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9회 한대신문 문예상 비평 부분 우수상 - 소설 수족관의 기호학적 해석
제39회 한대신문 문예상 비평 부분 우수상 - 소설 수족관의 기호학적 해석
  • 한양대학보
  • 승인 2009.12.07
  • 호수 1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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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수족관」의 기호학적 해석

김봉주<인문대 철학과 04>

목차

Ⅰ. 서론: 텍스트의 주체적 읽기                              

Ⅱ. 「수족관」의 서사 구조 해체
1. 텍스트 해석과 추론                                                      
2. 시간과 시퀀스                                                            
3. 플롯과 인과율                                                           
4. 「수족관」의 서사적 특색                                                  

Ⅲ. 텍스트 분석을 위한 언어학적 고찰                           
1. 명사(名詞)의 한정성
2. 언어의 지시성
3. 동일성과 유사성

Ⅵ. 상징기호와 해석
1. 살인
2. 구엔 또는 빈
3. 수족관

Ⅴ. 결론: 비평적 연구를 통한 전위문학의 가치 조명 


Ⅰ. 서론: 텍스트의 주체적 읽기  
 
 어떤 문학작품이 문학사에서 유의미한 가치를 획득하기 위한 과정에 그 의미를 판단하는 행위인 비평은 해당 텍스트가 얼마나 가치 있는지를 질문함으로써 자기 지위를 부여받게 된다. 이를 위하여 비평은 비평자의 심미안을 통하여 작품의 내용과 형식을 해석한다. 해석은 비평적 판단을 위한 과정일 뿐이다. 그 과정에 비평은 독자의 정독(精讀)을 요구한다. 정독은 단지 작품의 뜻을 하나하나씩 꼼꼼하고 충실하게 파악하며 읽는 정독(正讀)과는 다르다. 주체적 독자는 읽기의 과정에서 텍스트를 자신의 방법론에 따라 해체하고 창조적 관점으로 재구성한다. 바로 이러한 이유로 해석에 비평적 정독의 필요성을 강조하게 되는 것이다. 
 작가는 텍스트에 최초로 의미를 부여한다. 그리고 독자는 작가가 넘겨 준 텍스트의 완성에 최종적으로 기여한다. 텍스트는 작가와 독자를 매개하는 가교가 되는데, 이 관계에선 다양한 의미의 생성을 위한 쌍방향적 간섭과 피드백이 일어난다. 읽는 행위는 단순하게 작가의 의도나 스타일, 시대의 분위기를 수동적으로 추리하고 수렴하는 일에 그치지 않는다. 즉, 독서는 능동적 독자의 세독을 통한 예술적 재구성 과정을 거쳐서 어떤 의미를 지닌 지점에 이르게 된다. 이를 위하여 독자는 먼저 텍스트를 매체로 삼아 작가와의 의식적 교통이라고 할 수 있는 생산적 대화를 수행해야 한다. 생산적 대화는 텍스트의 구조를 독자의 방식대로 해체하고 이를 재구성하는 능동적 개입의 과정을 통해 의미를 산출한다. 텍스트를 통하여 작가와 독자는 작품과 닮았으면서도 차별화된 또 다른 문학적 세계를 열어나가는 것이다.
 정독은 사유를 특징으로 하는 인간 실존의 발현을 위해 상징양식으로서의 문학이 어떻게 작동될 수 있을지를 해석해보는 경로에서 필연적으로 요청된다. 책을 눈으로만 읽지 않고 마음으로 읽는 읽기 위해선 우선 텍스트의 선택에서 발생할 수 있는 취향의 문제로부터, 반복적으로 읽는 과정에서 사유의 수정이 일어날 때마다 그 까닭을 면밀하게 검토해야 하며, 선호에 근거한 독서자의 사유가 어떻게 작가의 의도 혹은 텍스트에 담긴 의식과 상충하고 합치되며 변증법적 통합을 달성하는지를 추적해야 한다. 정독은 텍스트의 결을 수용자의 지향 안으로 섭렵하고 재구성해내는 작업이며, 이를 위해 어떤 이론도구의 섣부른 활용이 아니라 섬세하게 분석적으로 뜯어읽는 자세가 요구된다.
 독자의 읽는 행위와 작가의 쓰는 행위는 서로 다른 시간 속에서 일어나지만 궁극적으로는 동일성을 지향한다. 작가와 텍스트와 독자는 독존하는 별개의 고립된 개별자가 아니라 상호간에 긴밀성을 지닌 유기체라는 점에서 삼위일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단, 텍스트를 고리로 삼는 읽기와 쓰기의 동일성은 차이를 소멸시키는 게 아니라 오히려 다채로운 해석을 양산한다. 능동적 독자는 다양한 해석 사이의 틈을 보고, 그 틈을 벌리거나 꿰어 맞추면서 새로운 해석을 추가한다. 그러므로 주체적 텍스트 읽기는 제2의 창작이나 다름없다. 다음 장부턴 소설 텍스트를 통해 비평적 정독과 해석이 결합되는 예가 어떻게 구현되는지 본격적으로 고찰해보기로 하겠다.


Ⅱ. 「수족관」의 서사 구조 해체
 
 소설집 「너는 달의 기억」에 수록된 소설 「수족관」은 서준환의 대표작에 해당될 뿐만 아니라, 작가적 특징을 고스란히 표출하고 있는 작품이다. 서준환의 텍스트는 특유의 난해성 때문에 비평의 정밀성 제고가 절실하게 요청되고 있는데, 실제로는 활발한 비평이 널리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수족관」은 서준환의 정체를 미시적으로 들여다볼 수 있게 하는 소설이다. 작가가 구사하는 문체는 그의 소설을 이해하기 어려운 상징의 늪으로 몰아가는 요인이 작용하는데, 그것은 작가의 스타일을 정초하는 서사적 화법이면서 플롯을 짜내는 방법이기도 하다. 여기서 우리는 비평적 정독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게 된다. 정독은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게 아니라 창조적으로 발산해야 하는 독법이다. 플롯에 대한 작가의 상상력과 동등한 반열에서 독자의 상상력이 창발되어야 한다고 요구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작가와는 다른 각도와 접근법으로 텍스트를 재구성하지 못할 이유도 없다. 이쯤에서「수족관」의 미스테리 구조를 단순화시켜서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서사 구조를 작가가 서술하는 순서에 따라 조감하기 위해서 소설 텍스트에 나온 그대로 분절해서 나열해보면 다음과 같이 읽을 수 있다.

① TV와 오디오를 처분하고 썰렁한 방 안에서 혼자 라디오를 듣다가 어디선가 계집아이들이 뛰어놀며 재잘거리는 소리가 들려오자 라디오를 끈다.
② 나는 택시를 탔다가 한 여자와 합승을 한다. 그 여자가 내리자마자 나도 그녀를 따라서 내린다.  
③ 내 방에 들어온 수족관 속을 멍하니 관찰한다. 라디오에서 29살 한모씨가 택시에 합승한 여승객을 미행한 끝에 교살하여 인근 야산에 암매장한 사건이 한 주 전쯤에 일어난 데 이어 그제는 두 청년이 놀이터에서 한 여자아이를 살해하여 암매장한 사건이 발생했다는 좌담이 방송된다. 나는 외출을 하러 나가던 도중에 내가 살던 주택의 계단에서 어떤 남자와 인사를 나눈다.  
④ 창 밖으로 놀이터에서 고무줄놀이를 하는 여자아이들 중에서 노란 원피스를 입은 어떤 아이를 내려다본다.
⑤ 밤거리에서 돌아오다가 집 앞에서 지난번에 인사해왔던 사내와 다시 마주친다. 그는 며칠 전 나와 비슷해 보이는 사람이 근방의 야산에서 서성거리고 있다 오는 길이 아니냐고 묻는다. 자기의 이름을 ‘구엔 또는 빈’이라고 소개한 그는 악수를 청하며 시간 나면 맥주라도 한잔 하자고 한다. 라디오에서 이모양의 시신이 스타킹에 목이 졸린 채 하반신이 벗겨진 모습으로 현장에서 발견되었다는 방송이 나온다.
⑥ 놀이터에서 고무줄놀이를 하는 그녀를 바라본다.
⑦ 구엔 또는 빈과 외출한다. 그와 함께 수족관 전문점에 갔다가 베트남 음식점에서 저녁을 먹는다. 자기가 베트남계라고 말한 빈은 성인 여자들이 무조건 싫다고 지껄인다. 
⑧ 집에 놀러 온 구엔 또는 빈과 함께 창가로 가서 노란 원피스를 입은 그녀를 본다.   
⑨ 나, 빈, 그녀(이유로)는 놀이터 벤치에서 나란히 앉아 대화를 나눈다. 빈은 유로에게 친해지자며 내일 셋이서 소풍을 가자고 제의한다. 유로는 제의에 응한다.
⑩ 회양목으로 둘러쳐진 놀이터에 경찰차와 구급차가 도착해 있다. 하얀 가운을 입은 남자들이 버즘나무 앞 흙구덩이를 파헤치다가 벌거벗겨진 여자아이의 시신 한 구를 건져올린다. 상복 입은 여자는 혼절하고 사람들은 곡성을 낸다. 
⑪ 나와 빈 그리고 유로는 소풍을 떠난다. 낯익은 버즘나무 앞에서 차를 세운다. 차가 달리는 동안, 성숙한 여인으로 변한 유로는 내리자마자 나와 빈을 관능적으로 유혹한다. 빈이 유로를 겁탈하려고 할 때, 나는 빈을 가격해서 기절시킨 후에 그녀를 스타킹으로 질식사시킨다. 깨어난 빈은 놀라서 사라진다. 단서를 없애기 위해 빨간 구슬이 달려 있는 유로의 머리끈을 챙기고 유로의 시신을 트렁크에 실은 채 귀가한다. 
⑫ 건물 입구로 들어서려는 순간 언젠가 복도에서 마주친 적이 있는 사내가 또 인사해왔다. 그는 얼마 전 나와 비슷해 보이는 사람이 이슥한 시각에 그 야산에서 서성거리고 있는 걸 봤다고 이야기한다.   
택시 합승을 하게 된 가연이라는 여자아이가 내게 자기와 어딜 같이 가자고 한다. 한참을 걸은 후에 가연이가 나를 끌고 간 곳은 회양목으로 둘러쳐진 놀이터였다. 경찰차와 구급차가 도착해 있다. 버즘나무를 에워싼 사람들이 곡성을 낸다. 내가 살고 있는 다세대 주택에서 얼마 전 우연히 마주친 적이 있는 이웃청년이 경찰들에게 체포된 모습으로 끌려나온다. 형사가 내게 다가와서 빨간 구슬이 달린 머리끈이 이웃청년의 수족관에서 발견된 물증이라고 말하고, 범인과 내가 이 놀이터에서 자주 어울리는 걸 봤다는 제보가 있었다며 동행을 요구한다. 
⑭ 내 방으로 돌아와 TV를 켜니 한 베트남계 청년이 이유로라는 여자아이를 유괴, 납치한 후 목 졸라 살해하여 인근의 야산에 암매장하였음을 시인했다는 뉴스가 나온다.
⑮ 놀이터에서 고무줄놀이를 하고 있는 한 여자아이에게 말을 붙인다. 그 아이는 나를 처음 본다고 했다. 그 아이의 이름을 물어봤더니 가연이라고 대답했다.
? 내 방에서 보이는 놀이터엔 늘 아무도 없었다.   
 

