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9회 한대신문 문예상 대상
제39회 한대신문 문예상 대상
  • 한양대학보
  • 승인 2009.12.06
  • 호수 1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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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상 : 김동수<인문대·국어국문학과 07>

종이상자를 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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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지하철 역 앞에서 친구를 기다리고 있다. 그는 항상 삼십 분에서 사십 분 정도 늦는다. 사실 그 정도면 양호하다. 간혹 두 시간도 말없이 늦는 경우도 있으니까. 그럴 때면  책을 읽거나 MP3를 들으며 그를 기다린다. 그것들도 없어 여의치 않으면 생각을 한다. 눈에 보이는 것으로부터 여러 가지로 엉뚱하게 뻗쳐나가는 잡념들. 지금 내 앞에는 사이좋은 남녀 한 쌍이 앉아 있다. 나는 마주보기가 싫어서 옆으로 비켜선다. 6번 출구 옆에는 사람을 기다릴 만한 공간이 충분하다. 혼자서 서 있는 데는 더할 나위 없다. 비스듬히 벽에 기대 아까 그 연인들을 본다. 익숙한 여자의 호흡. 나는 그녀의 숨소리가 내 귀까지 들려오는 것 같다. 그리고 내가 아는 한 여자를 생각한다. 찬바람이 싸하게 불어온다.
 친구로부터 문자가 와서 연상이 깨졌다. <지하철 타다가 졸아서 잠실까지 왔다. 금방 돌아갈게>. 어쩔 수 없는 놈이다. 심호흡을 가다듬고 이어폰에서 들리는 소리와 사람들의 움직임에 주목한다. 귀로 들리는 소리가 나긋나긋하다.


1

 “대출이 안 되는 데요?”
 “그게 무슨……?”
 아르바이트 여학생은 모니터를 보면서 차분하게 말했다. 내 셔츠에선 땀내가 올라왔다.
 “도서 대출 수 초과라고요.”
 그녀는 읽던 책을 덮고 내가 올려둔 책을 훑어봤다. 나는 그제야 반납하지 않은 책들이 사물함 안에 쌓여있음을 기억해냈다. 일전에 다 가져다 준 줄 알았는데. 그렇다고 친구 학생증을 빌리기도 민망했다. 별 수 없이 책을 가지러 단과대 건물까지 다녀올 수밖에.
 건물 지하에서는 공사가 한창이었다. 사물함 앞에는 보수 장비들이 너저분하게 널려있었고, 접힌 사다리가 철제 사물함을 짓누르고 있었다. 나는 먼지를 털어내고 망가진 자물쇠 번호를 이리저리 돌려보면서 끙끙댔다. 그리고 펜치를 빌려야겠다는 생각이 들 때 쯤, 두 칸 옆에 있는 동기들의 사물함이 눈에 들어왔다. 생각해보니, 이전부터 나는 이곳에 내 짐을 덜어두고 다녔던 것이다. 친구 것이었던 사기그릇과 내가 빌렸던 책들이 눌린 손자국을 갖고 있는 치약큐브와 함께 가지런히 놓여있었다.
 입대하는 날, 훈련소 앞에서 국밥을 먹고 일어서려는데 삭발한 친구의 벗어놓은 노란 단화가 그의 발이 닿을 때 움찔했다. 가족과 포옹하던 다른 동기는 눈이 가늘어지면서 노랗게 웃었다. 몇 년간 한 번도 옷을 새로 산 적이 없었다던 친구는 노래를 부르고 훌쩍 떠났다. 휴학을 한 여자애들도 술에 취해 죽겠단 소리를 가끔씩 하곤 했다. 나는 그녀의 남자친구가 또 군대에 갔음을 깨닫고 한숨을 쉬었다. 그럼 복학생을 사귀지 그래? 그렇게 말하고 싶지만 사래가 들린 듯 헛기침만 계속 나왔다. 나머지는 모두 일을 하느라 바빴다.
 이래저래 책을 반납하러 가기까지는 수십 분이 걸렸다. 이참에 다 반납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가 이어폰 줄에까지 맺힌 땀방울을 보고 오래 전에 빌렸던 소설 한 권만을 들었다.
 햇볕은 여전히 대리석 건물과 바닥을 매섭게 적시고 있건만 도서관 대출은 마감되었다. 지하 열람실에서만 저녁을 먹으려는 사람들이 두세 명씩 올라오고 있었다. 애초에 너무 늦게 학교에 도착했다. 하릴없이 돌아서서 나가려는데 아까의 그 여학생이 뒤에서 말을 걸었다.
 “이 책, 못 빌리셨죠?”
 그녀는 책을 들고 내게 물었다. 그리고 대답을 채가며 이어 말했다.
 “내일부터는 주말이라 도서관도 쉬어요. 저도 읽던 것은 마저 다 읽어야겠으니 모레 정오에 지하철역에서 보죠.”  
 나는 눈을 끔뻑이며 ‘모레, 정오’만 중얼거리다가 간신히 그녀가 뱉어놓은 말을 놓치지 않았다. 그리고 옅게 드러난 하얀 이로만 남은 웃음도 붙잡았다. 익숙한 이국의 노랫소리가 귀에서 맴돌았다. 건물 밖에선 매미가 어찌나 울던지, 혹시라도 저들 때문에 낙엽이 지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미 써진 글은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생각건대 그 때 그렇게 깜빡하지 않았더라도 이야기는 제 궤도를 돌았을 것이다. 그의 뜻을 따라서.
 나는 그날 저녁 부모님의 전화를 받고 화를 낸 뒤 다음날 내내 앓았다. 어지간히 병을 앓지 않던 나였다. 하지만 그날만큼은 온몸에서 나는 식은땀 때문에 돌아눕는 정도밖엔 움직일 수 없었다. 옷과 바닥이 땀에 전 채 일요일이 되었다. 멍한 상태로 꿈과 현실의 중간에 있다가 전화벨 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이번 주 소설 작품은 다 읽었냐는 선배의 전화였다. 잔소리를 듣고 나서야 간신히 도서관 여학생과의 책 약속을 기억해낼 수 있었다. 하지만 어떠한 연락처도, 심지어 이름이나 소속 학과도 몰랐기 때문에 다시 자리에 누웠다. 그리고 왜 갑자기 그녀가 말을 걸어왔는지 뒤늦게 고민했다.

 다음날 아침 문을 열다가 숨이 턱 막혔다. 너구리. 눈을 힘껏 뜨고 입을 꼭 다문 채 속을 알 수 없는 표정으로 그녀가 계단에 서 있었다. 여자는 자기 일이 끝날 때쯤 들르라는 말만 던지고 학교로 향했다. 나는
 ‘거참 귀신같은 여자군.’
 하면서 바닥에 그녀가 놓고 간 책을 집었다. 황당하다보니 차마 무섭단 생각은 하지도 못했다. 나중에 인터넷에나 올려 봐야지, 중얼거리며 문을 닫았다.
 소설책을 거의 다 읽었을 때, 알람이 울렸다. 시계는 네 시 반을 가리키고 있었다. 오전의 방문객이 가져다 준 선물 덕에 뒤늦게 학교에 올라갈 준비를 했다. 한 시간 후에는 문학회의 모임이 있었다. 문학, 이라면 대단히 거창하게 느껴지는데 거기에 會를 붙이다니. 이보다 무거운 동아리가 있을까? 이런 생각을 하며 셋째 달의 신입생이 과방에 홀로 누워있었다.
 눈이 내려도 어색하지 않을 계절의 경계 무렵, 다들 학교생활에 조금씩 익숙해지고 있었다. 점점 인사할 사람이 늘어나고 때론 존댓말과 반말이 헷갈려왔다. 고개를 숙이면서 ‘안녕’이라 인사하고 방금 말을 튼 동기가 나란히 앉은 복학한 선배보다 형 같아서 당황하기도 했다. 방학을 하고서야 알았지만 그새 몇 커플도 생겼었다. 점차 모두가 따로 흩어져 다니기 시작했고 끼리끼리 어울려 다녔다. 애초에 모두란 없어, 손으로 셀 수 있는 여기 우리가 있는 거지, 라며 어린 선배의 부끄러운 말에 그렇군요, 맞장구치면서 밝게 달아오른 얼굴로 어두운 조명을 받았다. 여전히 겨울 외투를 고집했고 까만 코트엔 땀 냄새와 여자애들의 향수에 더해 술 냄새가 들러붙었다. 이젠 돈이 없다며 술걸음으로 둘씩 셋씩 언덕을 올라 과방에 들어갔다. 남은 병을 까며 대부분이 첫차를 기다리는 동안 선배 두 명은 새내기들에게 잔을 권했다. 은근한 분위기에 지쳐있는 동안 첫차 시간이 되어 다들 역으로 자취방으로 사라지기 위해 계단을 내려갔다. 난생처음 취했다가 조금씩 깨면서 배에 신호가 왔다. 나는 계단 중턱에서 놓고 온 것이 있다며 인사를 하고 다시 올라갔다. 변기 위에서 수십 분을 졸았다. 손을 씻고 만사 귀찮은 마음에 과방에 가서 더 자려고 하니 벽에 나붙은 동아리 홍보 포스터들이 눈에 들어왔다. 하나하나 읽으며 발음해보는 동안 지하 과방의 창문 밖에선 눈이 하염없이 쏟아지고 있었다.
 “그러고 나서 잠에 들었죠. 턱이 둥그렇고 기세 좋게 웃는 망아지가 나오는 꿈을 꿨는데, 똑같이 생긴 사람이 흔들어 깨웠고. 그는 바로 전날 술자리에서 고래고래 노래를 부르던 선배였죠. 난데없이 이름을 묻더니 벽보에 적었는데, 그게 바로 문학회였고.”
 퇴근 시간에 찾아간 그녀는 내 기억을 그대로 줄줄 읊었다. 그리고 방학을 맞아 매주 책을 읽고 모이기로 한 것까지. 나는 할 말이 없었다. 그저 내 것이 아닌 어색한 말이 내 입 뚜껑을 열어 젖혔을 뿐이다.
 “대체 당신은 누구죠? 어떻게 나도 잊어버린 것까지 생생하게 다 알고 있는 거죠?”
 “말하자면 긴데요. 나중에 기회가 될 거에요. 그보다 부탁 하나만 들어줄래요?”
 잠깐 비켜달라는 것처럼 대수롭지 않게 말을 하는 그녀를 향해서 미심쩍은 눈초리를 보냈다. 그녀는 한쪽 입 꼬리를 흐리며 반대쪽으로 웃었다. 황금빛이 여자의 머리 위로 스쳐지나갔다.

