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한 그들의 평범하지 않은 삶
평범한 그들의 평범하지 않은 삶
  • 문종효 기자
  • 승인 2010.02.19
  • 호수 131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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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변의 조선후기 민초의 삶을 들여다보다


촌가의 젊은 여인 울음소리 애달프다
관가문을 향하여 내달으며 하늘을 우러러 원망을 울부짖는다
출정한 사내 돌아오지 않은 일은 오히려 있으련만
옛날부터 양을 자른 사나이 있단 말은 듣지 못했노라
시아버지 3년상은 끝난 지 오래
갓난아이는 물도 아니 가셨는데
3대의 이름이 군적에 실리나니
억울한 사정 호소할래도 범같은 문지기 가로막더라
이정 놈의 호통바람에 외양간 소마저 끌려나갔다
주인은 문득 칼을 갈아 방안으로 들어가
피로써 자리를 흠뻑 적시었다
아이 낳은 것을 스스로 분히 여겨 이 환난을 당했구나
<중략>
                                                                                    정약용 「애절양」

장정들이 수확한 벼에서 쌀을 걸러내고 있다. 나머지 사람들은 됫박을 이용해 수확한 쌀을 포대에 담고 있다. 수확의 계절을 맞아 그들이 쏟아온 노력들이 결실을 맺었으니 흥겨울 만도 하건만 그림 속 장정들의 얼굴에는 웃음기가 없다. 아니, 기뻐하기는 커녕 체념하고 있다는 표현이 더 옳은 것 같다. 이런 모순된 상황은 그림을 유심히 보면 곧 이해할 수 있다. 그들의 앞에 양반으로 보이는 남자가 담뱃대를 물며 그들의 행위를 감독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 지금 이들은 세금으로 내야 할 곡식을 거두고 있는 것이다.

납부해야 할 세금의 양이 합리적이기만 했어도 이들의 표정이 이렇게까지 비참해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조선 후기 세도정치 시기 극에 달했던 삼정(전정ㆍ군정ㆍ환곡)의 문란은 당시 농민층의 절대다수였던 소작농들의 생존기반마저 위협했다. 왜곡된 사회구조로 인해 최고 80%에 달하는 수확물을 세금으로 내야했기 때문이다. 이런 고율의 소작료에 대응하기 위해 소작농들도 그들 나름대로 꾀를 냈다. 밤에 큰 단을 작은 단으로 고쳐 묶어 나머지를 가져가거나 대충 탈곡했다가 뒷날에 다시 탈곡해 자기 소유로 하기도 했다. 그러나 지주들의 대응도 만만치 않았다. 그림 속에 있는 엄청난 크기의 됫박을 보라. 언뜻 보기에도 장정이 두 손을 이용해 들어야 할 만큼 거대하기 짝이 없다. 양반지주들은 소작료를 조금이라도 더 받아내기 위해 됫박을 법제상으로 규정된 것보다 더 크게 만들어 사용하거나 심할 경우에는 소작료 자체를 인상시켰다.

그림과 같은 상황은 당시 전국적으로 일어났던 현상들이었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그 당시 정치적 상황을 이해해야 한다. 급서한 정조의 뒤를 이어 즉위한 순조는 나이가 어려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하게 된다. 수렴청정이 종료된 뒤 그의 친정이 개시됐으나 정국의 실권은 순조의 장인인 안동 김씨 김조순에게로 집중되는 유례없는 현상이 나타났다. 이후 그는 기존의 집권세력을 축출하고 자신의 가문 사람들을 고위관리로 기용했다. 또 선왕 정조가 왕권 강화를 위해 만들었던 장용영을 재건해 자신의 세력기반으로 복속시켰고 국정 기관인 비변사를 장악해 정국을 주도했다. 이로써 한 나라의 정치가 소수의 유력가문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비정상적 정치형태인 세도정치의 막이 올랐다.

왕의 정치참여를 철저히 배제시킨 세도정치는 정치적 견제장치가 전혀 없어 매관매직이 성행했다. 이를 통해 관리가 된 수령들은 백성들을 착취함으로서 관직을 사는데 들어간 비용을 벌충했다. 이들의 부정에 편승한 아전들의 농간질 또한 극에 달했다. 아전 10여명이면 충분한 지방관아에 수십, 수백명에 이르는 아전이 있는 것은 물론 이들은 업무에 종사하기보다 경쟁적으로 지방민들을 쥐어짜는데 주력했다. 백성들이 억울한 일을 호소하러 관아를 찾으면 “이미 해가 저물었으니 다음에 오라”는 등 갖은 핑계를 대면서 뇌물을 받아야 들여보내주거나 추수기에 일반 가정을 돌아다니며 뇌물을 강요하기도 했다.