1. 텍스트 해석과 추론
 
 ②에서 나는 택시를 합승했던 여자를 따라서 하차한다. 이어서 ③에선 29살 한모씨가 택시에 합승한 여승객을 인근의 야산에 암매장했다는 뉴스가 나온다. ②와 ③은 연언되어 29살 한모씨가 주인공일 수도 있다는 인상을 갖게 한다. 나와 비슷해 보이는 사람이 야산에서 서성거리는 것을 목격했다는 ⑤와 ⑫의 증언도 주인공이 여승객을 암매장한 것이 아닐까라는 추정을 지지한다. 그러나 주인공을 여승객 살해범으로 지목하기엔 확실한 결정적 증거가 없다. 빈과 이웃주민은 단지 야산을 서성거린 사람이 나와 비슷하게 생겼다고 말했을 뿐이다. 설령 내가 그(그들)가 목격한 그 사람이 맞을지라도, 나는 그저 밤바람을 쐬러 야산에 나온 것일 수 있다. 또한 방송에 보도가 될 정도로 신원이 밝혀진 범인이 검거되지 않은 채 버젓이 바깥에서 배회한다는 것도 납득하기 어렵다.
 이처럼 우리가 소설 속의 미스테리를 규명하기 위해선 결국 텍스트에 제시된 단서를 근거로 추론을 해야 한다. 명백하게 메뉴얼화되지 않은 현상들 앞에서 독자는 일련의 추론을 통해 그 내용을 이해하려고 노력한다.
 논리학적 규칙만 따른다면, 서사의 해석은 그저 단순한 연역과정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사건과 현상이 나타내는 관념이 개입되는 삼원적 관계에선 해석자가 지닌 관념의 토대 위에 세워진 가설이 특정한 사실을 설명하거나 이해하는 데 있어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그러므로 소설처럼 복잡한 발화체 앞에서 텍스트 추론은 해석자의 능동적 참여와 협력에 의해서만 가능해진다.
 이러한 특징은 참과 거짓을 명확하게 가려내야 하는 강박으로부터 인간의 사유를 해방시키고, 공식화된 연역 규칙을 기계적으로 준수하지 않아도 된다고 허락함으로써, 해석을 위한 더 넓은 상상공간을 제공한다. 여기엔 ‘참된 것은 없으며, 있다고 할지라도 알 수 없다’는 인식론적 회의주의와 철학적 맥이 연결되어 있다. 우리는「수족관」에 관하여 그 어떤 것도 확신에 찬 어조로 단언하거나 장담할 순 없지만, 상상력의 날개 위에 올라 그 어떤 담론이든 자유롭게 펼쳐 나갈 수 있다.
 

2. 시간과 시퀀스
 
 ①에선 TV를 중고상에 처분한 주인공이 ⑭에선 자기의 방에서 TV 뉴스를 본다. 원래 TV가 두 대였는데 그 중에 하나를 팔아 치운 것일까? ①에서 ‘내 원룸의 실내를 차지하고 있는 세간은 회벽에 붙어 있는 반원형 탁자와 그 위의 트랜지스터 라디오, 창턱 밑의 쇠침대 등이 전부였다’라고 진술하는 것으로 볼 때, ⑭의 TV를 처음부터 보유한 것은 아니다. 텍스트에 나와 있진 않지만 ①과 ⑭사이에 새 TV를 구매한 것이라는 가정은 비록 상식적이긴 하지만, TV를 팔아버리고 자폐적 일상의 좁은 울타리 내에서 오직 수족관과 유로만을 병적으로 탐닉하는 주인공이 그 사이에 은근슬쩍 TV를 장만하는 것은 극 전개상 어색하게 느껴진다.
 관점을 바꾸어서 ①과 ⑭에 나오는 TV가 동일한 물건이라고 가정해보자. 그렇다면 ⑭는 ①보다 앞선 사건이 된다. ⑭에서 이유로가 베트남계 청년에 의해 살해당했다는 뉴스를 보다가 여자아이들의 재잘거림이 들려오자 TV를 끈 나는 ①에서 그 TV를 처분한다. 그리고 TV가 놓여있던 자리가 허전하게 느껴져서 라디오를 켰다가 ‘어디선가 계집아이들이 뛰어놀며 재잘거리는 소리’가 들리자 ‘진공상태 같은 침묵의 방음벽’에 갇히지 않을 수 있게 해주던 라디오를 끈다. 
 한편, ?의 이전까지 놀이터에 고무줄 놀이를 하는 계집애들 또는 여자아이의 시신을 발굴하고 이를 지켜보는 사람들이 있었는데도, 정작 ?에선 ‘놀이터에는 늘 아무도 없었다’고 말한다.「수족관」의 서사 시퀀스가 시간 순서대로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 플래시백을 통해 후행 사건이 먼저 서술되었다는 시각으로 접근한다면, ?과 놀이터에 관한 그 이전 진술에서 형성되는 모순을 해결할 수 있다. ?은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 나오지만, 놀이터에 있는 사람들을 묘사하는 진술보다 시간적으로 과거의 상황인 것이다.
 한 단락에서 다른 단락으로 건너뛸 때마다 줄거리는 단절된다. 모든 사건을 하나의 선적인 연속상태에서 이야기하고 사실들의 연속성을 한 시퀀스 내부에 부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리는 소설에서 연속성으로서의 시간은 특정 순간에만 체험할 수 있다. 병치된 덩어리로 이야기를 전개하는「수족관」의 이야기 방식은 시간의 단절을 매우 잘 느끼게 한다. 또한 이 소설에서 시간상으로 떨어져 있는 개별 사건들을 기술하는 두 단락 사이의 여백은 단락 사이에 일어난 사건을 삭제하고 이야기를 빠르게 진행시킨다. 이러한 불연속성은 작품이 지닌 기묘한 분위기와 조화롭게 어우러진다.
 이 소설을 비롯한 현대의 문학작품들에선 시간의 연쇄에 따라 발생하는 사건을 순차적으로 이야기하는 진행과정을 따르지 않는다. 거기에선 시간의 질서가 무너지면서 종종 이전의 사건과 이후의 사건들이 뒤섞이고 결과가 원인보다 먼저 제시되기도 한다. 「수족관」의 이야기를 해석하려면 서사 구조들을 작은 단위로 분해하여 인과관계와 시간적 순차성에 의해 이리저리 재배열해야 할 필요가 있다. 여기서 문제는 특정 단락에서 묘사되는 사건이 연관된 단락의 것에 비해 선행사건인지 아님 후행사건인지, 그리고 각 단락 간의 시차는 어느 정도인지 파악하기가 무척 어렵다는 점이다.          
 이렇게  소설 텍스트가 시간적 연쇄를 깨뜨리면서 이야기를 엮는 것은 고유의 효과를 얻기 위해서이다. 바로 그런 효과의 극대화를 위해 담론의 층위에서 시간적 질서를 뒤섞음으로써 고유의 서사 형식을 조직화하는 것이다. 대개 이야기라고 하면 우리는 거의 직관적으로 어떤 현실의 모습을 재현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이야기의 본질은 현실의 단순한 재현을 넘어 그 현실에 대한 우리의 인식을 ‘조작’함으로써 나타나는 긴장이나 즐거움 등 다양한 의미 효과를 창출하는 데 있다. 탐정물 혹은 스릴러물에서 자주 발견되는 복잡한 시퀀스는 독자의 충격을 배가시키기 위하여 사건의 이면에 숨겨진 진실을 효과적으로 보여주려는 의도로 도입된다. 이야기는 현실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제공하는 장치이기 때문에 어떤 고정된 실체나 사물이 아니라 바로 이야기하는 그 행위 자체 속에서 구성되는 것이다.      
 독자가 선후관계를 파악하는 데 어려움을 겪도록 만들고, 시간의 퍼즐게임에 동참하도록 유도한다는 측면에선 「수족관」은 여타 작품의 서사 시퀀스와 같은 효과를 창출한다. 하지만 「수족관」의 뒤얽혀 있는 시퀀스는 단지 이야기를 흥미롭고 박진감 있게 전달하기 위한 형식적 기법으로만 기능하는 것에 그치는 게 아니라, 그 자체가 내용이 되어 앞뒤를 분간할 수 없는 무질서의 카오스 세계를 날것으로 현시한다. 이런 의미에서 이 소설은 러시아 형식주의자들이 이야기의 본질이라고 강조한 낯설게 하기를 정확하게 포착하고 있다. 평범한 사물도 마치 처음 보는 것처럼 묘사함으로써 낯설게 만드는 것을 뜻하는 낯설게 하기는 익숙한 사물을 뒤집어보고 해체함으로써 새로운 인식을 유발한다. 우리의 인식이나 지각 내용은 대개 고정적인 질서에 순응되어 있다. 문학은 그러한 인식주관에 일부러 현기증을 일으키고 습관화된 패턴을 깨뜨림으로써 자기 자신의 가치를 드러낸다.    
 