 숨을 크게 쉬고 강의실 문을 열었다. 다섯 시 반, 정확히 모이는 시간이지만 안에는 학회장과 유일한 동기 하나 밖에 없었다. 그들은 내가 꽤 이른 시각에 왔다며 놀라다가 뒤에 따라온 그녀를 보고 어리둥절해 했다. 새 회원이라고 말하며 이름과 학번을 밝힌 그녀에게 일단 앉으라며 환영한다고 말하는 회장의 얼굴은 당황 자체였다. 나 멀쩡해, 라고 말하고 싶어 하는 것 같았지만 눈빛은 그녀 뒤의 벽을 향하고 입은 가장 익숙한 단어를 골라 쓰면서도 이런 상황에서는 써본 적 없다는 낯설음을 내뱉고 있었다.
 동기 K는 나를 끌고 화장실로 갔다.
 “어떻게 된 거야? 어디서 만났어?”
 “몰라. 나도 이름은 방금 처음 들었어.”
 “사귀는 건 아니지?”
 “우리가 연애를?”
 그래도 불안했는지 그는 어지간히 다짐을 받아두려고 했다. 연애하지 않겠다고, 혹시라도 사귀면 반드시 그날 바로 말하자고. 아무리 사생활에 집착이 심하다지만 이건 좀 너무한 거 아니냐고 말하려는데 그의 눈빛이 너무 진지했다. 남들보다 한 살이나 늦은 동기면서 나잇값을 해야지. 알았다며 안심시키고 강의실로 돌아가 다시 앉았다.
 과 동아리임에도 불구하고 내가 낯선 사람을 데려오니 이야기가 잘 될 리가 없었다. 보통은 소설 소감 정도를 몇 분 말하고 안부 따위를 주고받다가 저녁이나 먹으러 가곤 했다. 예를 들면, “근데 이 작품을 보면 죽은 외삼촌이 원래 축구를 잘했다는 부분이 나오잖아. 그래, 거기 장마동안 외할머니가 손자한테 말하는 부분. 근데 얘가 잘 보면 공격만 한단 말이야. 근데 얘네 어머니는 또 그거 보면서 키퍼가 자빠지는 걸 보며 우스워하면서, 또 괜히 응원 온 여자애들한테 화나 내고. 근데 생각해보면 이게 참 포지션의 비애란 말이야. 아니 근데 원체 키퍼가 남들처럼 공 몰고 헤딩하고 슛하고 이러면 욕먹잖아. 자기 분수를 알라는 눈총이나 받지. 근데 항상 우리는 하나의 팀이라면서, 팀을 위해 힘내자고 말하면서 나 참. 암만 올라운드 플레이니 뭐니 해도 어차피 애초에 주어진 한계가 있는 건데 말이야. 정작 우리 같은 아마추어들한테 그런 걸 도입하면 다들 주목 받아보겠다고 해서 자기 색깔 잃고 자기 위치는 텅텅 비지.” 이 사람은 회장 형이다. ‘근데’가 입에 붙었다. “틀린 말은 아냐. 너 참 어제 축구 봤냐? 와, 어제 한참을 기다렸는데, 중계가 취소되고 죄다 야구만 나오는 거야. 아니 야구는 여덟 팀이고 축구는 열다섯 팀인데 하나쯤은 나와야 되는 거 아닌가 생각하면서 컴퓨터를 켰는데 인터넷이 먹통이데? 아 그래서 유럽 축구는 보자, 하고 새벽까지 기다렸다가 틀었는데, 어휴 구십 분 내내 노 골인 거 있지? 아니 정말 그게.”하고 화를 내는 건 자리에 없는 선배 J다. 회장과 동기지만 한 살 더 많았다. 가끔씩 학회 모임에 들르면 그 자리는 축구관람회가 되곤 했다. 항상 노트북을 갖고 다니며 혼자 키득거렸다.
 하여간 이처럼 문학과는 관련 없는 이야기만 죽 늘어놓다가 배고프다는 말이 세 번 이상 나오면 모든 걸 그만두고 저녁을 먹으러 가곤 했다. 그리고 그나마 쓸모없는 이야기들도 대부분 선배들끼리 주고받고 신입생들은 언제나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이러니 남들이 진지하게 축구감상회(실제론 못하니까), 최후의 잡담회 등으로 명칭을 바꾸길 건의하기도 했다. 그리고 우리 모임엔 치명적인 결함이 또 하나 있는데,
 “인애 씨는 혹시 이 책 읽어왔어요? 이런, 대단하네. 준비가 철저해.”
 여태껏 남자만으로 이뤄진 문학회였다는 것이다.

 그날, 모임엔 넷 외에 더 온 사람은 없었다. 그리고 기존 멤버였던 나를 포함한 세 명은 오랜만에 매우 어색한 토론을 한 시간 가량 지속했다. 새하얗게 지워진 과거의 틈으로 돌아가 여자와 친구를 생각한다는 줄거리의 소설에 대한 대화도 끝나갔다. 회장은 작품마다 비틀즈의 노래가 너무 많이 등장한다고 했다. K는 주인공이 비오는 날 음반 가게에 들러 엉뚱한 소리를 한 뒤 여자와 함께 낡은 영화관에서 영화를 보는 것이 일련의 작업의 연속이라 느꼈다고 했다. 자기는 그렇게 한다면 처음부터 차일 게 분명하다며 덧붙였다. 나는 순대국이 먹고 싶다고 짧게 소감을 밝혔다. 문학회 최초의 여학생 인애는 내 의견에 동감했다. 그리고 거기에 맥주도 생각난다고 했다.
 우리는 강의실을 정리하고 내친김에 국밥집으로 향했다.

 “요즘엔 냉면이 더 어울리지 않냐?”
 “그래도 날이 좀 흐려서 선선은 한데. 그리고 오늘은 신입 회원도 있는데, 겸사겸사.”
 분명 하늘은 흐렸다. 여느 때 같으면 아직도 햇살이 따가울 텐데 먹구름이 잔뜩 껴서 간만에 어둠이 깔린 저녁이었다. 까칠한 천둥소리를 듣겠는걸. 앞에 놓인 순대국 그릇에 후추를 털어 넣으며 회장이 다시 물었다. 
 “그런데 아까 소개는 했지만, 어쩌다가 우리 학회에 들어온 거죠?”
 “맞아, 우리 동아리가 재밌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실제로 도움이 될 것 같진 않은데 말입니다? 게다가 봄에나 잠깐 홍보했지, 타과생이 이런 게 있단 걸 알 수나 있나?”  
 “넌 꼭 형 얘기할 때만 끼어들더라.”
 “형은 무슨. 나이도 같은데.”
 둘이서 괜한 트집을 잡으며 다투는 동안 나는 물만 계속 들이켰다. 땀을 뻘뻘 흘리는 내 옆에서 그녀는 웃으며 말했다.
 “그럼 다음부터 오지 말까요?”
 그 한마디에 금세 조용해졌다.
 “그건 좀 그런데.”
 “그래요, 뭐 딱히 듣고 싶었던 건 아니에요. 너 임마. 얼른 사과해. 나가려면 네가 나가.”
 어쩌면 저렇게 안면을 싹 바꿀 수가 있는 건지. 인애는 둘이 투닥거리는 걸 보며 웃었다.
 “작년 가을이었어요. 친구들과 함께 교양 수업을 들으러 인문대에 드나들곤 했었죠. 그런데 인문대 건물은 캠퍼스 꼭대기에 있잖아요? 그래서 점심시간에 있던 그 수업은 점점 수강생이 줄어들었죠. 물론 제 친구들도 몇 번을 못 버티고 자진 휴강을 하고 밥을 먹으러 다녔어요. 걔들은 연강이라 그 시간 밖에 만만하게 식사할 시간이 없었거든요.(‘출석만 하고 나와서 밥 먹으면 되죠.’ 회장이 깐죽거렸다.) 그에 비해 저는 두 시간 정도 여유가 있었고, 그래도 잠은 시원한 곳에서 자야지, 하는 생각에 꾸준히 출석을 했죠. 사실 당연한 거지만. 그러다 시험을 보고 다음 주에 연달아 세 시간 보강을 해도 괜찮겠냐고 선생님께서 물으셨죠.(‘안 돼 안 돼. 어림없다고 말해줘요.’ ‘아 좀! 끝까지 듣자.’ K가 화를 냈다.) 빠질 사람은 조용히 자기 시간에 맞춰 가면 된다고 하셨고.(‘그럼 전 빠지겠습니다.’ ‘어휴.’) 저는 전공 강의 들으러 한 시간 반 정도만 더 있다 가야지 하고 생각했는데, 그만 또 여지없이 잠들어버렸죠. 그런데 깨워줄 사람이 없다 보니 강의가 다 끝나고도 한참을 더 엎드려 있었어요. 나중에는 경비 아저씨께서 순찰을 돌다 깨워주시더군요. 창밖엔 온통 어둠만 덥수룩하게 깔려 있었고, 머릿속에서는 ‘징-’하는 소리가 계속 울렸어요. 그렇게 피곤한 몸을 이끌고 터벅터벅 엘리베이터 앞까지 걸어가 버튼을 누르는데 옆에 이젤이 있는 거 있죠? 좀 유치한 그림과 함께. 이건 꽃이라고 그린 건가. 그렇게 정신을 차리고 보니 사방에 스무 개 남짓한 이젤이 가지각색의 그림을 업은 채 둘러쳐 있었어요. 목탄으로 그리다 만 무시무시한 장승, 퇴색한 덕수궁 돌담길, 비 내리는 도시 풍경, 건방진 눈망울을 치켜뜨고 있는 도깨비……. 더 가까이 다가가서 보니까 글씨가 깨알처럼 적혀 있었어요. 시화전이었던 거죠. 그중에 별밤을 노래한 시의 한 문장만 눈에 띄더군요. 정말 달만 보고 가면 어쩌나. ‘가을밤’이란 말이 헛된 게 아니란 것을 그 날 별이 다 떨어진 옥상에 올라 깨달았죠. 나는 보이는 걸 피하고 있진 않은가. 사람들과 내 미래를 생각하며 그 말만 계속 곱씹어 봤죠.”
 그 후 그녀는 학교 게시판에서 시화전의 주체를 알 수 있었다고 한다. 누가 ‘이따위 중학교 애들 수준’을 운운하며 시화전의 전체적인 수준에 실망이란 글을 강한 어조로 올렸고, 국문과를 비난했다. 그 글에 과 학생회 대표는 댓글로 미안하단 말과 함께 시화전은 xx 문학회 소관이니 국문과와는 무관하며 거듭 죄송하다고 말했다. 그녀로서는 그런 모습이 어이가 없었지만 그래도 동아리의 이름은 잊지 못했다고 말했다.

