬 오케스트라 소리에 꺼버릴까 생각했는데 곧 노인의 노래가 흘러나왔다. 15살 소년의 몸엔 전율이 흘렀다. “흡연자들은 공감하실텐데, 숨을 참다가 팍 풀어주면 빈혈처럼 띵한 느낌이 있어요. 그 느낌이었죠. 정말 신선한 충격이었어요.” 소년, 처음으로 성악에 눈을 뜬 순간이다.

김 군이 침팬지를 닮았다고 생각했던 그 노인은 20세기 성악의 대명사인 파바로티였다. 그 때 들었던 노래는 푸치니 오페라 「투란도트」에 나오는 ‘공주는 잠 못 이루고’의 한 소절이었다. 성악이란 장르에 푹 빠진 김 군은 교회 성가대를 담당하던 집사님에게 파바로티에 대해 물었다. 반응은 시큰둥했다.

“그 당시에 저는 교회에 출석만 하는 학생이었거든요. 불량학생 이미지여서 평이 그다지 좋지 않았죠.” 어쨌거나 김 군은 집사님을 졸라 영남대 김기덕 교수로부터 성악의 기초를 배울 수 있었다. 배워도 배워도 목마른 느낌 때문이었을까. 당시 중학교 3학년이던 김 군은 성악에 대해 더 배우고 싶다는 마음에 무작정 서울로 올라왔다.

“아르바이트를 해서 모은 돈 15만원을 들고 유명 성악 학원에 찾아갔죠. 레슨비가 1시간에 50만원? 그정도 했는데 차비 빼고 남은 돈 10만원으로 청강이라도 할 수 없겠냐고 물었죠.”

대답은 냉정했다. 학원 측은 바쁘다는 핑계로 소년의 꿈을 짓밟았다. 그리고 그날, 다시 김천으로 내려가는 기차 안에서 김 군은 하염없이 울었다. 탈선의 본격적인 시작이었다. “억울했죠. 비참하고. 아 이런거였나. 음악이 이런거였나. 돈 없으면 못하는 것이 음악이었나. 내가 돈이 없어서 무너지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죠.” 그때의 자괴감은 돌아온 후에도 김 군을 괴롭혔고, 그 후 고등학교 2학년 때까지 그의 방황은 계속됐다.

캡틴, 오 마이 캡틴
불량학생이었던 그는 결국 다니던 경북예고에서 전학을 가지 않으면 퇴학 처리를 당할 위기에 놓였다. 그 때 김 군의 인생에서 결정적 역할을 하게 되는 한 사람, 김천예고 서수용 교사를 만났다.

“당시 퇴학 직전까지 갔었어요. 그땐 뭐 오히려 잘됐다 싶었죠. 제 가게를 내서 돈을 벌고 싶었거든요.” 그 때 서 교사가 운명처럼 그의 앞에 나타났다. 서 교사는 계속해서 그에게 노래라도 한번 불러보라고 부탁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인생의 기로에 섰던 순간이었던 것 같아요. 그 때 들었던 생각이 ‘그래, 니 음악 때문에 여그까지 안왔나 니가. 마지막인 셈 치고 노래 한곡 하고 그만 두자. 이게 마지막 노래다’라고 생각하고 서 선생님 앞에서 노래를 불렀죠.” 그 때 김 군이 불렀던 노래가 푸치니 오페라 「토스카」에 나오는 ‘별은 빛나건만’이었다.

김 군의 노래를 들은 서 교사는 3시간이 넘는 설득 끝에 그를 성악의 길로 돌려놓았다. “처음에는 ‘이 사람이 뭔데 나한테 이런 말을 해주노. 나 놀리는 거 아이가’라는 의문까지 들 정도로 끈질기게 설득해주셨어요.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선생님의 진심이 느껴졌고, 아, 이게 사람이구나, 싶었죠.”

그 후 그는 국내 청소년 성악대회를 석권하며 180도 달라진 모습을 보여줬다. 김 군은 서울 세종음악콩쿨에 출전했던 당시를 회상했다. “낯설더라고요. 서울 억양도 적응하기 힘들었고요. 좋은 환경에서, 엄마한테 응석부리면서 대회에 출전한 아이들에게 뭔가 보여주고 싶었어요.”

보호자도, 별다른 지원도 없었던 김 군은 같이 출전했던 친구와 의지를 다졌다. “우리가 여기 어떻게 왔노. 무궁화호 타면서, 모텔에서 자면서, 컵라면 끓여먹으면서 안왔나. 진짜 똥줄 빠지게 노래하자. 노래해서 보여주자.” 결과는 김 군과 친구의 1, 2등. 세종음악콩쿨 역사상 처음으로 지방 학생이 차지한 1, 2등이었다.

고지를 밟아나가는 패기
김 군은 천재다. 중 3때 처음으로 성악을 시작해 4년여만에 국가에서 알아주는 유명인이 됐다. 올해 초에는 ‘2009 대한민국 인재상’까지 수상했다.

이에 대해 그는 “음악을 진정으로 즐길 수 있었기에 나타났던 결과”라고 말한다. “내 목소리는 내가 소유해야 합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목소리가 나를 소유하면 안된단다. 느긋한 마음으로 기다리면 목소리는 나를 따라오게 돼 있다고 한다. 아리송한 말이지만 김 군이 말하니 그런가보다 생각하게 된다. 음악을 대하는 그의 자신감은 이미 세계 최고다.

“노래를 하면, 그 때는 내가 이 세상의 주인공이 된 것 같습니다. 나를 모르는데 내 노래를 듣고 보내주는 관객들의 환호성과 박수, 그리고 노래할 때 관객들이 나에게 집중하는 모습을 보는 것 자체가 행복입니다.”

이미 그는 자신이 가야할 저 높은 곳까지 바라보고 있다. 훗날 고지의 정상에 선 그는 어떤 사람이 돼있을까. 김 군에게는 먼 미래에 대한 질문을 해도 어색하지 않았다. 김 군 자신도 대답하는데 머뭇거림이 없다. “돈이 없어 음악 못하는 아이들에게 제 모든 능력을 가르치겠습니다. 그 친구들이 저를 친구로서 느끼도록 하는 것이 제 목표입니다. 레슨비로 아이들에게 사탕 하나를 받는 김호중 선생님이 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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