3. 플롯과 인과율

 시퀀스를 재배열함으로써 이 작품에서 서술되는 몇몇 사건들은 스토리의 아귀를 맞출 수 있다. 그러나 상당수 사건들 간의 비정합적 문제들은 선후관계를 정리하는 방식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다시 말해서, 시퀀스를 앞으로 밀고, 뒤로 당겨도 논리적 개연성을 갖춘 내러티브를 완성할 수 없는 난점은 여전히 상존한다. 인과율에 의거한 플롯의 구성이 쉽사리 이뤄지지 않기 때문이다.
 ⑬에서 나와 택시 합승을 하게 된 키가 크고 얼굴이 창백한 여자아이는 나에게 자기와 어디를 같이 가자고 말을 건넨다. 내가 처음 보는 이 여자아이의 이름을 묻자, 아이는 가연이라고 대답한다. ⑮에서 나는 놀이터에서 키가 크고 얼굴이 새하얀 여자아이에게 다가간다. 아이는 나를 처음 본다고 한다. 나는 그 여자아이의 이름을 묻는다. 아이는 가연이라고 대답한다. 두 사람이 초면인 경우는 단 한번 뿐이어야 한다. 그런데 나는 택시에서 가연이를 처음 보지만, 놀이터에선 가연이가 나를 처음 본다고 말한다. 여기에서 ⑬과 ⑮ 중에 어떤 사건이 먼저 일어났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이것의 플롯을 확보하는 방법은 시퀀스의 재배열이 아니다. 두 사건 사이의 모순을 없애기 위해선 둘 중 한 사람이 이전에 만난 기억을 망각했다는 전제가 보충되어야 한다.
 서사에 있어서 시간성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인과성이다. 익히 알려진대로, E.M 포스터는 「소설의 양상」에서 인과성이 있어야 플롯이 된다고 주장한다. 예컨대, ‘왕이 죽았다. 그리고 왕비가 죽었다’는 단순한 스토리에 불과하지만, ‘왕이 죽었다. 왕과 사별한 슬픔 때문에 왕비가 죽었다’라고 해야 플롯이 된다는 것이다. 즉, 플롯을 생성하려면 ‘~이기 때문에’ 또는 ‘~으로 인하여’에 대하여 언급해야 한다. 그러나「수족관」에선 어찌하여 나와 가인이가 두 번의 만남에서 각각 상대방을 처음 본다고 말하는지 인과적 설명을 찾아보기 어렵다.
 물론, 인과적 설명이 소설 텍스트에 반드시 명시적으로 제시되어야 할 필요는 없다. 인과적 설명이 나와 있지 않더라도 독자들은 사건의 연쇄 속에서 자연스럽게 인과관계를 추정할 수 있다. ‘왕과 왕비는 금슬이 좋았다’거나 ‘부부는 한날 한시에 죽기로 약속했다’는 내용이 앞서 서술되었다면, 독자는 왕의 죽음과 왕비의 죽음 사이에 관련성이 있으리라고 짐작할 수 있다. 이와 달리「수족관」은 독자가 생략된 플롯을 추정할 수 있게끔 도와주는 실마리를 제시하주지 않은 채 침묵한다.
 ⑬에선 나는 얼마 전에 건물 입구와 계단에서 우연히 마주친 적이 있는 이웃청년이 경찰들에게 체포되는 모습을 보게 된다. 경찰은 체포된 범인과 이 놀이터에서 자주 어울리는 것 봤다는 제보가 있었다며 나에게 경찰서로 동행해줄 것을 요구한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③의 이웃청년과 ⑤에서 등장하는 구엔 또는 빈, ⑫의 사내가 동일인물인지 또는 개별인물인지, 그리고 개별인물이 맞다면 체포된 범인은 그 중 누구인지 질문을 던지게 된다. 
 ⑪을 보면 나는 유로를 죽인 후에 단서를 인멸하려고 붉은 구슬이 달려 있는 유로의 머리끈을 주워오는 내용이 나오는데, ⑬에서 경찰은 빨간 구슬이 달린 머리끈을 나에게 들이대며, 이게 범인의 수족관 속에서 발견된 물증이라고 말한다. 독자는 이 지점에서 공황에 가까운 더 큰 혼란에 빠지게 된다. 내가 주워온 머리끈과 범인의 수족관 속에서 발견된 머리끈은 같은 것인지, 다른 것인지에 따라서 질문이 제기되는 양상은 분화된다. 동일한 것이라면, 저 범인은 나를 대신하여 억울하게 누명을 썼다는 얘기가 되는데, 저 머리끈이 어떻게 범인의 수족관에 은닉되었던 것인가? 다른 것이라면 저 범인은 누구를 살해한 것인가? 택시를 합승했다가 암매장당한 여승객?(③) 또는 놀이터에서 암매장당한 여자아이?(③) 자기가 신었던 스타킹에 목이 졸린 채 하반신이 벗겨진 모습으로 발견된 이모양?(⑤) 새빨갛게 벌거벗겨진 채로 축 늘어진 상태로 발견된 여자아이?(⑩) 서술의 순서가 시간의 순서를 따르지 않았다는 사실에 입각해서 생각해본다면, ⑬은 텍스트에서 전술된 살인사건보다 먼저 일어난 사건이 아닐까?   
 이처럼 독자가 이 소설을 읽으면서 서사를 재구성하기 어려운 이유는 원인과 결과가 분명하게 대응되지 않기 때문이다. 소설에서 넓은 의미의 인과관계는 이미 제시된 사건들의 귀결이 되면서 또 다른 사건들을 이끌어내는 관계라고 정의할 수 있다. 사건과 시간의 순서가 복잡하게 뒤섞인 텍스트 앞에서 독자는 당연히 플롯 상에서 이야기되는 세계나 현실을 나름대로 재구성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지 않으면 이야기의 콘텍스트를 미처 따라가지도 못할 것이다. 대개의 소설에서 서사 속의 사건들은 인과관계로 연결되어 플롯을 생성한다. 서사가 플롯을 지니고 있다는 것은, 사건들이 원인과 결과의 위치에 합당하게 배열된 의미완결체임을 뜻한다. 그러나 사건들을 이어주는 끈인 인과적 설명이 결락된「수족관」의 서술적 특성은 특정 사건을 다른 사건의 원인이나 결과가 아니라 그냥 하나의 우연적 사건으로 개별화시킨다.
 ‘까마귀 날자 배 떨어진다’고 해서 까마귀가 날면 항상 배가 떨어지는 것은 결코 아니다. 까마귀가 나는 사건과 배가 떨어지는 사건은 우연적 관계에 놓였을 뿐이다.「수족관」은 그저 선후관계가 엉크러진 파편적 사건들을 모아놓은 것일 뿐임에도 불구하고 독자는 어떤 필연적 인과관계로 결합된 유기체로 인식하려는 오류추리를 범하는 것일 수 있다. 기실 우리가 사는 세계는 우연의 산물로 가득 차 있으며, 소설은 이러한 세계의 질서를 반영한다. 이 소설 안에서 필연적으로 연결된 사건이란 아예 없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미지의 세계를 기필코 파헤치려는 인간의 열망은 작가가 제시하는 개별적인 사실을 상상력과 추리력으로 용접함으로써 종합적인 사실을 언표하는 사례로 만들려고 한다.  
 러시아 형식주의자들은 의미를 지니는 사건들의 최소단위를 모티프(motif)라고 하면서, 서사를 구성하는 화소를 근간 모티프와 자유 모티프로 나눈다. 의미있는 줄거리를 구축하는 데 필수적인 모티프인 근간 모티프가 생략되면 플롯이 생성되지 않는다. 예컨대,「심청전」에서 심 봉사가 스님으로부터 공양미 삼백 석을 시주하면 눈을 뜰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선 공양미를 시주하겠노라고 약속한 모티프가 없다면, 독자들은 심청이 왜 상인들에게 쌀 삼백 석을 받고 몸을 팔아 인당수에 빠지게 되었는지에 관하여 오리무중 상태에 빠지게 되고 그 플롯은 파괴된다. 하지만 심청이 장승상 댁 부인으로부터 수양딸로 들어오라는 제의를 받는 모티프는 심청의 빼어난 용모와 기품을 부각시키긴 하지만, 생략되더라도 서사를 크게 훼손하지 않는다. 이처럼 서사의 구성에 필수적이지 않은 모티프를 자유 모티프라고 일컫는다.
 개개의 사건이 결합하여 인과관계를 맺기 위해선 근간 모티프가 생략되어선 안 된다. 그러나「수족관」엔 너무나도 많은 근간 모티프가 빠져 있다. 이것은 우리가 각종 살인사건 소식과 범인의 수족관에서 발견된 머리끈의 관계 등등의 문제를 교착(交錯)시키고, 더 나아가 이 소설의 유기적 서사를 구성하는 데 곤란을 겪게 만드는 요인이 된다. 누락된 근간 모티프가 많을수록, 사건 사이의 공란을 메우기 위하여 따져봐야 하는 ‘경우의 수’도 복잡해진다. 이는 결국 해석을 시도하려는 독자의 몫으로 환원된다.
「수족관」은 자유 모티프의 비중이 압도적으로 높은 작품이다. 근간 모티프가 뼈대라면, 자유 모티프는 살에 비유될 수 있다. 육체의 아름다움이 뼈가 아닌 살에서 드러나듯이, 이 소설의 참된 매력은 자유 모티프에서 풍겨 나온다. 자유 모티프들의 축적은 이 소설의 의미와 스타일을 규정한다. 이상의「날개」를 보면 주인공이 아내의 화장품이나 거울을 가지고 노는 장면이 나온다.「수족관」에선 주인공이 수족관 속에서 열대어들이 유영하는 모습을 넋을 빼고 바라본다. 이것은 플롯의 생성에 이바지하는 바가 거의 없는 자유 모티프이지만 주제의 형성에는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그러므로 자유 모티프가 생략된다면 소설의 의미와 분위기는 상당히 퇴색되고 약화된다.              