 “형, 오늘도 그 사람 올까요?”
 “누구? 지난번에 네가 데려온 사람?”
 “예. 인애 씨요. 아니 선배라고 해야 하려나?”
 “모르겠다. 그날 밥 먹고 얘기만 죽 듣다 보니까 정신이 없어서 그 뒤론 아무 것도 못 물어봤네. 근데 넌 왜 몰라? 걔 도서관에서 일한다며? 안 가봤어?”
 “이상하게 찾아가보긴 싫더라고요. 싫다기보다는 꺼려진단 말이 맞겠죠. 기분이 이상해요. 처음 말했을 때도 저에 대해 다 알고 있다고 했잖아요. 마주보면 좀 서늘하기도 하고.”
 “그런 게 어디 있냐? 네가 여자랑 말하는 게 어려운 거겠지. 거 참. 그리고 그렇게 생각하는 놈이 처음 온 사람이 얘기하는 거 듣다가 그런 소릴 한 거냐? 앞으로 별 거 아닌 말 할 땐 길면 길다고 말하고 시작해주세요, 라니. 게다가 들어보니 너보다 선배더만.”
 “아니에요. 일단 부끄러워하는 건 아니에요. 형보단 여자애들이랑 얘기 많이 하면서 컸어요, 나름대론. 그리고 그 말 한 건 글쎄요. 왠지 제 말이 아닌 것 같다고나 할까. 저도 모르게 나가서 놀랐어요. 무엇보다 형도 그때 졸려고 했잖아요.”
 “좀 길긴 길었지. 근데 있잖아 영한아? 그래도 가 봐.”
 잠자코 있던 K가 뒷문을 보며 말했다.
 “근데 정말 오면 어쩌지?”

 정말 왔다. 정확히 말하면 모임이 다 끝나고 뒤풀이 후, 모두를 지하철역까지 배웅하고 돌아서는데 뒤에 있었다. 가장 미안했던 건 이 주 전에 데려와 한 식구라고 해놓고 지난주에 연락도 없이 쏙 빼놓고 엠티를 간 것이지만, 그 정도는 알고 있을 것 같았다. 오히려 좀 전 모임에서 그녀를 두고 꺼려진다고 했던 게 더 마음에 걸렸다. 그리고 분위기를 봐서는 역시 알고 있었다. 때문에 “엠티 잘 다녀왔죠? 비는 좀 왔었지만.”이라고 그녀가 먼저 말걸 때 놀라지 않고 덜 떨어져 보이지만 웃을 수 있었다.
 그녀는 늦은 시간이지만 어딜 가자고 했다.

 영화는 정말 지루했다. 간간이 말장난이 나오곤 했지만 너무 평범한 주제를 직접 말하고 있었다. 혹은 너무 막연하고 쓸쓸하게 묘사되면서 감정이 움틀 때쯤 맥없이 끝나버렸다. 옴니버스식이라 각각의 작품이 감독들의 의도를 담기에 버거워보였다. 왜 이런 영화를 보러 오자고 한 걸까? 그녀와 나는 종로까지 걸어가기로 했다.
 “그런데 왜 뜬금없이 영화를 보자고 한 거죠?”
 “그러게. 뭐 때문에 여기까지 혼자 보러 다녔던 거니?”
 어- 하면서 말문이 막혔다. 확실히 자기가 나보다 선배인 걸 알고 있었다. 그리고 내가 종종 남들 눈을 피해서 사람들의 때가 별로 묻지 않은 영화를 보러 찾아다녔던 것마저도 알고 있었다. 학생들이 만든 흑백의 독립영화, 비평 수업 시간에나 종종 이름을 들을 수 있는 외국영화, 상영관이 적은 인권영화. 이건 뭐 각본대로인 스포츠인가.
 “그래도 네가 걔 팬이기에 이걸 보자고 한 건데. 여기서 잠깐 나왔던 장면이 그 여자 배우 스크린 데뷔작 아냐?”
 내가 보자고 안 했어도 어차피 넌 혹해서 보러 왔을 걸, 이라고 말하는 그녀에게 뭐라 대답해야 하는 걸까. 소리를 지르고 도망을? 아니면 어깨를 꽉 부여잡고 흔들면서 귀가 멎도록 고함을 쳐야 하나? 놀라는 것에 지쳐서 별 생각이 다 들었다. 심지어 예전부터 날 스토킹한 건가란 생각마저 들었지만, 글쎄? 그건 좀 아닌 것 같다. 귀신에 홀린 듯 뒤따라 걷다가 그녀의 뒤통수에 턱을 부딪혔다. 인애가 걷기를 멈춘 곳은 아무런 느낌을 주지 않는 회색 건물이었다. 그녀는 앞으로 학회 모임에서 종종 보자며 여기가 자기 집이니까 따로 연락하진 말고 무슨 일 있으면 찾아오라고 말했다. 굳이 연락은 할 필요 없다. 그러니 갑자기 찾아와서 미안할 거 없다. 네 성격을 파악하고 있으니, 네가 올 때쯤은 항상 집에 있을 것이라면서. 나는 영문도 모른 채 닫힌 건물 앞에서 밤하늘만 바라보고 한참을 섰다. 텅 빈 하늘에 가는 금귀고리처럼 달만 우두커니 떠 있었다. 

 방학이 끝나는 팔 월 마지막 주까지 내내 바빴다. 인애는 말한 대로 모든 모임에, 심지어 술에 취해 문학회원들끼리 갑자기 모였을 때도 어디서 알았는지 조용히 와서 테이블에 참석했다. 그녀는 거기서 학회집 같은 걸 만들어보는 것이 어떠냐고 말했다. 우리는 연례행사 급 시화전도 참여 부족으로 항상 한두 명이 도맡아 했다는 문학회였다. 하지만 무리라고 생각한 나와 달리 대다수가 찬성했다. K는 일다운 일이 생겨서 좋다고 말했다. 이게 가능할까요, 묻는 내게 회장 형은 드디어 우리 것을 위해 힘쓸 수 있다고 하며 기분 좋게 웃었다.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뭐 어때, 환경을 해치는 일도 아닌데. 나는 사실 예전부터 하고 싶었어. 힘든 일은 아니잖아, 그렇지? 나중에 서로를 기억할 수 있는 기념비가 될 거야. 하나같이 신문이나 책을 읽고, 밑줄을 긋고, 이력서를 들면서 동의했다.
 물론 그동안 만들어온 성격이 어딜 가는 건 아니었다. 릴레이 글짓기를 기획했을 때, 한 달은 묻혀있었다. 어린왕자에 나오는 여우를 주인공으로 뒷이야기를 써보는 거였다. 그렇게 잊혀 있다가 누군가가 ‘여우는 어린 왕자를 찾아 세계를 돌아다녔다. 겨울이 오고 언덕에서 잠이 든 그의 몸에 눈이 내렸다.’라고 시작하자 사흘이 채 되지 않아 여러 글들이 이어졌다.
 ‘하지만 여우는 눈이 똥 같다고 생각했다. 그의 꼬리가 축축하게 젖고 특이한 냄새가 나기 시작했다. 그는 조심스럽게 꼬리를 코에 대고 킁킁 거려 보았다. 기절.’ ‘정신을 차려보니 옆에 겨울잠을 자다 나온 토끼가 벌렁 누워있었다. 오 마이 래빗. 불쌍한 그 이름.’ ‘은 신경도 쓰지 않고 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 단숨에 먹어치웠다. 저 멀리 한 소녀가 보였다.’ ‘그녀의 이름은 앨리스. 그녀는 물레방앗간 옆에서 섧게 울고 있었다. 여우는 벌겋게 뛰는 심장소리를 들으며 조용히 다가갔다.’ ‘마을에 산적이 들었어요. 그러나 떨고 있는 그녀를 바라보는 여우의 눈빛이 더 도적 같았다. 그는 이미 늑대였다.’ ‘(이게 아니잖아.) 다시, 여우는 전사의 기상으로 산적 굴로 찾아가 날렵하게 모두를 패퇴시켰다. 서슬어린 그의 눈빛엔 첫눈에 얼어버린 샘물 같은 소녀의 눈물이 어려 있었다.’ ‘사건을 해결한 여우가 길을 떠나는데 소녀가 뒤따라 왔다. 뭐라고 감사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멀리서부터 뛰어온 듯 그녀는 얼굴에 홍조를 띤 채 숨을 헐떡였다.’ ‘그럼 하지 마. 쿨하게 돌아선 그의 뒤로 석양이 비추고 있었다.’
 이런 걸 학회집에 넣을 수는 없었다.

 릴레이 소설 다음으론 시 이어쓰기도 시도했다. 릴레이 소설과 비슷했지만 얼핏 하이퍼텍스트 느낌이 났다. 백일장도 계획했다. 이건 특히 호응이 좋았다. 열흘 동안 강변, 공원, 고궁, 남산을 모두 가보기도 했다. 다만 주제를 너무 보편적인 것으로 잡았다는 점이 문제였다. 첫사랑의 신산함과 이별 후 그리움. 결국 모두가 정말 소설을 쓰는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서울 시내에 여학생 하나에 열 명이 남짓한 남자들이 서울 시내를 활보하며 벤치에서 작문을 하는 진풍경을 연출했다. 
 