군정의 폐단도 심각했다. 군포는 군현단위로 납부하기 때문에 장정 한 명이 납부해야 할 군포 납부량이 일정하지 않았다. 마을의 장정 수가 늘어나면 문제가 되지 않지만 백성들의 유망과 양반으로의 계층상승 현상이 삼해지면서 장정 수가 해마다 줄어들어 남아있는 사람의 군포량은 더 늘어나는 폐단이 생겨났다.  

삼정의 문란 중에서 백성들을 특히 괴롭혔던 것이 환곡이었다. 본래 춘궁기나 흉년에 곡식을 빌려쓰고 수확기에 갚는 제도였지만 수령과 아전들에 의해 극도로 왜곡돼 이자로 원금의 배 이상을 갚아야 했다. 

경강상인, 송상, 만상 등 도고(독점적 도매상인)들의 매점매석도 민초들의 삶을 피폐하게 만든 또다른 요인이었다. 대규모 선단을 소유한 경강상인은 경강(지금의 한강)은 물론 삼남지방의 상권까지 모두 장악해 미곡과 소금 등의 물가를 좌지우지했다. 이들의 독점적 상행위를 잘 보여주는 것이 1833년(순조 33년)에 일어난 ‘미곡 폭동사태’다. 당시 한성의 일부 주민들 및 임노동자들이 시전에 있는 쌀가게와 잡곡가게를 습격하고 곡식과 가옥을 불태우는 사건이 발생한다. 한성의 치안 병력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어 중앙 포도청의 병력들까지 동원된 이 폭동은 한강변에서 쌀 유통을 장악하고 있는 경강상인 김재순 일파에 의해 발생한 것으로 밝혀졌다. 풍년을 맞아 쌀값이 떨어질 것을 우려한 이들이 한성의 미곡 공급량을 조절해 쌀값을 수십배로 올린 것이다.

조선 최대의 독점상인이었던 개성의 송상 역시 대외무역에 깊숙히 관여하면서 거상이 됐다. 이들은 전국에 지점인 송방을 차리고 각 지방의 특산물을 장악했다. 특히 개성의 인삼재배가 성장하자 홍삼 제조업에도 진출해 막대한 돈을 벌어들였다. 임상옥의 상단인 개성 만상 역시 인삼 무역을 통해 거부로 성장했다. 의주 백마산성 삼봉산에 있는 임상옥의 집은 궁궐보다 더 화려해, 암행어사가 들이닥쳐 호통친 일이 있을 정도라니 그 재산의 규모를 짐작해볼 수 있다. 이밖에 부산의 내상, 평양의 유상 등도 이런 방식을 통해 거대한 부를 이뤄나갔다.

이들로 대표되는 독점적 도매상인들은 대량 구매를 통해 전국의 상권을 장악하고 각종 물품을 독점했다. 이들은 물가를 자신들의 입맛대로 조절했으며 독점적 지위를 통해 매점매석도 서슴치 않았다. 억울함을 느낀 백성들이 관아에 가서 고발을 하려 해도 통하지 않았다. 이들은 정치세력과 깊이 연관돼 그들의 자금줄 역할을 맡고 있었기 때문이다. 경강상인은 안동 김씨를, 만상은 반남 박씨를 경제적으로 뒷받침했고 세도가문은 그 대가로 이들의 경제적 독점행위를 눈감아 주었다.

이처럼 자신들의 억울함을 호소할 수 있는 최소한의 수단마저 억압당한 백성들은 결국 민란을 통해 사회모순을 해결하려 했다. 세도정권이 성립되고 10여년 후인 1811년에 일어난 홍경래의 난은 안동 김씨 세도정권을 궁지에 몰아넣었다. 하지만 홍경래의 난은 지도부의 전쟁목적이 농민층의 그것과 일치하지 않았고 농민층 내의 지도세력이 자생하지 못해 이내 진압됐다. 홍경래의 난은 비록 실패로 끝났으나 지금까지의 민란과는 달리 체계적이고 치밀하게 준비돼왔고 반란군의 구성이 상인층과 이들이 용병으로 고용한 광산 노동자 등 다양한 계층으로 이뤄져 있었다는 점에서 심각한 사회적 동요를 가져왔다.

농민들은 1862년에 일어난 임술 농민봉기를 통해 과도한 세금과 각종 잡세 폐지를 요구했고 조세체계 전반에 만연한 부정부패를 척결할 것을 요구했다. 관아를 습격하고 부유층을 약탈하는 등의 시위가 계속되자 정부는 민심수습책으로 안핵사 박규수를 파견해 농민 반란군과 협상을 시도하거나 삼정의 문란을 시정하기 위해 개혁기구 삼정이청청을 설치하는 등 미봉책만을 내놓는데 급급했다. 이후 삼정이청청마저도 백지화되자 민란은 더욱 거세게 일어났다. 하지만 임술민란 역시 전국적으로 일어나는 산발적인 민란을 조직화할만한 세력이 형성되지 못해 실패로 끝났다. 그러나 임술민란은 안동 김씨 세도정권에 큰 타격을 입혔고 이후 흥선대원군이 정국을 장악하게 되는 하나의 요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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