4. 「수족관」의 서사적 특색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가 붕괴되며 현실과 공상의 기준이 너무나도 애매한 「수족관」은 서준환 소설의 작법이 무엇인지를 알고자 탐구하려는 독자에게 작품이 산출하는 미스테리를 가장 근사하게 집약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텍스트이다.「수족관」에서 발생하는 일탈과 파격은 작가의 섬세하고 그로테스크한 심리적 질감이 독자에게 흡수되게끔 결정적 공헌을 하고, 무질서하고 어지럽게 진행되는 시퀀스는 스토리의 복잡함을 생성하며 더 많은 호기심을 유도한다. 바로 이 구조적 전략이 텍스트를 읽은 독자에게 ‘의도된 혼란’을 야기시키는 것이다.
 이 소설이 말하려는 것은 무엇인지, 더욱 사려 깊은 독자라면 작가가 지문의 여러 곳에서 그토록 심어놓은 침울하고 어두운 이미지는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조급함을 달래기 힘들만큼 이 소설 전체를 향한 의혹은 급속하게 확산된다. 하지만 소설의 현실은 그 어떤 물음도 속 시원하게 해결될 가능성을 겹겹으로 차단하고 있다. 따라서 읽기는 지속적으로 지연된다. 그 지연의 이면에는 상징적 이미지들이 서사의 전략에 의하여 즐비하게 배치되어 있다. 조급한 독자는 왜 이 소설의 제목이 하필 ‘수족관’일까, 나아가 그것이 상징하는 바가 무엇일까라는 질문에 이르게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이것은 결코 우문이 아니다. 이 소설을 여러 차례 정독한 독자라면 그 질문은 자연스럽게 우러나올 수 밖에 없다. 독자가 이 소설 텍스트에 대한 전면적인 의혹을 제기하고선 미궁에 빠지는 바람에 혼란에 휩싸이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불연속적으로 이동하는 에피소드에서 독자는 작가의 낯선 글쓰기 방식에 쉽게 적응하는 데 난항을 겪는데, 이는 소설이 함축하고 있는 ‘계산된 무규칙성’에서 기인한다.
 구조주의적 분석 방법으로는 이 소설의 실체로 접근하려는 노력에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소설은 가시적 구조를 의도적으로 무너뜨리고 그 잔해를 뒤섞어놓은 작품이기 때문이다. 작가는 일차적 이야기에 다각적 변형을 꾀하거나 서술의 시간과 실제의 시간 사이의 불일치를 보여줌으로써 독자에게 해석의 지연을 유도한다. 해석이 지연되는 동안 지적 게임에 참가하는 독자는 그만큼의 긴장과 혼란을 지속할 수 밖에 없다.「수족관」의 텍스트를 살펴봄으로써 우리는 서술의 전략에 의해 이야기가 매우 복잡한 형태로 재배열될 수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렇다면 그 전략의 의도는 무엇일까. 지금까지 시행되었던 기능적 이야기 분석의 배후엔 다른 접근법이 기다리고 있다.


Ⅲ. 텍스트 분석을 위한 언어학적 고찰

1. 명사(名詞)의 한정성

「수족관」의 서사를 분석하면서 가장 강하게 제기되는 의문은 텍스트에 묘사되는 존재자가 과연 누구를 가리키느냐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은 ‘명사’의 문제이다. 명사는 사물의 이름을 나타내는 품사이며, 특정한 사람이나 물건에 쓰이는 이름이냐 일반적인 사물에 두루 쓰이는 이름이냐에 따라 고유명사와 보통명사로 나뉜다. 즉, 고유명사는 특별히 지정된 개별자만을 지시하며, 보통명사는 수많은 개별자에 적용될 가능성을 지닌다.
 명사는 추상적일수록 한정성이 약화되며, 이에 따라 대상의 결정에 문맥이 개입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여승객’이란 보통명사는 지시의 범주를 운수기관에 탄 여자 손님으로 한정한다. 소설 텍스트 전체를 통틀어서 여기에 해당되는 인물이 단 한 명만 언급된다면, ‘여승객’은 고유명사처럼 하나의 인물만을 특칭하는 지시어로 사용될 수 있다. 하지만 「수족관」의 ②와 ③에서 여승객이 두 번 등장하므로 일단은 보통명사로서의 지위만 부여되어야 한다.
 ③의 ‘남자’와 ⑫의 ‘사내’는 한정성이 매우 약한 보통명사이지만, 내가 사는 다세대 주택의 복도에서 인사를 나눈다는 공통적 정황에 의거하여 같은 인물일지도 모른다는 인상을 독자에게 준다. 그러나 ‘이 주택에 사는 남자는 나와 그 남자 뿐이다’라는 명제가 텍스트에 명시적으로 언급되지 않았다면, 두 사람의 동일성 여부를 확실하게 판단할 수 없다.
 고유명사는 특정한 개별 존재를 가리키기 위한 것이며 오직 하나의 대상에 한정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고유명사는 한정성은 최대화되고 문맥의 개입 가능성은 극소화시키는 단어이다. 우리의 일상 생활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고유명사는 사람의 이름이다. 가연이는 그 이름이 붙여진 사람만을 지칭하되, 그 사람에 관한 어떤 의미나 정보도 제공하지 않는다. 또한 어떤 범주를, 즉 가능한 대상들의 한 부류를 지시할 어떤 가능성도 가지고 있지 않다.    만약 ⑬과 ⑮에 나오는 가연이가 동명이인이라고 가정해보면, 인물의 개별성을 구별하기 위한 가연이라는 이름의 지닌 한정적 기능은 줄어들고, 반면에 문맥의 역할은 강화된다. 또한 가연이라는 고유명사를 보통명사로 간주하여 그 한정성을 약화시키면, 우리가 앞에서 제기했던 물음에 대한 단서를 찾을 수 있게 된다. 내가 택시와 놀이터에서 만난 가연이는 이름만 같을 뿐, 다른 개별자이기 때문에 나와 초면인 상황이 두 번 발생할 수 있는 것이다.
 고유명사가 여러 개별자에 붙여지는 보통명사처럼 사용된다면, 고유명사보다 지시하는 대상의 수가 더 많은 보통명사는 그 한정성이 다른 텍스트에 비해 훨씬 약화된다. 같은 이름을 가진 인물마저도 동일인물이라고 확신할 수 없는 마당에, 보통명사로 지칭되는 인물의 동일성은 더욱 신뢰하기 어려워지는 것이다.
 한정성을 잃은 명사는 개별 존재자를 가르던 구획을 무너뜨리면서 인물과의 관계를 애매하게 만든다. 그렇게 서준환의 소설 세계에서 등장인물들은 타자와 확연하게 구분되는 자신만의 고유한 개성과 정체성을 상실하고선 누구인지 불명확한 추상적인 존재자로 그려진다.
 

2. 언어의 지시성
 
 지시(reference)란 ‘언어 기호가 언어외적 현실의 대상체를 가리키는 기능’ 또는 ‘언어 기호와 그것이 나타내는 대상체를 연관지어 주는 것’으로 정의된다. 하지만 지시란 어느 특정 상황에서 언어적 표현과 대상 사이에 성립되거나 설정되는 관계로 보아야 한다. 언어적 표현 그 자체가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화자가 어느 특정 상황에서 어휘적 표현의 힘을 빌어 특정 대상을 지시하며, 독자(청자)는 이에 대응하여 이해를 수행하며 지시를 설정하게 된다. 화자는 언어 체계의 규칙에 의거하여 지시적 표현을 선택하는데, 그 지시 표현은 발화의 특정 상황에서, 관련된 조건들을 충족시키는 적절한 표현일 경우에 성공적인 지시가 이뤄진다. 성공적인 지시는 독자로 하여금 발화된 상황에서의 잠정적 지시체들의 집합으로부터 실질적인 지시체를 찾아낼 수 있게 해준다.  
 우리는 지시적 표현으로써 단어 또는 문장과 지시하는 대상 사이에 일정한 관계를 설정한다. 예컨대 ‘이 사람은 나의 친구이다’라는 표현에는 현실 세계의 어떤 대상을 가리킨다. 그렇지만 언어 표현들이 지시하는 대상이 곧 그 의미가 될 수는 없다. 동일한 언어표현이 상황에 따라서는 상이한 언어대상을 가리킬 수 있기 때문이다. ‘서울’의 의미는 한국의 한 나라의 중앙정부가 소재한 수도를 가리킨다. ‘서울’은 한국에선 서울을 가리키지만 중국에서 화자가 이 표현을 사용한다면 그 지시대상은 베이징이 된다.
 반면에 전혀 다른 언어표현이 동일한 지시대상을 가리킬 수도 있다. ‘샛별’과 ‘저녁별’이라는 서로 다른 표현은 서로 다른 관념과 의미를 지니지만, 이 둘은 ‘금성’이라는 같은 지시대상을 갖는다. A가 ‘샛별’이라고 가리키는 별을 B는 ‘저녁별’과 같이 완전히 다른 것으로 가리킬 수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논의된 바를 통하여 우리는 텍스트를 통한 의사소통이 의미나 지시대상에 일어나는 다양한 변이에 의해 얼마나 어려워질 수 있는지 알 수 있다. 
 텍스트에 제시되는 정보가 막연하고 추상적일수록, 언어의 지시적 기능은 약화된다. ‘탈주범은 쌍꺼풀이 없고 광대뼈가 튀어 나왔다’와 같은 묘사는 수많은 사람들에게도 해당되기 때문에 정보로서의 가치가 떨어진다. 한정되는 사람의 범위가 매우 넓은 위의 인상정보만으로 탈주범을 찾는 것은 ‘서울에서 김서방 찾기’나 진배없다. 이와 달리, 상세하고 구체적인 정보일수록 의미의 범위를 더욱 축소시킨다. ‘탈주범 김봉주는 서울 면목동에서 태어났고, 키 177cm 체중 72kg이고, 허리에 수술 흉터가 있으며, 한양대에서 철학을 전공했다’라는 정보는 단 한 인물에게만 적용될 수 밖에 없는 것으로 보일만큼 표현이 자세하다. 자세한 정보를 함축한 문장에서 극소화된 의미의 범위는 대상에 대한 지시와 동치가 된다.
 그렇다면「수족관」에선 의미와 지시가 얼마나 조응되고 있는가? 이 소설의 ②에선 내가 타고 있던 택시에 합승한 여자를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베이지색 블라우스 차림의 그 여자는 커피색 스타킹의 이음선이 아슬아슬하게 드러날 정도로 짧은 가죽 스커트를 입고 있었다. 앞좌석에 않은 그녀의 머릿결은 열어둔 차창으로 새어 들어오는 바람결에 흩날리며 끊임없이 향긋한 샴푸 냄새를 풍겨왔다. 택시는 계속 달렸다. 그녀는 긴 다리를 몇 번씩이나 번갈아가면서 꼬았다. (8페이지)

 이 여승객 외에 위에서의 묘사에 해당되는 또 다른 인물이 존재할 수 있을까? 비교적 상세하게 묘사했다는 느낌을 주긴 하지만, 유일무이한 개인에게만 적용될 정도는 아니다. 다음과 같은 묘사는 나와 빈이 외출을 하는 ⑦에서 나온다.  
 