 개강이 얼마 남지 않았을 때, 다들 좀 더 진지해져야 한다는 위기의식을 가졌다. 작년 수상 작가로 이름을 올린 사람들 중 몇 명을 뽑아서 그들의 작품을 분석하는 것은 어떠냐는 의견이 나왔다. 계획은 이랬다. 먼저 텍스트를 컴퓨터로 전산화한다. 다음엔 작은 것부터 시작해서 특정 프로그램을 이용해 어휘의 가지 수를 알아내고, 각각을 빈도순으로 나열한다. 그리고 어휘의 평균 글자 수와 문장의 평균 단어 사용 빈도를 자료로 만들어 본다. 또 외래어와 한자, 특수기호의 활용 빈도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프로 시각화해서 작가나 시기 별로 비교해보면 무엇이라도 보이지 않겠느냐, 외국에서는 이를테면 셰익스피어 작품의 진위 논란에 이런 방법을 사용하는 경우도 있다고 했다.
 작은 문학회 차원에서 하는 작업치고 노력에 비해 얼마나 의의가 있을 것인가, 우리로서는 무리가 아닌가, 하고 있을 때 또 다른 의견이 나왔다. 그보단 명작 중에서 기억에 남을 만한 구절을 뽑고 자기 이야기를 써보는 건 어떨까? 명작의 기준은 누가 세우는 것이냐는 논란이 잠깐 있었지만 우리는 저마다의 명구와 작품에 부끄럽지 않다, 부정하며 자신들을 거기에 맞춰보기 시작했다. 문학회란 부끄럽게 벌거벗은 나를 나르시시즘으로 감싼 채 시샘 어린 눈으로 천재들의 숨결을 훔치려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적이 학회의 본질과 어울리는 기획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 책을 읽으면서도 허전했던 것은 문학회가 독서토론회나 스터디와는 다르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첫 수업을 하루 앞두고 나는 인애의 집 앞에 서 있었다. 그녀는 <구절 글짓기>라는 아이디어가 마음에 안 들었던 걸까? 의견이 나온 시점부터 방학이 다 지나도록 어떤 말도 없이 무신경하게 자리를 지켰다. 본디 조용하긴 했지만 분위기가 달랐다. 이전에는 모든 걸 다 알고 관찰하는 것이라면, 이제는 조용히 무언가를 체념해가고 있는 느낌마저 들었다. 가끔 말을 걸면 조용히 눈으로만 웃었다. 자살하기 전날 밤 나를 만나 빙글거리던 한 남자가 생각났다. 무슨 일이라도 있어요? 인사를 하면서 그녀가 열어준 문으로 들어갔다.
 아직 예전의 꺼림칙한 기분이 가시지 않은 채로 거실에 앉았다. 실내에 다른 가족들은 없는 것 같았다. 아직 해가 일찍 질 무렵은 아니어서 오후지만 저녁은 아니었다. 닫힌 창문 위에 커튼. 그 틈으로 햇볕이 미약하게 들어왔다. 짙은 갈색 바닥에 책 몇 권과 노트, 유난히 많은 낱장의 종이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다른 가구는 없었다. 텔레비전이나 컴퓨터도. 전화기는 한 대 있었지만 코드가 뽑힌 상태였다.
 그녀는 얼마 안 되는 짐을 치울 생각도 않은 채 말문을 열었다. 나는 그녀보다도 더 이상한 그 집의 분위기 때문에라도 말없이 그녀의 말에만 집중해서 듣게 됐다. 뭐라고 말하든 반박하지 말자. 듣고 사실이라 믿자. 그렇게 생각하니 그 말들이 의외로 담담하게 들렸다.
 인애는 사람을 읽는 능력을 갖고 있었다. 그녀에 의하면 누구든 두루마리처럼 풀어지는 이뤄져 있다고 한다. 그리고 그녀는 도서관에서 일을 하면서 어느 날 그게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계기는 모퉁이에 적혀있던 글과 무의미한 낙서들이었다. 개인의 사생활(연기야 내일 영구마트 앞 다섯 시까지), 원본 텍스트에 대한 밑줄과 설명(여기서 관리인이 수상하지? 범인은 노인이야), 비평(사람들은 이 작가가 너무 낭만적 세계를 추구하는 이상주의자라 말하지만 그들은 언제나 그보다 먼저 현실에서 도피해왔다. 혹은 힘에 빌붙거나.), 자신이 생각한 다른 결론 등 잡담들이 깨끗했을 텍스트를 혼란스럽게 만들고 있었다. 그리고 엉뚱한 것들이 텍스트를 더 풍성하게 구워내고 있었다. 재밌는 낙서를 찾아서 보면 옛날에 빌렸던 사람들의 오래된 글씨체까지도 알아낼 수 있었으며, 나중에는 글씨체만으로도 관심분야의 책들에서 누가 무엇을 빌렸는지 추측하기도 했다.
 그런 탐구를 몇 달 간 계속하다 보니 사람들도 그렇게 범람하는 텍스트로 보였다. 글자가 미어질 듯 들어간 사람도 있고, 내뱉고 다시 들이마시는 사람도 있었다. 처음에는 호기심에 그것들도 읽기 시작했지만 자신이 읽어내는 글자 하나하나가 진실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그렇게 얻어낸 일련의 이야기를 당사자에게 말해주면 다들 소스라치게 놀라워하며 그녀를 피하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그녀는 자신의 능력이 무엇인지 분명히 인지했다.
 “너는 달랐어, 남들과. 놀라기만 하진 않았지. 눈에는 두려움이 어렸지만 그 사이에는 안심이 내려앉았어. 이유가 뭘까? 호기심이라면 모르겠지만, 왜 너는 그 순간에 전혀 다른 느낌을 준 거지?”
 나는 뭐라고 대답할 말을 떠올려봤지만 소용없었다. 내가 그랬던가? 그때 두렵고 놀라긴 했지만. 어차피 기억할 만큼 의식했더라도 딱히 이유가 있을 것 같진 않았다. 때론 몸이 내 의지대로만 움직이는 건 아니니까. 그녀 말대로 사람이 글자고 문장으로 이뤄져있다면 그 사이사이에 풍광과 타인의 손길이 틈틈이 깃들 테니까.
 “그래서 난 너에게 나를 읽을 수 있도록 하겠어. 너는 지난 사람들과는 다를 거야. 거기에는 내 여동생, 고등학교 친구, 대학 동기, 남자친구, 그다음 남자친구, 또 기억하지 못하는 누군가도 있어. 넌 그들처럼 나라는 텍스트를 읽고 듣고 접고 만지면서 받아들이면 돼.”
 그녀의 가슴에선 문자들이 가지를 치며 자라고 있었다. 가지의 뿌리는 허리를 타고 발등까지 뻗어져 내려간 후 발바닥을 휘감았다. 바른 쪽 손끝에서는 글자들의 토씨 하나가 날개를 펴고 나비처럼 팔랑거리며 주변에서 맴돌았다. 그녀가 뒤돌자 드러난 등에선 기호들이 쏟아져 내렸다. 글씨들은 둔부 바로 위 허리에서 왼쪽으로 실개천처럼 흐르고 있었다. 나는 눈앞에서 자연의 조화로운 모습을 흉내 내는 글자들을 보면서 충격에 눈을 비볐다. 이건 내가 예전부터 알고 있던 바로 그 글씨체다!
 나는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그녀에게 다가가 손을 뻗었다. 내 손이 어깨에 닿자 그녀는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고, 나는 설명을 듣지 않아도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아가고 있었다.  
 어린 시절, 계단이 높고 비좁은 전세방에 살았다. 아버지는 일을 마치고 돌아오면 연탄을 때러 지하로 내려갔고, 물과 밥이 전부인 식탁이었지만 어머니는 장을 보러 나갔다. 눈이 내리지 않아도 추웠던 그 시절, 형은 꽁꽁 언 계단에서 자주 미끄러졌고 이마를 몇 바늘이나 꿰맸다. 나는 집에서 다친 형의 얼굴을 바라봤지만 형은 조용히 누워만 있었다. 어머, 애들만 집에 있네. 네 동생은 자고 있니? 가끔씩 마주치던 성격 좋던 주인아주머니는 형과 나를 착각했다. 어린 형제는 뒤바뀐 키와 덩치를 갖고 있었다. 형은 그럴 때마다 나를 찌륵찌륵 건들곤 했다. 그래도 크게 다투는 일 없이 작은 형과 어린 나는 어머니를 기다렸고 반갑게 맞았다. 그리고 어느 날 어머니는 갱지를 한 보따리 사오셨다. 혹은 어디서 가져오셨는지도 모른다. 아직도 그때 그 감촉을 잊지 못한다. 처음엔 거기에 뭘 하기보다는 만지는 것 자체가 좋았다. 며칠이 지나서야 형이 깎아준 연필로 종이에 그림을 그리다 잠에 들곤 했다. 그러다 일어났을 때 이마에 붙은 종이.

 그녀에게선 그런 종이의 감촉이 느껴졌다. 부서지는 파도 소리가 들렸다.


2

 “오랜만이다. 잘 지냈니?”
 “저야 뭐- 그대로죠. 어디로 가면 되요, 이모?”
 “요 앞에 있는 차야.” 검은 세단의 트렁크가 열렸다.
 인애는 차에 짐을 실으면서 물었다. “애들은 집에 있어요?”
 “응- 아니. 희진이는 집에 있는데 경준이는 어디 나갔어.” 
 “어디를요?”
 “글쎄, 어디 서점이나 도서관, 그런 데 갔겠지.”
 “둘 다 얼굴도 못 본지 한참 됐네요.”
 “그래. 이제 가서 봐야지. 짐 다 실었지? 출발하자.”
 차가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집이 생각보다 더 크네요.”
 “이모 집, 꽤 근사하지?”
 “이런 도시에서 정원 딸린 집이라니, 세상에!”
 소녀가 하얀 현관문을 열었다. “어- 언니 정말 왔네?”
 “응 희진아. 진짜 오랜만이다 야.”
 “이리 줘. 같이 옮겨줄게.”
 “그래. 네 방에다가 좀 갖다 놔라. 어차피 며칠 동안 같이 있을 거니까. 난 주차 다시 하고   들어갈게.” 여자가 차를 보며 찡그렸다.
 이 층으로 올라가면서 희진이 말했다.
 “근데 언니, 진짜 뜬금없다.”
 “어? 뭐가?” 인애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 갑자기 와서?”
 희진이 한숨을 쉬고 고개를 흔들었다.
 “그래, 몇 년 동안 그렇게 오라고 말해도 안 오다가 이틀 전에 갑자기 전화해서 ‘나 좀 있으면 너 보러 갈 거야’ 라니. 이제는 내가 바쁘단 말이야.”
 “미안, 미안. 그래도 편지는 자주 했잖아.”
 “<안녕, 새 학기다, 밥 잘 챙겨 먹고 감기 조심하고 나중에 또 봐> 같은 편지가 대부분이었잖아. 그것도 벌써 이 년 전이 끝이다. 언제는 떠나는 거 그렇게 아쉬워하더니…….”
 “진짜 미안. 솔직히 그동안 너무 정신이 없었어. 정신이 없어서 기억도 잃어버릴 것 같아.”
 “기억 잃는 건 영화에나 자주 나올 것 같은데. 일단 짐부터 놓고 얘기하자.”
 희진이 방으로 들어가 여기저기 쌓인 옷가지와 책 더미를 벽장 속으로 밀어 넣었다. 가방을 구석에 내려놓고 인애도 그녀와 함께 방을 치웠다. 책상에는 개구리 인형이 배꼽에 시계를 달고 있었다. 펼쳐진 책들에는 독일어나 영어가 쓰여 있었다. 인애는 책장에 꽂힌 순서에 맞춰서 조심스럽게 책들을 자리에 꽂아 넣었다. 먼지가 나서 창을 열었다.
 벽에는 먼지 쌓인 노란 액자가 걸려 있었다.
 “와- 이건 한국에 있을 때 같이 찍은 사진이잖아? 너 초등학교 졸업도 하기 전이네?”
 인애는 액자 위의 먼지를 입으로 불면서 살살 털었다. 먼지가 사진 위로 떨어졌다.

