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알지만 대학만 모르는 진리
세상은 알지만 대학만 모르는 진리
  • 김규범 편집국장
  • 승인 2010.02.26
  • 호수 131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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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에도 어김없이 새내기들이 첫 걸음을 내딛습니다. 취업난 때문에 두렵기도 하지만 설렘에 부풀어 오른 새내기의 가슴은 세상이 변해도 여전합니다. 어떤 사람들과 만날지 무엇을 배울지 고민되기도 합니다. 대학 역시 무엇을 어떻게 가르쳐야할지 고민입니다. 그 고민의 답은 아마 새내기의 수만큼이나 다양할 겁니다.

한 가지 제안하자면 다양성을 배우는 건 어떤가요? 우리나라 교육 특성상 다양성보단 획일성을 먼저 익히기 쉽습니다. 어찌 보면 ‘다른’걸 ‘틀리다’고 자주 말하는 우리의 언어습관이 단순한 실수가 아닐지도 모릅니다. 입시 기간 동안 획일성에 익숙해진 새내기로서는 다양한 사람들이 모이는 대학에 적응하기 쉽지 않습니다. 새내기가 대학에서 겪는 낯섦의 원인은 이게 아닌가 싶습니다. 나와 다른 사람들이 모인 곳에 혼자 떨어졌다고 생각하면 대학은 외롭고 낯선 곳이 되기 마련입니다.

이 외로움을 타개할 방법이 다양성을 익히는 겁니다. 사실 다른 존재에 대한 적대심을 품는 건 인간의 본성 중 하나라고 합니다. 본성을 이겨내는 일이니 쉬울 리 없지만 방법은 있습니다. 나와 다른 사람에 대해 인정을 하는 게 그 시작이지요. 물론 그가 옳아서 인정하는 게 아니며 내가 틀려서도 아닙니다. 아무리 이상한 주장을 하더라도 그 역시 사람이고 인격체라는 사실은 분명하기에 인정하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생깁니다. 어떤 주장까지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하는지 딜레마에 빠집니다. 모든 주장이나 사상을 옳다고 할 수는 없으니까요. 아무리 다양성을 인정하는 사회라도 식민지 전쟁을 일으킨 사람들까지 옳다고 하진 않습니다. 다양성을 인정하는 사상인 똘레랑스를 주창하고 있는 프랑스도 나치 부역자들은 모조리 처벌했을 정도니까요. 이를 보면 세상에는 넘지 말아야할 ‘선’이 존재하는 듯합니다.

혹시 ‘사람’을 그 선으로 정하는 건 어떨까요? 사람에 해가 되는 주장들은 다양성의 범위를 벗어났다고 보는 겁니다. 잔인할 정도로 나치 부역자 처벌에 몰두한 프랑스도 사람을 기준으로 판단한 거라고 생각합니다. 나치즘이라는 획일주의를 무기로 자국민을 탄압한 자들은 똘레랑스의 가치를 훼손했다고 본겁니다. 굳이 똘레랑스라는 이름이 아니더라도 사람이라는 기준을 벗어난 그들을 벌한 거라고 할 수 있지요. 이 세상에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가치가 있다면 그건 바로 사람이 아닐까 싶습니다. 종교의 교리는 다양하지만 사람을 위한다는 건 어느 종교나 공통적인걸 보면 그 말이 맞는 듯합니다.

어찌 보면 당연한 얘기입니다. 세상 모든 사상은 결국 사람을 위해야 한다는 진리. 이미 수많은 현자들이 말해왔으며 그보다 더 많은 이들이 목숨 걸고 지켜온 가치입니다. 이만하면 새내기가 대학에서 배울만하지 않나요? 물론 새내기는 이미 그 가치를 인지하고 있습니다. 다만 몸에 익히고 행동하는데 시간이 걸릴 뿐이죠. 그런데 대학은 어떻습니까. 요즘 대학이 과연 이 모든 걸 가르칠만한 곳인지 의문입니다. 대학은 아직 다양성을 받아들일 준비가 부족해 보이기 때문이죠. 학교에 비판적이라는 이유로 언론을 막아버린 중앙대뿐만 아닙니다. 등록금에 허덕이는 학생들을 애써 외면하며 등록금 인상에 힘쓰는 대학들을 보면 세상 모든 이들이 아는 진리를 대학만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는 듯합니다.

어떤 주장이든지 사람이 기준이라는 세상의 보편적 진리. 이젠 대학에서도 볼 수는 없는지 조심스럽게 그리고 간곡히 청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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