 얼마 후 한 젊은 여자가 우리가 탄 택시에 합승했다. 앞좌석에 않은 그 여자는 베이지색 블라우스를 입고 가죽 스커트 밑으로 커피색 스타킹의 이음선이 아슬아슬하게 드러나 있는 허벅지를 포개놓고 있었다. 살짝 열어둔 차창 틈으로 습진 저녁 바람이 불어와 앞에 않은 여자의 머릿결에서 향긋한 샴푸 냄새를 퍼뜨렸다. (18페이지)         
 
 이번에는 빈과 함께 택시를 잡아탔다는 상황만 추가되었을 뿐, 합승한 여승객으로 지시되는 인물의 옷차림과 다리 그리고 샴푸 냄새는 ②의 인용문과 똑같이 묘사되어 있다. 혹시 두 인용문 중 하나는 데자뷰(dejavu)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그렇다고 해서, 두 인용문에 묘사된 여승객이 동일인물이라고 확정할 수 있을까. 다음을 계속해서 살펴보자.

 차가 달리는 사이, 길어진 다리만큼이나 유로의 몸도 육감적인 아가씨처럼 자라나 있었다. 유로는 아가씨 같은 말씨로 언제 내려서 소풍을 즐기려는 거냐고 투덜거렸다. 이럴 줄 알았으면 따라나서지 않는 거였다며 유로는 길어진 다리를 바꿔서 꼬았다. 유로의 짧은 원피스 자락 밑으로 까만색 스타킹의 이음선이 아슬아슬하게 드러났다. (26페이지)

 위의 인용문은 나와 빈이 유로와 소풍을 떠나는 ⑪에서 나온다. 샴푸 냄새에 대하여 언급하지 않은 점만 제외하면 유로는 택시에 합승한 여승객과 유사하게 묘사된다. 유로의 몸은 차 안에서 ‘육감적’으로 성숙하게 변모한다. 위 인용문의 뒤에는 ‘성숙한 여인으로 변한 유로’라고 재차 묘사된다. 현실적으로 차가 달리는 동안에 소녀가 숙녀로 변신할 리 없다. 우리는 이 대목에서 작가가 동일한 묘사를 반복하는 이유를 추정할 수 있다.
 ‘짧은 치마’ 밑으로 드러난 ‘스타킹의 이음선’, ‘다리를 꼬아 않은 모습’, 덧붙여 ‘향긋한 샴푸 냄새’는 인물에 대한 실제적 묘사단위가 아니라, 주인공의 페티시즘(fetishism)을 표상하는 것들이다. 다시 말해서 유로가 갑자기 성숙하게 변한(것처럼 보이는) 이유는 여성의 신체 일부, 옷차림, 냄새 따위에서 성적 만족을 얻는 나의 이상 성욕이 그녀에게 투영되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②와 ⑦에 등장하는 택시 여승객의 모습도 실제 그대로 온전하게 묘사된 것인지 의심스러워진다.
 ②와 ⑦의 여승객은 한 명일까 아니면 다른 두 명의 인물일까? 위에 나온 묘사는 단 한 사람에게만 적용될 수 밖에 없는 매우 구체적인 표현이 아니며, 더군다나 비현실적 상황에서도 유사하게 되풀이된다. 따라서 ②와 ⑦의 여승객에 대한 묘사는 특정 대상만을 지시한다고 보기 어렵다. 의미를 한정함으로써 대상의 범위를 축소하긴 했지만, 지시대상과 동치에까지 도달하진 못한 것이다.
 의미에 의한 한정으로 지시대상이 특정화되지 못하는 이와 같은 예는「수족관」의 전체 텍스트에서 빙산의 일각에 지나지 않는다. 상황과 인물의 동일성 여부를 파악하기 어렵게 만드는 묘사의 예를 몇 가지 더 살펴 보기로 하겠다.

 그는 자기가 실은 베트남계라고 답했다. 아버지가 한국 사람이고 엄마가 베트남 여잔데, ‘빈’이라는 건 베트남에서 불리던 이름이라고 했다. (중략) 그러고 보니 구엔 또는 빈, 그 친구는 여느 한국 사람들보다 눈이 더 동그랗고 더러 한국말 발음이 어색해질 때가 있는 것 같기도 했다. (20페이지)
 
 그러자 기사는 뜬금없이, 자기는 아버지가 한국 사람이고 어머니가 베트남 여자인 베트남계 혼혈아인데...(중략) 그러고 보니 기사는 여느 한국 사람들보다 눈이 더 동그랗고 더러 한국말 발음이 어색해질 때가 있는 것 같기도 했다. (30페이지) 
 
 서술상의 순서로 볼 때, 주인공이 유로를 살해한 다음에 빈은 현장에서 도망가고 더 이상 등장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뒤에 내가 택시를 탔다가 가인이와 합승하게 되는 단락에서,  기사는 빈과 똑같이 묘사된다. 맥주를 사들고 나의 집에 놀러 온 빈이 자기가 전직 택시 기사였다고 소개하는 ⑧의 구절은 위의 두 인용문을 연결시키지만, 빈과 기사에 대한 묘사도 여승객과 유로에 대한 것처럼 명백한 지시성을 보증할 만큼 구체적이지 않긴 매한가지이다.   엄밀히 말한다면 ‘한국 사람들보다 더 동그란 눈과 어색한 한국말’은 한국에 체류 중인 다른 외국인에게서도 흔하게 발견할 수 있는 모습이다. 달리 말해서, 단지 빈이라는 1인의 모습을 묘사할 때에만 독점적으로 사용하기엔 너무나 일반적인 표현이라는 것이다. 이를테면, 어떤 동양인들이 단체로 유럽으로 관광을 하러 갔다가 누군가가 범죄를 저질렀다고 가정하자. 이들에게 ‘광대뼈가 튀어 나오고 쌍꺼풀이 없는 눈’이라는 현상적인 기준을 적용하게 되면 그들 중 상당수가 용의자가 될 것이다. 또한 그 나라의 현지 경찰들에게 이와 같은 정보만을 제한적으로 알려주게 된다면 개별적인 인물을 동일한 인물로 묶어버리는 오류를 범할 수 있는 소지가 매우 높다.

 그제야 나는 그 여자아이를 찬찬히 뜯어보았다. 키가 크고 얼굴이 창백했다. (30페이지)
 
 나는 고무줄놀이를 하고 있는 여자아이 중에서 가장 키가 크고 얼굴이 새하얀 여자아이에게 다가가서는...(후략) (34페이지)
 
 앞 장에서 살펴보았던 가인이의 모습에 대한 묘사이다. 우리는 이미 ⑬과 ⑮에서 등장하는 가인이를 동일인물이라고 상정하게 되면 또 다른 전제를 보충하지 않는 한, 논리적 모순으로 귀결된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하지만 ‘키가 크고 얼굴이 새하얀 (창백한)’ 모습은 비단 가연이라는 여자아이 뿐만 아니라 다른 소녀들에게서도 얼마든지 발견할 수 있는 속성이다.
 ‘여느 한국 사람들보다 눈이 더 동그랗고 더러 한국말이 어색해질 때가 있는 것 같다’와 ‘키가 크고 얼굴이 하얗다’라는 묘사는 소설의 여러 인물을 대상으로 거듭 사용됨으로써 수사적 개성을 잃고, 작가가 설정한 하나의 전략적 클리셰(clich?)가 된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클리셰에 대한 새로운 정의를 요청하게 된다. 기존의 클리셰는 ‘이슬처럼 영롱한 눈’,  ‘삼천리 금수강산’처럼 판에 박은 듯하고 진부한 표현을 가리키는 문학용어를 뜻하지만, 서준환의 소설세계에서의 클리셰는 상이한 여러 대상들에 이중, 삼중으로 사용될 수 있는 문구를 의미한다. 전자는 관습성과 문학적 가치를, 후자는 반복성과 언어적 가치를 문제 삼는다는 점에서 후자는 전자보다 더욱 광의의 클리셰라고 할 수 있다. 반복되는 묘사는 지시적 기능을 상실하고 외부세계와 유리된 상태로 언어 자체로서의 의미만 보유하게 된다. 이러한 관점은 언어의 의미를 다룰 때에 언어 자체에만 집중하고, 언어 외적인 현실세계의 대상을 고려에서 제외하는 언어학자들의 학문적 견지와 상통된다.
 동일한 재료와 구조로 치장된 집안은 몰개성적일 수 밖에 없듯이, 클리셰의 남발은 묘사하는 대상의 개별성과 차별성을 증발시킨다. 이는 지시적 기능을 요체로 하는 언어의 힘을 무력화한다.
 여기서 또 의문이 제기된다. 작가의 주요한 예술적 미덕 중 하나는 참신성인데 왜 서준환은 텍스트 전반에 클리셰가 내포된 소설세계를 빚어냈을까? 클리셰의 예술적 가능성을 시험하기 위해서였을까? 아니다. 똑같은 이야기는 똑같은 것을 가리키는 게 아니라 아무 것도 가리키지 못한다는 역설적 진실을 증언하고 싶었던 것이다. 우리는 현실과의 고리를 끊고 임의적으로 설정된 클리셰가 곳곳에 이식된「수족관」텍스트를 통하여 지시력을 상실한 언어가 봉착하게 되는 ‘혼성(混成)의 아포리아(aporia)’를 목도할 수 있게 된다.