 영한은 인애의 과거를 가만가만 보고 있다. 호기심에 한 번씩 손으로 쓸어보기도 한다. 이제 처음의 떨림은 없다. 맥박질이 서로 엉키는 것 같다. 그는 곳곳을 탐색하더니 머리를 숙이고 바람을 가볍게 불었다. 피부 끝의 솜털들이 곤두서는 느낌이다. 누군가에게 미안할 만큼 행복하다. 이 구절이 그가 움켜쥔 그녀의 첫 문장이었다. 청동의 상 같은 그녀의 가슴 위로 고고학자의 숨결이 닿았다.
 글자는 쉴 새 없이 변했다. 그러면서도 몸 끝에서부터 목적지를 갖고 꾸물꾸물 몰려들었다. 그는 예전부터 들려오던 소리가 더 커지고 있음을 느꼈다. 그리고 그가 글자를 선택하면 할수록, 엉뚱하게 달아나버리는 내용에 맞춰 다른 소리들도 깨어나고 있었다.
 너도 다를 게 없는 걸까. 안타까운 목소리로 그녀가 땀이 흥건해진 그로부터 떨어지려고 할 때 지직-거리던 영상이 선명해졌다. 둘의 눈이 마주치는 지점에서 비춰지던 반투명 영상 위로 피 묻은 여자의 허벅지가 떠올랐다. 고등학교의 낡은 체육관 안이었다. 녹슨 바벨과 담배꽁초가 바닥에 널브러져 있다. 찢어진 그물 사이로 비어져 나온 공들은 껍질이 벗겨졌다. 역기가 없는 벤치프레스 위에 인애와 남자가 포개져 있었다. 뜨겁고 빨간 핏방울이 시트를 적시고 바닥으로 뚝뚝 꼬리를 끌면서 떨어졌다.

 그날 이후, 정확히 말하면 그 피냄새가 풍기는 영상을 본 이후로 그녀는 몸의 변화를 느꼈다. 타인의 비밀을 엿보던 창이 사라졌다. 몇 번이고 시도했지만 단 하나의 글귀도 그에게 오지 않고 점점이 흩어졌다. 힘을 잃은 그녀는 도리어 구토가 치밀어 올라 머리카락을 지탱할 기력조차 빼앗겨 버렸다.
 그녀가 사흘 밤낮을 고열로 앓는 동안 그녀의 어머니가 와서 딸의 병간호를 했다. 인애가 드러눕고 가장 먼저 한 일은 전화를 연결한 것이다. 이때까지 훤히 보였던 세계가 해가 떨어진 산처럼 느닷없이 어둑해졌다.
 전화를 연결한지 한 시간이 채 되지 않아 벨이 울렸다. 잘 지내냐. 웬일로 전화가 다 된다니? 꼬박꼬박 전화를 걸었던 것처럼 시간은 네 시 정각을 가리키고 있었다. 이게 다 코드를 꽂았기 때문이다.
 이게 다 너 때문이야. 그녀가 머리맡에 서 있는 영한에게 말했다. 그는 침묵했다. 너무 많은 것을 봐버렸다. 너무 많은 사실을 알게 되었다. 너무 뻔한 결론에 치닫게 될 것 같았다. 그래도 확신이 서지 않아 쉽게 말을 할 수 없다. 그의 머릿속에선 잊고 있던 기억이 유령처럼 되살아나 어둠 속에서 손을 흔드는 것 같다. 나는 말해야 한다. 아니, 말로썬 부족하다.
 인애는 그가 고민하는 것을 보며 속이 탔다. 첨단 박물관의 오래된 토기처럼 어색한 정사 뒤에 피어난 낯선 기억. 그녀는 그 기억의 뒷모습이 궁금했다. 미치도록 새짤갛게 찢어진 기억. 남자의 날카로운 피부와 육중한 무게감. 이 모든 생소함이 그녀를 압박했다. 그리고 그녀에게서 영한에게로 옮겨진 능력이 그로 하여금 나머지 조각들을 샅샅이 훑고 연결 짓도록 만들었을 것이라는 사실이 그녀를 더욱 지치게 하는 요인이었다.
 네 어머니께서 오실 테니 나가봐야겠다. 영한은 인애의 어머니의 규칙적인 외출 패턴까지 알아냈다. 그런 식으로 그녀가 혼자 남아 있을 때에만 홀연히 나타났다가 퇴장했다. 인애는 방에 덩그러니 남아 멀어져가는 발소리를 들었다.