3. 동일성과 유사성
 
 텍스트에 제시되는 언어적 요소들의 결합은 이것들이 동일한 외적 현실에서 이루어진다는 가정에 기초한다. 다시 말해서 주어와 목적어 그리고 동사 등의 언어적 요소들은 언어 외적 현실의 동일성이 전제되어야 하나로 접착되어 의미를 생성한다. 예컨대, ‘나는 글을 쓰고 있다’는 문장은 ‘나’와 ‘글’이라는 대상과 ‘쓴다’는 행위가 동일한 상황에 귀속될 때에만 그 의미가 비로소 성립될 수 있다. 복수의 문장이 서로 연결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나는 라디오를 켰다. 광고 방송이 끝나고 곡목과 장르를 알 수 없는 이런저런 음악들이 이어졌다. 불을 켜지 않은 방 안은 점점 더 어두워져갔다. 나는 블라인드를 내렸다. 하지만 내 방은 칠흑 같은 어둠에 밀봉되지 않았다. 형광등으로 밝혀진 수족관이 투명한 빛의 입방체로 떠올라 어둠의 한 모서리를 잠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의자를 끌어다놓고 수족관 앞에 앉았다. (14페이지)

 위 단락에선 접속사나 연결어미가 쓰이지 않았다. 그러므로 개개의 문장이 하나의 단락으로 결속되기 위해선 동일한 외적 현실에 공통적으로 기초한다는 전제가 있어야 한다. 특히  라디오를 켜는 ‘나’와 블라인드를 내린 ‘나’, 그리고 의자를 끌어다놓고 수족관 앞에 앉은 ‘나’가 동일한 상황에 귀속된 동일한 인물이라는 전제가 없다면 각 언어적 요소는 그저 이음쇠가 사라진 쇄편에 지나지 않게 된다. ‘나’라는 일인칭 대명사가 각 문장이 흩어지지 않게 연결시켜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우리가 이 소설에서 제시되는 개별적 단락들을 동일한 이야기의 흐름 위에 놓여있다고 본 이유는 화자인 ‘나’가 단일성을 유지하고 있다고 간주했기 때문이다. ‘나’의 단일성이 전제되어야 이 소설이 하나의 결합된 이야기를 전개하고 있다는 믿음이 타당성을 지닐 수 있다. 단일시점은 소설의 강력한 통합 요소로 기능하면서 독자에게 더욱 응집력 있는 경험을 제공한다. 또한 이야기가 일관성 있게 전개되므로 누구의 시점에서 상황을 바라보는 중인지 혼동할 필요도 없다.  
 하지만 앞에서 살펴본 대로, 작가는 우리의 통상적인 소설 읽기 습관을 공략하고 있다.  이 소설 속의 모티프들은 반복에 반복을 거듭하며 대상을 통일성 있게 결합하는 형식적 관계를 무너뜨리고 언어의 지시적 효력을 정지시킨다. 그런데 여기에 ‘나’라는 일인칭 대명사만 지시적 효력을 보유하는 성역으로 남겨둘 수는 없다. 반복적으로 사용된다는 측면에서 ‘나’라는 대명사도 대상의 한정을 이루지 못하는 클리셰의 일종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수족관」이 단일시점이 아닌 다중시점에서 서술된 소설일 수 있다는 가능성도 상정해야 한다.
 자넷 버로웨이에 따르면, 시점이란 우리가 이야기를 경험할 수 있는 ‘밴티지 포인트’(Vantage point)이다. 이런 밴티지 포인트는 시점 인물과 가까이에 있거나 혹은 시점 인물 속에 들어가 동일시되고 독자는 시점 인물의 관점을 통하여 이야기에 접근한다.「수족관」이 다중시점 소설이라면, 여러 화자 사이를 번갈아가며 이동하는 밴티지 포인트를 통하여 우리는 다양한 관점에서 서술된 이야기를 접할 수 있다.  
 오히려 우리는「수족관」을 단일시점이 아닌 다중시점 소설이라고 간주할 때에 위에서 노정되었던 플롯상의 모순을 풀 수 있는 실마리를 획득하게 된다. 모순은 두 가지 이상의 모티프가 양립하지 못하고 서로 배척하는 상태이며, 이는 주체의 동일성 또는 상황의 공속성을 전제로 한다. ‘나’는 TV와 오디오 세트를 팔아버렸는데 나중에 베트남계 청년이 유로를 살해했다는 뉴스를 TV로 본다. 이러한 모순을 해소하기 위해 ①과 ⑭의 시간적 순서를 맞바꾼 앞 장의 방식은 ①과 ⑭의 ‘나’를 동일인물로 간주한 데에서 도출된다. 그러나 만약 ①과 ⑭의 ‘나’가 다른 인물이라면 각 모티프는 어떠한 모순도 성립하지 않는다.
 ⑫에서 이웃청년이 체포되는 광경을 목격하는 ‘나’와 ⑪에서 유로를 질식사시킨 ‘나’는 다른 인물이라고 가정해보자. 경찰은 범행의 물증으로 이웃청년의 수족관 속에서 발견된 빨간 구슬이 달린 머리끈을 제시하는데, 그렇다면 체포된 이웃청년을 유로를 죽인 이후에 그 아이의 머리끈을 가져 온 ⑪의 ‘나’로 대응시켜 볼 수 있다.  
 덧붙여, ‘놀이터에는 늘 아무도 없었다’고 진술하는 ?의 ‘나’는 놀이터에서 고무줄놀이를 하는 유로를 주시했던 ‘나’와 다른 곳에서 거주하는 다른 인물일지도 모른다는 가정도 충분히 가능하다. 이러한 접근론 하에선 각 모티프의 화자로 등장하는 ‘나’는 동일하지 않은 사건을 경험한 개별 존재자이기 때문에 사건과 사건 간에 개연성을 갖춘 선후관계를 설정하는 추론작업은 무의미해진다. 이처럼「수족관」에서 ‘나’의 다자화(多者化)는 이 소설의 모티프들을 동일한 현실에 귀속되지 않는 조각들로 분쇄하는 결과를 낳는다. 지시적 기능이 부정된 소설 속 언어가 외적 현실의 동일성을 파괴함으로써, 텍스트의 유기적 결합관계를 근본적으로 뒤흔드는 것이다.      
 동일성이 허물어지면서 파편화된 모티프들은 그제야 유사성의 원리에 의거하여 새로운 패턴의 관계망을 직조하는 씨줄과 날줄이 된다. 한국인보다 눈이 더 동그랗고 우리말 발음이 어색한 택시기사와 빈은 동일인물로 볼 수는 없어도 유사한 묘사를 통하여 닮은 모습을 띤 사람들로 묶어진다. 또한 우리는 ⑩과 ⑫의 놀이터가 동일한 장소인지 확실히 알 수 없다. 그러나 확실한 건 회양목, 경찰차와 구급차, 향불 냄새와 매캐한 연기, 버즘나무를 반원모양으로 에워싼 사람들 등의 공통 요소들이 두 놀이터를 이어준다는 것이다.
 동일하지 않은 대상을 유사한 것으로 엮어주는 소품과 장치들은 기호로서의 가치를 지니게 된다. 에코는 기호를 ‘다른 무엇의 의미적 대체물로 채택할 수 있는 모든 것’이라고 정의한다. 여기서 그 다른 무엇은 필수적으로 존재하지 않아도 되고, 기호가 그것을 대신하는 순간에 실제로 현존하지 않아도 된다. 즉, 같은 의미가 부여된 기호들은 동일한 존재자를 반드시 지시하지 않아도 된다. 기호는 사물과 사태의 현존을 불문하고 의미와 관념의 관계에서만 발산하기 때문이다. 즉, 동일성이 지시대상의 차원과 결부되는 반면에 기호들의 반복적 등장을 통해 생성된 유사성은 의미의 차원에만 결부되는 것이다.
Ⅵ. 상징기호의 해석
 
1. 살인
 
 우리는 앞에서 정독을 통하여「수족관」의 텍스트가 서술순서와 시간순서 사이의 불일치 형태로 구조화되어 있음을 알 수 있었으며, 심지어 비동일적 화자들에 의하여 진술된 유사 모티프들이 교묘하게 연합한 이야기일 수도 있다는 가능성까지 살펴보았다. 여기에 삽입된 복잡한 서사구조와 등장인물들의 중층적 관계들은 그것에 내재된 의미를 찾기 어렵게 만든다.
 작가는 왜 이야기를 이렇게 복잡한 형태의 구조로 조직하고 읽기의 지연을 지속적으로 유도하는 것일까. 이 질문이 바로 그토록 독자가 궁금해하는 소설의 주제와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 이 소설의 난해하고 복잡한 이야기는 궁극적으로 하나의 테마를 향한 서술전략인 셈이다. 우리는 텍스트 내부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면서 모종의 의미망을 형성하는 상징기호들을 해석함으로써 소설 속의 중심테마에 접근할 수 있다. 
 이 소설에선 살인 모티프가 여러 차례 등장한다. 나는 어느 야산에서 유로를 살해하고, 라디오에선 살인 사건에 대한 좌담이 방송되고, 놀이터에선 당국자들이 여자아이의 시신을 발굴한다. 여기에서의 범죄들은 희생자들이 자기가 신고 있던 스타킹에 목이 졸린 채 하반신이 벗겨져 있는 모습으로 발견된 어린 여성이라는 점에서 강간 여부와 무관하게 다분히 성적인 함의를 담고 있다. 이 소설 전반에 흐르는 성적 살인(sexual homicide) 모티프는 히치콕이 정신분석학적 주제를 끌어들여 펼쳐냈던 세계를 훌륭히 변주하고 독특한 스릴러의 분위기를 창조한다. 따라서「수족관」을 분석하기 위해선 정신분석학적 개념들을 적용하는 것도 유용할 것이다. 특히 자크 라캉의 설명들이 적절할 것이라고 판단되어 중점을 두고 살펴보기로 하겠다.
 라캉은 욕망(desire)을 유사 개념인 욕구(needs) 및 요구(demand)와 구별하면서 설명한다. 욕구는 인간의 생존을 위한 생물학적 본능이다. 배가 고픈 어린이가 음식을 소구하는 갈망을 욕구의 예로 들 수 있다. 그런데 이런 욕구는 충족이 되고 나면 사라진다. 어린이가 음식을 먹고 포만감을 느끼면, 음식을 먹고자 하는 욕구가 한시적으로 사라지는 것과 같다. 즉, 욕구는 본능적 속성과 연계되며, 욕구에 대한 해결은 충족에 의해 이뤄진다.
 요구는 자신만의 본능이 아니라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형성된다. 어린이는 어머니의 사랑을 요구하고, 이에 대해 어머니가 충분히 사랑을 주게 되면 요구는 어느 정도 해결되지만, 어머니의 사랑이 요구되는 만큼 충분하지 않으면 사랑에 대한 ‘결핍에 대한 욕구’인 욕망이 나타나게 된다. 요구는 하나의 주체가 타자에게 바라는 만큼의 범주이며 크기이나, 그것의 달성 정도는 타자의 행위가 아닌 주체의 기대 정도와 실제 부응 정도의 격차에 의해 결정된다. 어머니 입장에서는 아이에게 충분히 사랑을 주었다고 생각해도 아이가 그 기대가 충족되지 않았다고 생각되면 기대치와 실제치 사이의 결핍만큼의 정도를 더욱 바라게 된다. 바로 그러한 결핍의 정도와 부분을 ‘욕망’하게 된다는 것이다.
 라캉에 따르면, 결핍을 채우려고 하거나, 보완하려고 하거나. 대체하려는 욕망에 의해 ‘기호’들이 발생하고 활용된다고 한다. 허기진 아이는 자신의 배고픔을 알리고 그 배고픔을 해결하기 위한 욕망에 의해 음식물(모유)을 제공할 타자(어머니)를 부른다. 여기서 아이가 타자를 부르는 행위로 인하여 음성 기호가 발화되며, 이들 음성기호들이 기호체계를 형성하게 되고, 그런 체계들이 더욱 발달되어 언어체계로까지 확립하게 된다. 이처럼 인간들 사이의 욕구와 요구 그리고 욕망은 실제의 대상들에 의해 충족되기도 하면서 결핍되기도 한다. 바로 이것들이 충족과 결핍 및 대체하면서 발생하는 것이 기호들인 것이다.
 이러한 시각을 기본 프레임으로 삼아서 살펴볼 때, 인간 내면에 존재하는 다양한 욕구와 요구도 기호와 언어 발화의 발생원인은 되지만, 실제 발화의 핵심적 근원은 욕망과 연계된다. 따라서 라캉은 ‘욕망은 항상 언어나 기호 속에 존재하며, 각인되어 있고, 그것에 의하여 매개된다’고 주장한다. 라캉의 욕망 이론에 입각한다면,「수족관」은 기본적으로 ‘나’와 나의 욕망의 대상인 ‘이유로’ 사이의 일탈적 애욕이 중심축인 작품이다. 이러한 프레임에 입각하여 위에서 분절한 모티프를 시간성과 인과성이 정합적으로 합치되고, 나의 동일성이 분산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서사를 다시 한 번 구성해보면 다음과 같다.      
 나는 방 안에서 수족관을 바라보다가 바깥에서 재잘거리는 소리가 들리자 블라인드를 걷고 놀이터에서 고무줄놀이를 하는 여자아이들 중 노란 원피스를 입은 유로에게 시선을 고정한다. 그 날 이후로도 나는 놀이터에서 고무줄놀이에 열중하는 그녀를 바라보고, 그녀 역시 나의 시선이 자기에게 향해 있는지 틈나는 대로 확인한다. 내 방에 놀러 온 빈과 맥주를 마시던 나는 창가로 가서 또 유로를 바라보고, 빈은 나가자고 한다. 나와 빈, 유로는 놀이터에 앉아서 인사를 하고 대화를 나누다가 친해지자는 뜻에서 소풍을 가기로 합의한다. 나와 빈은 유로를 차에 태우고 소풍을 떠난다. 유로는 차에서 내린 다음에 관능적인 몸짓으로 빈과 나를 유혹한다. 빈은 이내 유로를 범하려고 하지만, 나의 가격에 의해 고꾸라진다. 나는 유로의 목을 스타킹으로 감고선 잡아당기고, 그녀는 숨을 거둔다. 깨어난 빈은 달아나버리고, 나는 유로의 시신을 차에 실고 동네로 돌아온다.
 위에서 나와 이유로는 ‘욕망의 주체이며 대상의 관계’이고, 빈과 유로는 ‘타자의 욕망의 대상이면서 동시에 자신의 욕망의 모방적 대상의 관계’이며, 나와 빈은 ‘동일한 대상을 욕망하면서 우호적으로 지내다가 갈등을 일으키는 관계’라고 정리할 수 있다. 유로를 보고 싶은 나의 욕구는 블라인드를 걷고선 그녀를 주시하면 잠시나마 충족된다. 그러나 나는 그녀와 함께하길 원하는 것을 그녀에게 알려야 한다. 그래서 나는 빈의 부추김을 받아들여 놀이터의 벤치에서 그녀에게 ‘고무줄놀이를 참 잘 하더라’고 칭찬하고, 빈은 ‘어디 좋은 데로 셋이서 소풍이나 다녀오자’고 제의한다. 이처럼 어떤 기호로 표명하는 것이 요구이다. 요구는 대타자의 현전을 전제하고 그의 사랑을 상징화한다. 즉, 요구는 욕구의 불꽃을 끄기 위한 부름과 대타자의 사랑을 원하는 부름, 이중적 부름으로서 나타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구를 통하여 욕구를 일시적으로 잠재울 수는 있어도 대타자의 완벽한 사랑을 얻을 수는 없다. 처음에 내가 생각한 유로는 순수의 화신이다. 하지만 소풍을 떠나 친해지는 과정에서 나는 유로 역시 다른 여성들과 다름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유로도 남성을 유혹하듯 긴 다리에 스타킹을 신고 육감적 몸매를 가진 여성으로 보이는 것이다. 유로가 맨가슴을 열어 보이며 나와 빈을 유혹할 때, 빈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그녀에게 달려들어 숨겨왔던 육욕을 표출한다. 나는 흥분한 목소리로 주절거리며 바지를 까내려는 빈의 뒷덜미를 돌조각으로 내리찍어서 유로의 순수가 오염되는 사태를 중지시키고자 한다.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유로는 축축해진 거웃을 살짝 가리며 나를 사랑한다고 교태를 부리지만, 순결하고 완벽한 사랑을 갈구했던 나는 깊은 실망을 느끼고선 더 이상 자신의 욕구를 채워줄 수 없는 그녀를 목 졸라 살해한다. 유로가 순수한 여성으로서 존속하길 바라는 기대치와 그녀가 상스러운 관능미를 발산하는 실제치 사이의 격차를 해소하기 위해 나는 이 어긋남을 소멸시키는 방법으로 ‘그녀의 죽음’을 욕망하게 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수족관」의 살인 모티프는 인간의 욕망이 변증법적 특성을 가지며 담론에 깊이 새겨진 타자와의 관계에서 출현한다는 사실을 적시한다. 


2. 구엔 또는 빈

 빈은 자기의 이름을 구엔 또는 빈으로 불러달라고 한다. 이러한 이상야릇한 이름의 이면에는 베트남의 파란만장한 근현대사가 숨어있다. 베트남의 마지막 황제 '바오 다이'의 본명은 ‘구엔 빈 수이’였다. 바오 다이는 집권 초기 베트남의 현대화를 내걸고 의욕적인 통치를 추진했으나 프랑스의 방해로 꿈을 이루지 못한다. 그 후 호치민에 의해 통치권을 상실하고 홍콩으로 망명한 바오 다이는 타락하여 성적 쾌락에 탐닉, 플레이보이 황제라는 오명을 얻게 된다. 바오 다이의 이런 극과 극의 이중적인 인생은 작품속의 빈의 태도와 흡사하다.
 
 자기는 아가씨라 불릴 만한 성인 여자들이 무조건 싫다고 잘라 말했다. 성인 여자들은 모두 흘레붙고 싶어서 밑구멍으로 점액을 질질 흘려대고 남자만 보면 암내나 잔뜩 피우려 드는 색마로밖에 보이지 않는다고도 했다. 그의 목소리가 생각보다 컸는지 주위에서 식사하던 여자 손님들이 그를 한 번씩 돌아봤다. 그러거나 말거나 그는 계속해서 흥분한 목소리로 남자와 달리 여자는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아가씨란 이름의 성인으로 자라나지 않아야 옳았을 것이라고 했다. (19페이지)

 빈은 베트남 레스토랑에서 성인 여자들에 대한 노골적 혐오감을 표명하더니 소풍을 가선 성인화된 유로를 범하려는 이중적인 태도를 보인다. 구엔 ‘또는’ 빈이라는 이름은 마치 지킬 박사‘와’ 하이드처럼 그의 인격이 이분되어 있음을 강조하기 위한 상징으로 기능한다.
 확신에 찬 어조로 여성의 성적 측면을 경멸하는 열변을 토하던 빈은 오히려 뇌쇄적인 모습으로 변한 유로를 겁탈하려 한다. 그리고 정작 유로를 살해하는 인물은 다름 아닌 나이다. 이 대목에서 나와 빈을 가르는 경계는 불분명해지고 서로의 존재를 넘나들면서 혼융하는 양상을 보인다. 빈은 혹시 나의 상상에 의하여 만들어진 가상 인물이었던 것은 아닐까. 
 라캉의 정신분석학에서 타자는 언어에 의해 형성되는 무의식이고 억압된 기표이며 꿈이나 증상 등의 무의식적 형성물로 귀환한다. 빈이라는 타자를 나의 무의식으로 치환하면, 빈은 나의 ‘상상적’ 차원에 위치하면서도 ‘상징적’ 차원에서도 위치하여 주체인 나로 하여금 여성에 대한 두 가지 욕망(순결성과 관능성)을 동시에 표상하고 은연중에 드러나게 한다. 빈이라는 대타자를 존재하는 만드는 것은 나의 이데올로기적 제스처이다. 라캉에 의하면 대타자는 사실상 존재하지 않으며 다만 주체 설정의 전제일 뿐이기 때문이다.      
 빈(대타자)이 나(주체)의 전제가 되고 서로의 의식과 행위가 용융되는 변증법적 환상을 통해 두 남자는 욕망하는 존재로 굳건히 자리매김한다. ‘여성의 호르몬이 비극의 씨앗’이라고 말하는 빈의 관념은 나에게 전이되고, 섹시하게 차려입고 다리를 꼬은 여승객을 인식하는 나의 관심은 빈에게 복제된다. 주체는 타자의 욕망을 욕망하기 때문에 내 안의 욕망이 원래 누구의 것인지 추적하는 과정이 주체 탐구에 개입하게 된다. 이로써 나와 빈 사이에 주체적 모순은 필연적으로 발생하게 된다.
 이처럼 욕망은 주체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언어의 지시력 바깥에 있으며, 환상의 지지를 강력히 필요로 하게 된다. 이러한 메커니즘 때문에 주체와 타자의 만남에는 모순과 어긋남 그리고 혼란과 오인이 존재한다. 우리가 이 소설을 읽는 동안 지속적으로 지연을 겪은 이유도 욕망의 환상성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제 와서 반성을 해 본다면, 처음에 설정했던 질문 자체가 무의미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이 소설을 읽으면서 독자가 궁극적으로 도달해야 할 질문은 ‘나와 빈은 동일인물인가?’ 혹은 ‘빈은 실재하는가?’가 아니라 ‘나는 왜 빈이 욕망하는 것을 이입하고 똑같이 욕망하게 되는 것인가?’이어야 한다. ‘타자가 나에게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에 대해 전전긍긍하면서 타자의 욕망의 공백분을 채우는 데 급급한 환상적 시나리오가 우리의 실제 삶이거늘, 그동안 나는 소설에만 주체와 타자의 엄격한 분리와 분명한 지시를 요구하면서 나야말로 타자들이 설계한 욕망의 네트워크에 종속되어 있다는 불편한 진실을 회피하려 했었던 것은 아닐까.
   