 짐을 푼 다음날, 라인 강을 보기 위해 마인츠로 향했다. 대성당과 구텐베르크 박물관은 영란도 처음이었다. 조카 덕분에 이제야 여길 와 보네. 기념비적인 성경을 보며 그녀가 말했다. 벌써 좀 피곤해요. 안 돼, 그러면. 시내에서 이른 점심을 먹고 가자. 그녀들은 오전을 꼬박 시가지에서 보냈다.
 경준이 때문에 걱정이야. 영란은 저 멀리 있는 포도밭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차창으로 전해지는 도시의 이미지는 언제나 조용하고 야릇하기 마련이지만, 때론 싱그러움이 터지는 소리가 유리 앞에서 톡톡 부딪치기도 한다. 무슨 걱정이요? 인애는 창에 맺힌 뤼데스하임의 경치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물었다. 너무 말이 없잖니. 식사도 잘 안 하려고 하고. 방에서만……. 하긴 어제도 만났을 때 눈인사만 대충하고 자기 방으로 들어가긴 했네요. 항상 그래. 먹구름처럼. 차라리 그게 낫지. 시원하게 쏟아지거나 콰광- 하고 천둥이라도 칠 텐데. 찔끔 찔끔 내리는 비처럼, 괜히 주변사람 후텁지근하게나 만들고. 혹시 연애하는 건 아닐까요? 전혀. 그랬으면 오죽 좋겠니? 연애도 생기가 있는 사람들이 하는 거지. 하도 제 방에만 있어서 여자 친구를 모셔다 놨나, 하고 희진이는 말하던데. 아휴. 그럼 이모, 경준이한테 사춘기가 늦게 온 거 아닌가요? 글쎄다. 한국에서는 멀쩡하던 애를 무리해서 데려왔는지 원-. 다시 보내볼까?
 차는 언덕을 올라갔다. 간간이 고개를 내젓던 영란이 다시 물었다. 그런데 인애야, 너 왜 몇 년 전에는 여기 와서 살 것처럼 얘기했니? 네? 그녀는 뜻밖이라는 듯이 대꾸를 못했다. 아니 왜, 사 년 전쯤인가에 언니가 전화로 묻더라고. 너 여기 보내서 조용히 살게 하면 어떻겠냐고. 무슨 일 있었니? 예? 그녀는 벌어진 입술 속에서 무언가 뒤섞여서 뚝뚝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흥흥?”
 인애는 얼굴에 인상을 쓰면서 눈을 떴다. 그녀를 깨운 냄새가 비스듬히 열린 창문을 통해 들어오고 있었다. 종이가 타는 냄새. 그녀는 머리를 긁으며 창가에 섰다. 그 아래에서 경준이 책을 조심스럽게 태우고 있었다.
 “뭐하는 거야?”
 그녀가 묻자 경준은 말없이 고개를 들어 위를 봤다. 잠시 동안의 정적. 그가 계속 멍한 눈으로 응시하기만 하자 그녀는 좀 더 소리를 높였다.
 “뭐하고 있는 거냐고!”
 그러자 그는 눈을 가늘게 뜨더니 손가락을 입에 대 ‘조용히 해’라고 한 뒤 손을 들어 내려오라고 까딱였다. 그녀가 방 안으로 “희진아…”라고 말하려고 하자 경준은 손사래를 쳤다. 검지로 인애를 딱 가리켰다.
 “왜 오라고 한 거야? 무슨 일인데?”
 경준이 방문을 열자 그녀가 소곤거렸다.   
 “쉿! 아빠 깰 거야. 할 말이 많은데 시간을 아껴야지.”
 무슨 할 말? 그렇게 묻는 인애를 뒤로 하고 경준은 다른 책 하나를 꺼내어 표지를 뜯어내고는 속지에 불을 붙였다. 큰 불이 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태우면서 마지막엔 비벼서 껐다. 타다 남은 책이 밤바람에 나풀거렸지만 별로 세게 불지 않아 금세 조용해졌다. 마치 담배처럼 해치우고 나서 그는  그녀의 질문과 상관없이 말을 이었다.
 “나는 이렇게 새 책을 사면 예전 책을 태워. 한 달에 한 번일 수도 있고, 보름에 한 번일 수도 있고. 이 책들이 나를 잡아먹기 전에. 하지만 아무리 낡아도 태우지 않고 버리지 않는 책들이 있어. 내 책상 밑의 낡고 빛바랜 책들.”
 경준은 그곳을 가리켰다. 두꺼운 판자 아래 꽤 널찍한 공간이 있었다. 서랍을 좀 더 밖으로 밀어놓고 의자를 뺀 그곳에는 종이가 누런 책들이 많이 쌓여있었다. 책상 밑 책꽂이에 다 넣지 못해 밀려나온 것들이었다.
 “그 책들은 내 것이 아니야. 어떤 형이 내게 맡긴 거야.”
 “그 사람이 누군데? 이걸 한 번에 여기까지?”
 인애는 빼놓은 의자에 엉거주춤 앉아 물었다.
 “아니 그렇진 않지, 물론.” 흐트러진 책을 다시 다듬고 나서 그도 침대에 털썩 앉았다.
 “나는 희진이랑 다르게 조금 더 커서 여기 왔지. 기억해? 너랑 나는 막 중학교 올라가서 학교에 적응하느라 정신이 없고, 걔는 아직 초등학교 저학년이었잖아.”
 “그래. 우리 졸업식 때 셋이서 사진 찍기도 했지.”
 “맞아. 걔는 그 시절이 좋았을 거야. 그러니까 제 졸업도 아닌데 사진을 걸어놨겠지.”
 경준은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근데 말이야, 나는 그렇지 않았지. 그래, 그 빌어먹을 시기에 애들한테 맞는 게 질렸지. 등굣길에 한 번, 교실에 들어가서 아침 인사로 한 번, 짜증난다고 또 맞고 아까는 수업시간에 지들이 혼났다고 또 한 번. 그런 식이지. 옆구리, 허리, 어깨, 뒤통수, 종아리… 안 아픈 곳이 없었지. 빵을, 담배를 내 돈으로 사다 줘야 하고. 그런 지옥 같은 곳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독일행이 천운이었지. 사춘기? 그런 게 생겨날 여건이나 됐을까?”
 그를 보며 인애는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저런 말을 아무 흥분 없이 무미건조하게 말할 수도 있구나 하고. 낯빛 하나 붉어지지 않고 어색한 기억을 더듬듯이 그는 계속 말했다.
 “하지만 왜 그런 건지… 사 년 전부터 절대 그리워하지 않을 그곳이 그리워졌어. 아무리 열심히 공부하고 말하고 생활해도 자꾸 겉돈다는 기분을 느낄 수밖에 없었지. 남의 말이 자꾸 내 주변을 맴돌고 있는 것 같았어. 그래도 어쩔 수 없었지. 나는 참는 것에 익숙해져 있으니까. 고민보단 받아들여야 하니까. 그렇게 이 년을 보냈어. 허전함 속에서.”
 “사 년 전이라…….”
 “그래, 네가 이곳에 올까 했던 그 때. 어쨌든 이 년 전에 나는 이 책들의 주인을 만났어. 첫날 우리 집에 오면서 건너편에 좀 떨어져 있는 집 봤니? 그 집에 사는 가족들도 한국인들이야. 나는 해가 떨어지기 전에 종종 그 방향으로 산책을 가곤 해, 지금도. 언젠가 거길 지나서 가고 있는데 한 남자가 말을 거는 거야. 어깨는 넓고 키는 작았는데, 얼굴을 보니 나보다 몇 살 더 많아 보였어. 그는 어기적거리며 희한하게 걸으며 내게 다가왔어. 저기 사는 분이죠, 라고 나한테 인사 겸 몇 마디를 하고 겸연쩍은 표정을 짓더니 묻더군. 자기 책을 집에서 자꾸 버리려고 하는데 잠시만 맡아줄 수 없겠냐고. 어릴 때 집에서 만화책을 모아 나 몰래 버리던 기억이 나서 그러마고 했지. 오랜만에 얻은 뿌듯함에 이상함을 느꼈어. 전혀 그럴 경우가 아닌데.”
 잠시만 기다리라고 한 뒤, 경준은 냉장고에서 맥주를 꺼내왔다. 이거 좀 많은데. 괜찮아, 그만큼 다 마셔야 할 일을 마칠 수 있을 거야. 할 일이 무엇인지 가르쳐주진 않은 채 그는 병을 입에 물고 쭉 들이켠 뒤 말했다.
 “그렇게 몇 번씩 책을 가져다 두었지. 그는 책을 돌려달라는 소리는 하지 않았어. 그저 자주 책을 주었을 뿐이야. 나는 갸우뚱하면서도 거절은 하지 않았어. 언제부턴가 소설책만 주더라고. 집에서 적응을 위해 한국어 쓰는 걸 금지하자고 했거든. 그래, 좀 과했지. 어쨌든 아버지께 필요한 책을 빼곤 우리말로 된 건 집에서 모두 사라졌어. 애초에 많지도 않았지만. 그래서 그가 주는 책을 읽는 게 나쁘지 않았지. 언제부턴가 그를 만나는 게 도서관에 가는 기분이었어. 아니 내 책상 밑이 작은 서재가 되는 기분이었지. 어릴 땐 그리로 들어가 숨죽여서 책을 읽다 잠들곤 했으니까. 거기가 내 요람이었지. 그러던 어느 날, 그가 이번엔 줘야 할 게 많으니까 집에 들어오라고 하더라고. 한 번도 집에 오라는 소린 안 했기에 조금 망설여졌지만 사연 있는 표정에 할 수 없었지. 그가 인도한 방에는 책이 아주 조금만 남아있었어. 나는 이제 돌아갈 거야. 아무 소용이 없었어. 그는 약을 한 움큼 집어 먹더니, 저기 남은 걸 다 가져가줘. 이젠 허리가 너무 아파서, 눈도 잘 보이지 않아서 필요 없으니까. 옮길 힘도 없으니까. 하지만…, 하면서 그는 짐 속의 술을 전부 꺼냈어. 우리는 한참을 말없이 마셔댔지. 한참을 그렇게 보내다가 그 집을 나왔어. 그는 바로 다음 날 떠났지.”  
 배가 부른 걸까 취하는 걸까. 인애는 서로 비워내는 맥주병을 보면서 머리가 어지러워졌다. 그리고 짜증내고 싶어졌다. 자신과 상관없는 얘기 때문에 슬슬 약이 오르던 참이다. 어쩔 수 없이 그에게 말려들었다는 생각이었지만 그래도 여행 전에 들은 이야기가 있어서 꾹 참았다. 빈 병으로 자기 입을 톡톡 치며 지루함을 달랬다.
 “졸리지? 나도 이런 얘기 길게 하고 싶진 않아. 적어도 한 달 동안 할 말을 하루 새벽에 다 하고 있는 거니까. 사실 네가 필요한 거야. 귀찮아도 들어. 어쨌든 그가 그렇게 가고 난 뒤 난 그가 마지막으로 준책을 봤어. 그건 여태까지완 다르게 소설이 아니라 일기장, 사진앨범 같은 사소한 거더군. 근데 빼곡히 쓰여 있는 글씨에 들어있는 살기를 보면서 깜짝 놀랐지. 거기엔 그의 병력과 증오했던 사람들, 그리고 그가 마주친 사건들이 전말까지 다 기록되어 있어서 그에 대해 다 알 수 있겠더라고. 정작 대화는 많이 한 건 아니라도 말이지. 그런데 특히 주목을 끈 건 그 뒷부분이야. 거기엔 정갈하게 이렇게 쓰여 있더군.”
 
 여기까지 다 읽어냈을 줄 믿는다. 네 외로운 시간에 경의를, 그리고 경의보다 더 살가운 동의를. 너나 나나 피치 못하게 외롭다. 넌 인정을 받지 못해서, 난 남의 눈을 피하고 싶어서. 네가 눈치 챘듯이 나는 정상이 아니다. 일반인과는 다르지.
 난 중요한 사건 이후로 어떤 눈을 갖게 됐다. 다른 사람의 과거를 볼 수 있는 힘이지. 너를 통해 시험해 본 결과 이건 타인의 말을 듣는 게 아니라 글을 접해야 한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 과거는 진실만이 아니라 그 사람이 무의식중에 기록한 글이라는 것을. 그래, 글이다. 글은 진실을 말해주지 않는 것 같다. 심지어 그 기록을 훔쳐본 뒤로 내가 내 맘대로 그 글을 고칠 수도 있었다. 사람들의 의식 속을 조작하는 것이지. 완전히 지울 수는 없고 그 위에 덮어씌우는 정도긴 하지만 말이다. 어쨌든 온전한 진실을 찾고자 한다면 행간을 읽을 수 없는 바에야 맹목적으로 믿을 수는 없는 일이다. 내가 본 수많은 사람들의 기록의 파도에서도 글은 종종 엉뚱한 곳으로 빠지기 일쑤이다. 하지만 그 글 위에 둥실거리며 떠오르는 영상을 본다면? 그 영상은 사실을 말해주는 것 같다. 적어도 기록을 한 사람의 눈에 들어온 그대로를. 그래서 이 이미지는 최소한 글과 동등한 격을 갖는다. 예전에 읽었던 책 중에는 디카詩라는 것이 있던데, 거기서는 사진이 시의 보조가 아닌 동격을 이룬다는 것을 보았다. 그렇게 상관이 있는지는 모르겠다만.
 허나 이 점이 또 문제가 되었다. 앞에서 말했다시피 글은 조작할 수 있어도 자연히 떠오르는 영상을 없애는 것은 불가능했다. 나는 예전부터 남의 과거를 보며 도저히 잊을 수 없는 사람들의 기억을 잊게 만들려고 했다. 그런 기억은 대부분 뼈에 사무친, 생각하면 수명을 단축시킬 수밖에 없는 아픈 것들이니까. 그렇지만 나 말고 누군가 그것을 볼 수 있다면? 그리고 그 자신을 보는데 혹시라도 내가 기억을 조작한 사람들이라면? 그럼 그들은 영상을 보고 글을 보면서 혼란에 빠지다가 이내 진실을 알게 될 것이다. 화를 불러올 사실은 숨겨야 한다. 그래서 나는 그 영상을 아예 숨길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고 궁리했다. 그리하여 얻은 것이 그들의 기억의 낱말 속에 집어넣는 것이다. 그리고 내가 그 기억을 덧씌우면 해결할 수 있었다. 예를 들면 나는 이 능력의 계기가 된 한 소녀를 알고 있다. 치명적인 기억을 갖게 될 것이 분명한. 그녀는 고등학교를 진학한 지 일 년이 채 못 되어 학교를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나는 그녀의 필체를 간신히 얻어내 기억을 지워낼 수 있었다. 그것이 벌써 몇 달이 지난 뒤였다. 나는 누군가에게 능욕당하는 수치스러운 기억의 골짜기에서 그녀를 구하는 것이 내가 그 힘을 얻는 사명 같았다. 혹자는 ‘열 대여섯 살 때 그는 하이네의 시와 어여쁜 소녀의 생각으로 퍽 행복되었’다고 말하지만 내 경우에는 글쎄… 어여쁜 소녀만 비슷한 것 같군. 어쨌든 누군가가 그녀의 기억을 건드려 행간을 자극하지만 않는다면 그녀가 자신의 기억을 되찾아 슬퍼지지는 않을 것이다.
 쓸데없는 말이 너무 길었다. 앞서 말한 것은 그저 예시일 뿐이다. 사실이 아니라는 것은 아니다. 다 맞는 말이다. 마법 같은 능력도 마찬가지이다. 내가 ‘뿐’이라고 한 것은 그것이 사람들 속에서 그저 그런 일로, 본래의 고정된 무게에서 벗어날 것이라는 뜻이다. 그녀는 이 년 뒤에 너를 찾아오게 되어 있다. 나는 행간을 읽어내려 노력하는 집단과, 거기에 무리 없이 섞여 들어가 마침내 찾아내게 될 사람을 적어도 하나는 알고 있다. 찾아가게 되면 내 책을 돌려주는 대신에 네가 할 수 있는 대로 최대한 해주길 바랄 뿐이다. 거기까지 왔으면 어차피 상처를 피한다고 해서 능사는 아닐 거라고 생각한다.
 네 친절과 꾸준함에 감사한다. 네게 행운이 있기를.

 “일기장 끝에 편지를 썼던 셈이야. 그리고 그가 준 앨범을 보니 그의 일상적인 사진은 단 하나도 없더군. 심지어 그의 사진도 하나 없이. 바깥과 안이 동시에 보이는 것. 빨간 집이 쏟아져 내릴 듯 온 마을에 흐드러진 것. 눈에 보이지 않게 코부터 찍은 전신사진. 그 사진들은 너무 세계의 파편 같은 느낌을 풍겨서 계속 보기 힘들었지. 아름답기는 해도 계속 끄는 매력은 없었어. 그러다가 그 앨범 역시 마지막 몇 장에서 멈췄지.”
 그는 앨범을 펴서 촤르륵 넘겼다. 그리고 마지막을 짚었다. 거기에는 인애의 사진이 두 장 있었다. 학교를 다닐 때 하나, 그리고 학교를 그만 두고 학원에 다녔을 때 하나.
 “그러니까 그 소녀- 라는 것은…….”
 그녀는 말을 잇지 못했다.

      
 “방금 일을 그만두겠다고 하고 나온 참이야.”
 인애는 영한을 학교 앞 카페로 불러냈다. 카운터에서도 별 신경 안 쓰는 사람 없는 으스스한 카페였다.
 “알려 줘. 뭐가 됐든. 남의 속사정까지 다 움켜쥐고 어쩌자는 거야? 내가 너한테 줬단 말은 하지 않을게. 그건 나도 의도한 게 아니니까. 다만 내가 너한테 숨기지 않았던 것처럼 너도 내가 묻는 건 알려줘.”
 “뭐가 됐든, 이라…….” 그는 공연히 구레나룻만 뜯었다. 주문한 차를 홀짝거리며 마셨다.
 “나도 확신은 못하겠다. 나로서는 절대 다 말할 수는 없어. 그건 장담할게. 하지만 네가 궁금해 하는 것 정도는 알려줄 수 있어, 충분히. 물론 네가 직접 해야 하는 거지만.”
 “어떻게 하면 되는 건데?”              
 “네가 갈 뻔했던 그곳으로 가. 네 고향, 네 어머니 집 말고. 그곳을 떠나 친척 집으로 가.”
 “거기 가면 알 수 있을까?”
 “글쎄, 적어도 유럽 여행이라도 되겠지. 어차피 지금 아르바이트하던 것도 별 목적 없이 그저 하고 있던 거잖아. 너야 학비가 모자라진 않았을 테니까. 보태서 가면 되겠네. 여태 그걸 위해 일했다고 생각해.”
 “확실해? 내 기억의 구멍을 알 수 있을 거라고?”
 “그래. 그보다 더 많이. 네가 잃어버렸던 그것의 처음까지도.”


 “엄마는 깨지 않을 거야. 잠들면 무슨 일이 있어도 일어나질 않으니까. 희진이도 그건 마찬가지고. 아마 그래서 창문도 열렸는지 닫혔는지 신경도 쓰지 않는 걸 거야. 나라면 민감해서라도 깰 텐데. 덕분에 너만 몰래 불러내서 얘기할 수 있었어.”
 이제 두 시간. 경준이네 식구들이 아침을 위해 깨기까지 남은 시간이 겨우 두 시간이었다. 경준은 슬슬 취기가 올라오는 모양이었다. 담담하게 기억을 회고하던 처음과 달리 조금씩 목소리가 떨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혀도 서서히 꼬이는 것 같았다.
 “우리는 졸업 사진을 같이 찍을 만큼 같은 동네에서 학교를 다녔지. 기억나니? 나는 애들한테 괴롭힘 당해도 넌 오히려 피해자보다 가해자 입장에 있었던 거. 넌 예쁘니까. 넌 약점 잡힐 게 없었으니까. 네 옆에는 다른 친구들이 있었으니까.”
 “하나도 기억나지 않아.”
 둘 다 불콰해진 얼굴로 서로를 노려보았다.
 “후회하지 않을 거지?”
 그 말을 끝으로 인애의 필름이 끊겼다. 나중에야 끊긴 기억들이 홍수 뒤에 나타난 대지처럼 시간을 두고 무섭게 복원됐다.

 
 그림자도 따뜻하게 느껴지는 긴 날. 너는 친구의 학교로 놀러 갔다. 교내는 축제 첫 번 째 날이었다. 금요일 오전 시간이라 그런지 주변에는 그 학교 학생뿐이었다. 너는 쉬는 시간을 틈타 수업을 째고 학교 담을 넘어 친구를 찾아간 것이다. 친구가 오라고 했기 때문에.
 그 친구의 이름은 김현정. 초등학교 때부터 알던 단짝이다. 글쎄, 우리가 평생 친구다, 라고 말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너는 그녀와 백 번도 더 그런 말을 했던 것 같다. 그녀는 네게 자기 동아리 축제에 오라고 했다. 친한 친구이기도 했지만 그 부탁을 거절할 수 없는 이유가 하나 있었다. 그녀의 고민 상대가 너 하나였기 때문이다. 
 너는 그녀의 고민을 알고 있다. 그녀는 당시 꽤 초조해 하고 있었다. 그녀는 애를 갖고 있었다. 비록 아직 태어나진 않았지만 말이다. 어디부터 생명을 따져야 하나 하는 윤리 따윈 관두기로 하자. 그녀는 벌써 배가 불러오기 시작하고 있었으니까.
 그녀가 고민하는 이유는 단 하나였다. 사실 애를 갖는 건 별로 무섭게 생각하고 있지 않았다. 다만 자기 혼자 갖게 되는 것이 무서웠을 뿐. 그녀를 임신시킨 남자가 책임을 져 준다면 학교야 당장이라도 그만둘 수 있는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가 그 뒤로 무심해졌다는 것이 문제의 시작이다. 그의 이름은 이현수. 그는 그녀의 동아리 회장이다. 축제를 빌미로 이것저것 상납금을 받는 동아리에서 적당히 괜찮은 애들을 모아 집단을 운영하고 있다. 의례적으로 손아래 후배들을 동기들과 함께 옥상에 가 기합을 주곤 했다. 네 친구는 그런 그가 좋아서 거기에 가입했던 것이다. 조금이라도 가까워지기 위해서. 그리고 그녀는 그와 친밀해지는 데는 성공했다. 어느 날, 여전히 옥상에 엎드려 목검으로 맞던 그녀가 쓰러졌다. 훈수를 두던 선배가 너무 세게 친 나머지 목검이 부서졌기 때문이다. 회장은 다 내려 보낸 뒤에 그녀를 업고 어두운 써클실로 갔다. 거기서 치마를 들춰  상처를 보던 그는 그녀가 울면서 일어나는 것을 보고, 그리고 그녀도 자기 위에 있는 그를 보고, 이윽고 서로의 가슴이 아득하게 닿았던 것이다.  
 어쨌든 너는 그 후 냉랭해진 그를 대신해 어떻게든 친구를 도우려고 했다. 임신 테스트기를 시작으로. 그보다 더 혼란스럽긴 했지만 유산시킬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지, 돈이 들면 네가 보태서라도 도와주려 했다. 그녀는 그것은 거절했다. 그를 밤새 저주하더라도 그에게서 온 것은 그만큼 버릴 수 없다고 생각했다. 너는 그런 그녀를 위해서 방법을 찾았다. 결국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은 채 미혼모의 집에서 애를 낳기로 결정했다.
 그런 사정을 알고 있기에 그녀가 학교 입구에서 너를 보고 환하게 웃었을 때 눈물도 날 뻔했더랬다. 너는 축제를 겸해서 그녀의 동아리 방을 찾아가 그를 만나기로 했다. 전날에 그녀에게서 전화가 와 너를 보자고 했었다. 현정이에 대해 의논할 게 있다면서.
 어디 안 좋은 곳 있어? 핏발 선 네 눈, 경직된 너의 얼굴을 보면서 현정은 오히려 너를 걱정했지. 아냐, 아무 것도. 그녀 몰래 오라는 그의 말을 듣고 의구심은 들었지만 여태까지 고생했던 게 억울해서라도 따지려 했지. 너는 화장실에 간다며 그녀를 떨어뜨려 놓고 몰래 체육실로 향했어. 그녀는 운동장 앞 눈에 잘 띄는 행사장에서 억지로 웃으며 사람들을 모으고 있겠지. 그렇게 생각하니 더 슬퍼졌어.
 음침한 체육실은 건물 구석에 있었다. 미로처럼 지어진 건물에서 보수하지 않은 채 방치된 체육실. 그리고 그 안에 그가 있었지. 너는 그에게 최대한 차분히 말하면서 빠져나갈 수 없도록, 책임을 지도록 만들려고 했어. 최대한의 사죄를 받아내자고. 하지만 그가 너를 보고 일어서자, 그리고 그 얼굴을 보자 화가 날 수밖에 없었지. 치밀어 오르는 분노에 소리 지르려는 순간, 뒤에서 둔탁한 소리가 났다. 네 고개는 맥없이 떨어졌다.
 정신을 차려보니 너는 낡은, 솜이 비어져 나온 벤치프레스 위에 눕혀 있었다. 너는 입에 테이프가 붙여져 나체의 상태로 천장을 올려보고 있었다. 툭툭. 담배꽁초를 뱉어낸 그의 입에서 스산한 웃음이 어둡게 퍼져 나왔다. 너를 갖고 싶어. 너를 예전부터 봐왔어. 너 때문에 그년과 떡을 친 거야. 그는 똑똑히 말하지는 않았지만 분명히 그렇게 느껴졌다. 그의 과한숨소리가 거대한 몸에서 뿜어져 나오고, 그렇게 너에게 육박해오기 시작했다.
 이… 쌍년이. 그가 고개를 돌릴 때 묵직한 역기 원판이 그의 머리를 강타했어. 그의 등에 꽂힌 새하얀 칼날 때문에 너의 가녀린 허벅지에 피가 튀었지. 그의 새빨간 피는 하얀 칼과 너의 흰 살결을 꼬리를 물고 빨갛게 적시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 뒤에는 쓰러진 현정이 있었어. 그녀가 낌새를 눈치 채고 몰래 체육실에 숨어 있던 거야. 친구의 전화를 빌려 그를 잠시 끌어낸 뒤, 너저분한 방 안에 숨어있던 거지. 그는 모르는 전화번호를 보고 혹시 넌가 싶어서, 그리고 아무 소리가 들리지 않는 걸 보고 습관적으로 밖에 나갔던 거고.
 어쨌든 그녀는 그에게 복수를 한 셈이지. 하지만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리며 뻗었던 그의 팔 때문에 그녀는 그의 팔꿈치에 콧잔등을 맞고 쓰러져 기절했어. 그의 온몸에 피가 젖었어. 그 피는 그녀를 놔줄 것처럼 보이지 않았지. 그때 네가 어떻게 했었을 것 같아?
 너는 너무 놀라 옷가지만 챙겨들고 화장실로 갔어. 토악질이 올라오는데 그제야 네가 입에 붙은 테이프도 떼지 않았다는 걸 알게 됐지. 너는 부들부들 떨었어. 그렇게 떨다가 현정에 대한 생각이 났어. 다시 거기로 가려는데 밖에서 소리가 났지. 아마 그 패거리들이었던 것 같아. 아마 밖에서 행사를 하는데 역기를 가져가 차력이라도 할 참이었나봐. 그들의 소리를 듣자 너는 거기로 갈 마음이 싹 사라졌지. 너는 도망갔어. 정신없이.
 네가 그녀의 소식을 접한 것은 며칠 뒤야. 인근 고교에서 남녀가 변사체로 발견. 그들은 실랑이 끝에 죽음까지 갔던 것으로 보인다. 여자는 우발적으로 남자를 피살하고 죄책감에 못 이겨 자살한 것으로 보인다. 사건은 학교 측에서 조정한 끝에 쉽게 마무리되었고, 네게는 어떤 연락도 없었어. 현정이 죽었구나, 너는 생각했다. 무엇 때문에 자살한지는 명확하지 않았다고 너는 계속 생각했어. 원래 죽었을 거야. 내가 가지 않아서가 아니야. 그녀를 버려둔 것 때문이 아니야. 너는 계속 죄의식에 사로잡혀 있다가 결국 집에 틀어박히고 말지.
 하지만 그것으로 끝은 아니었지. 너는 그의 패거리들이 무서웠어. 어쩌면 단지 기절했을 뿐인 현정의 숨을 끊은 것은 그들일지도 몰라. 현수의 복수라고 해야 하나. 그러지는 않을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적어도 친구였던 현수의 목적은 알고 있었을 거야. 너는 그렇게까지 생각이 미치자 너는 그 지역에 남아있을 수가 없다고 생각했지.
 마침내 너는 학교에 미국에 간다는 이유로 학교를 자퇴하고 말지. 너는 그렇게 남들에게 공공연히 알려두고 기습적으로 독일로 떠나려고 했던 거야. 하지만 거기엔 네 과거를 알고 있을 동갑내기 사촌과 너보다 어린 순진한 사촌동생이 살고 있었어. 그들을 보며 네가 아무 죄책감이 들지 않을 수 있을까? 그런 고민으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데, 갑자기 어느 날 마음에 변화가 온 거야. 섬으로 가자. 섬의 기숙학원으로 가자. 왜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 모르지만 누군가 의식에 개입한 것 마냥 너는 그렇게 남들의 눈을 피해 검정고시를 붙고 남들보다 일 년 먼저 대학에 가게 되지.