3. 수족관

 그래도 나는 수족관 속에서 열대어들이 유영하는 모습에 내내 넋을 빼두고 있었다. 뿔나비돔 한 마리가 소드 테일 한 마리를 뒤쫓았다. (9페이지)
  
 나는 완구점에서 사온 플라스틱 가짜 물고기를 철사 줄에 매달아 수조 안으로 들여보냈다. 한 무리의 소드 테일들이 산소공급기의 공기방울 주위를 맴돌다 가짜 물고기 곁을 지나쳤지만 별다른 반응은 보이지 않았다. (11페이지)

 결국 앞의 논의들을 종합해보면, 수족관은 엉키어버린 채 공존하는 주체와 타자의 갖가지 욕망이 집약된 공간이다. 한데 뒤섞여 어지럽게 된 것들에 뚜렷한 경계가 있을 리 만무하다. 분별되는 한계가 지워진 것들이 지니게 되는 속성이라곤 오직 모호성 뿐이다.
 나의 수족관엔 모호하면서도 한편으론 아이러니한 것이 살고 있다. 예컨대, 강한 이미지인 ‘뿔’과 연약한 이미지인 ‘나비’를 동시에 지닌 뿔나비 물고기, 일정한 성이 정해지지 않고 자가 성전환을 하는 물고기 소드테일이 그것이다. 어린이인지 성인인지 불명확한 유로, 여성은 호르몬이 분비되면서 파리 떼가 들러붙기 좋아하는 흉물들로 전락하게 되는 거라고 지껄이고선 자기가 그 파리 떼가 되는 자가당착을 보여주는 빈도 그러하다.
 수족관을 탐닉하는 나는 가짜 물고기가 되어 그 속으로 들어가지만, 모호성의 상징인 소드테일에게조차 별다르게 인식되지 않는다. 거짓이면서도 참된 것처럼 형상을 띠고 있는 가짜는 정체성을 쉽게 감별할 수 없는 극단적 모호성의 양태이기 때문이다. 이는 내가 어떤 현실계에도 구체적으로 소속되지 않은 경계 너머의 존재라는 사실과도 밀접하게 조응한다. 이처럼「수족관」은 상반된 요소들을 혼유해 시종 충돌시키면서 아이러니하고 기이한 에너지를 내뿜는다.       
 내 방의 트랜지스터 라디오에서는 곡목과 장르를 알 수 없는 음악들이 흘러나온다. 곡목과 장르가 미상인 음악들은 미스터리 투성이인 이 작품의 난해함과 불명확성을 간접적으로 진술한다. 예술의 본질은 근원적으로 불편하고 모호하다. 모든 이가 직관적으로 알아차릴 수 있게 하려면 차라리 표어를 쓰면 될 일이다.「수족관」은 어떤 방향에서도 온전히 보이지 않는 모호한 상징들을 배치함으로써 손에 잡히는 단 하나의 주제와 일원적 해석을 단호히 배격한다.


Ⅴ. 비평적 연구를 통한 전위문학의 가치 조명 

 이 글은 소설 텍스트의 해석에 비평적 개입이 요구되어야 하는 당위와 이에 필연적으로 수반되어야 하는 정독에 대한 실현을 제시하기 위해 작성되었다. 텍스트에는 가치의 위계가 있다는 믿음은 비평의 중요성을 환기시킨다. 비평은 하나의 문학작품이 문학사적 맥락으로서의 가치를 획득하기 위한 과정에 그 의미의 위계를 판단하는 행위이다. 우리는 여러 형태의 비평적 연구에서 연구자의 자의식과 세계관을 드러내는 판단의 계시가 결여되어 있다는 점에 허전함과 공허감을 느낀다. 따라서 해석에서 가치의 개입이 동반되어야 한다.
「수족관」은 서준환의 소설사적 맥락을 상징적으로 예시하는 작품이다. 작가는 문학에 대한 파격적 감각을 통하여 언어의 기성 규칙을 무너뜨려야 거기에 새로운 구조물을 재건할 수 있다고 강변한다. 이 소설은 독자의 시간개념을 혼돈의 상태로 몰고 간다. 물론 이는 작가의 고도의 전략적 계산에 의하여 유도된 것이다. 시간적 순서에 의해 야기된 서사의 인과적 무질서는 이 소설을 해독하기 어려운 것이 되게 하고 있는데, 우리는 모티프를 작은 단위로 떼어내 재배열함으로써 독창적인 서사를 창안할 수 있는 자유를 얻게 된다. 작가는 서사 전략을 통해 단속적으로 읽기의 지연을 촉발하지만, 정독은 바로 이 읽기의 지연이 의도하고 있는 정황을 창조적으로 재구성하기 위한 행위이다. 비동시적인 시공간을 넘어서 이뤄지는 소통에서 배태한 긴장은 예술의 창조적 구성을 위한 영감을 우리 영혼에 불어 넣는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수족관」은 언어의 통상적 규칙을 철저히 위반하면서 전위적인 문학을 지향한다. 문학이 삶의 반영이라면, 우리는 지금껏 신봉했었던 ‘시장의 우상’을 철거하고, 익숙하다 못해 권태롭기 그지없는 일상을 전복하려는 급진적 시도를 감행해야만 낡아빠진 의사소통의 폐쇄회로에서 탈피하여 낯선 것들이 무궁무진한 언어의 신세계에 다다를 수 있다. 하지만 그 신세계로 독자를 안내해야 할 전위적 문학 작가는 관심의 사각지대에 놓여있다.     
 문화계 전반에 새로운 움직임이 태동했던 20세기 초의 전위문학은 언어의 정상성을 고수하려는 보수적 주류파로부터 눈엣가시로 찍히고 비평 영역에서 뜨거운 감자로 주목받았던 자랑스러운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이에 비하여 작금의 전위문학은 찾아오는 발길이 끊긴 ‘철 지난 유원지’처럼 전락하여 그 존재감을 점차 잃어가고 있다. 그나마 주변부에 위치한 것들에게 민감한 사람들로부터 ‘유난스러운 것’으로 취급될 뿐, 권력의 핵심부로부터 기존 질서를 어지럽히는 ‘불온한 것’으로 인식되지 않은 지는 오래다.
 ‘인생은 유한하고 예술은 영원하다’라는 명제는 부인할 수 없는 공리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여기에서 말하는 ‘영원함’이 ‘항상 새롭다’는 뜻을 함축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예술사에서 기세등등하게 출현했던 모든 신사조는 시간이 흐르고 시대가 변천하면서 또 다른 흐름에 스포트라이트를 내어주고 예외 없이 옛것이 되었다. 문제는 낭만주의나 자연주의 등등의 여타 문예사조는 옛것이 되어서도 인류의 영원한 클래식(classic)으로 애호를 받고 있지만, ‘급진적 해체’를 기치로 내건 전위문학은 당대에만 충격을 일으키고선 시간의 위력 앞에 급속히 시들어갔다는 것이다.
 우리는 앞에서 전위성이 한낱 겉멋으로 치부되는 이 시대에 작가 서준환이 무엇을 말하고자 언어의 기존 규칙을 무너뜨리려는 도발을 행한 것인지 살펴보았다.「수족관」이 대표하는 그의 문학적 기획에서 두각을 드러내는 부분은 언어의 의미와 지시의 연결고리를 파열시켰다는 것이다. 우리의 습관화된 인식주관은 의미와 지시 사이에 항등식을 성립시킨다. 이에 따라 지시에 결부되는 동일성과 의미에 결부되는 유사성도 전체를 나타내는 양적인 차이만 있을 뿐, 기본적으로는 하나의 개념이라고 범주화하는 믿음을 가진다.
 데카르트는「성찰」에서 밀랍 한 조각을 불 가까이에 대본다. 그랬더니 밀랍의 맛과 향기는 사라지고, 빛깔은 변하고, 형체는 사라진다. 원래의 밀랍과 불에 의해 변한 밀랍은 더 이상 유사하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데카르트는 이것이 여전히 동일한 밀랍이라는 사실은 판명하게 인식된다고 언명한다. 동일성과 유사성은 같은 성질이 아니다. 그러므로 언어가 지시하는 대상의 동일성은 유사성과 엄밀하게 구별되어야 한다. 서준환의 소설세계는 양자의 차이에 관한 인식론적 사유를 언어의 교직으로써 현현한다.
 동일성의 붕괴는 이와 연계된 지시적 차원의 해체로까지 파급된다. 지시의 차원에 기반하고 있던 언어는 일대 혼란에 휩싸이면서 현실 논리를 초월하게 된다. 이로써 존재의 피아 구별이 불분명한 환상적 세계가 텍스트에 펼쳐진다. 또 다른 국면에선 유사한 것들끼리의 합성과 복제를 통해 소설의 유기성을 담보하는 모종의 연관 관계가 형성된다. 유사성의 원리에 의거하여 공통분모를 도출한 모티프들은 반복적으로 변주되면서 음악적인 운율성을 고조시킨다. 시장의 우상을 파괴하는 급진적 방법을 통해 지시적 효력이 정지된 언어의 허구성과 현실의 속박으로부터 자유로워진 언어의 음악성을 동시에 담아내는 개가를 성취함으로써 문학실험의 여전한 행위가치를 증명해 낸 것이다.
「수족관」에선 인간의 내면 안에 들끓는 몽환적 욕망을 상징하는 기호들이 언어의 허구성과 음악성 사이의 발산경계에서 분출된다. 욕망의 분출은 우리의 생각을 박제시키는 언어의 억압적 메커니즘에서 빠져나올 수 있게 해 주는 비상구를 터놓는다. 이곳으로부터 규범적 현실을 벗어난 피안의 세계가 개방된다. 전위를 통한 해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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