 경준은 앨범의 사진 옆에 깨알같이 쓰여 있는 글씨를 읽으며 술에 취해 잠든 그녀의 머리맡을 쓰다듬었다. 가끔씩 올라오는 숙취로 끅끅 거리긴 했지만 인내심을 갖고 끝까지 읽었다. 그녀의 꿈속에 이런 말들이 헤엄치고 있을 게다. 그렇게 생각하며 그는 그녀의 머리 한 올 한 올을 쓸어내렸다. 기억의 결을 짚어내듯이.
 
 “일어나야지 인애야, 희진아.”
 영란이 희진의 방으로 들어가 침대 위에 엎어서 자고 있는 그녀들을 깨웠다. 인애는 멍한 상태에서 아침을 먹었다. 소시지에서 짠 맛이 느껴졌다.
 “그래, 이제 어디로 간다고?”
 나갈 채비를 마치며 대영이 인애에게 물었다.
 “퓌센으로 갔다가 스위스로 가려고요, 이모부.”
 그녀는 마지막 소시지를 집어넣고 짐을 챙기기 위해 위로 올라가며 말했다.
 “빠뜨리지 말고 잘 챙겨 와라. 난 차 빼놓을게.”
 대영이 먼저 나가고 나서 얼마 안 있어 인애도 짐을 끌어왔다.
 “조심히 가, 언니. 앞으로도 자주 들러야 해.”
 “희진아, 너는 가서 세수나 하고 인사하렴. 인애야. 여행 잘하고 네 엄마한테 안부도 전해주고.”
 “네 그래야죠 이모. 여행 잘 할게, 너도 공부 잘하고, 희진아.”
 경준이 방에서 조용히 나왔다. 지친 모습이었다. 아마 잠을 한숨도 못잔 모양이다.
 “잘 가고. 나도 곧 한국에 갈 일 있을 거야.”
 “그래, 고마웠어.”
 밖에서 경적 소리가 들렸다.
        

 

2′

 나는 다시 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런 꿈을 꾸었다. 꿈이 아니라 기억 속에서 멀어진 낱말로 빨려 들어갔다. 이건 새로운 경험이다. 그럴지도 모른다는 얘기다. 실내는 꿈틀거리는 책들로 가득 차 있었다. 책의 표지에는 저마다의 얼굴이 숨 쉬고 있었다. 내가 책장으로 가까이 다가가자 성의 모습이 나타났다.
 사실 이 성은 전에 봤던 것 같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러자 나는 이미 성문 앞에 있었다. 장엄한 외벽이 시큰둥한 표정의 그림자를 내게 드리웠다. 외벽이 더 넓어지는 것 같아. 그러자 다시 나는 성벽을 촉감을 느낄 수 있었다. 푸른 첨탑 주변으로 노을빛 나무들이 줄지어 있었다. 성벽에 걸린 얼음조각과 대조적으로 나무는 그 머리 위에 불끄덩이를 달고 나란히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성문을 들어섰다.
 전사가 용과 싸우고 있었다. 용맹한 전사의 옆에 칼을 갈아주는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털보의 눈매는 파편으로 짜인 검신에 집중되어있다. 나는 한순간 그 검과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러자 내 심장도 스걱거렸다. 그들은 내게 무심했다.
 고급스러운 보라색이 건물의 줄기를 휘감았다. 그러나 그 위에는 태양의 보살핌 같은 황금이 구석구석을 환하게 조명했다.
 반가워. 귀신이 내는 소리 마냥 음산한 기운이 뻗쳐 오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거기서 쥐가 걸어오고 오리가 걸어오고 개가 걸어왔다. 그들은 사람의 형상을 하고 있었다. 황홀에 찬 얼굴로 내가 지나쳐온 입구를 향해 갔다. 그리고 그 끝에 구부정한 남자가 기과하게 눈을 뜨고선 나를 째려봤다.
 잊었던 것을 찾게 되어 기쁩니까? 그는 콜록거리며 기침을 했다. 거대한 상체를 가누기 힘들어 뒤뚱거리다 탁자에 앉았다. 나도 앉고 싶다고 생각했다. 의자가 내 밑으로 와서 나를 앉혔다. 그는 곱사등인 자신의 등뼈를 밑으로 떨어뜨렸다. 고개를 내민 채 궁금하단 표정을 지었다.
 잘…모르겠는데요. 그래, 그래야죠. 나도 망설였던 것이니. 그는 눈을 감고 자신이 말하는 것이 아닌 것 마냥 말을 이었다. 실제로 입은 움직이지 않고 소리만 들려왔다. 우선 미안하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내 필요와 당신의 필요가 겹칠 필요가 있었습니다. 내 양심을 위해서. 그리고 당신이 더 절박해 보였기 때문에. 덕분에 여태 살아있지 않습니까? 뭐라고 말해야 할까요, 당신이 우연처럼 그런 눈을 가졌다는 것처럼 저도 우연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만, 저는 당신과 다르게 정말 우연입니다. 당신의 우연은 그렇게 믿도록 내가 만든 것이고요. 나는 그날의 일을 실제로 보았습니다. 나도 그 학교에 있었어요. 나는 그 옆의 도서관에 볼 일이 있었습니다. 체육실보다 더 낡아 아무도 찾아가지 않는 도서실. 저는 거기서 일 년 동안 도서부 활동을 했습니다. 일학년 때 말입니다. 하지만 그 때도 무리였고, 그 다음 해에는 아무도 지원을 하지 않더군요. 어차피 낡은 책뿐이어서 도서실 자체가 부흥되지 않았습니다. 찾아가는 사람 없이 버려진 것이죠. 내 이 흉물스런 외관과 같이 사람들에게서 버려지고 유폐된 것입니다.
 사설이 길었군요. 어쨌든 나는 그 장소에 동질감을 느껴 간혹 그 안에 들어가 정신을 놓고 가만히 있곤 했습니다. 그러다가 옆 교실에서 무엇이 부딪히는 소리를 듣게 된 것입니다. 나는 창 밖에서 몰래 그 광경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당신들이 어떻게 그렇게 된 것인지 나중에 알아보기 시작했죠. 그리고 기록했습니다. 그 광경은 텍스트의 이해와 분석에 다름 아니었습니다.
 그렇게 나는 사람들을 책처럼 만들어냈습니다. 그리고 나는 나만의 도서관에 신선한 책들을 가득 채웠습니다. 여기 보시는 것처럼. 어떠합니까, 이 광경이? 이 성에 가득 들어찬 책들이? 성이 마치 화려한 서재 같지 않나요?
 이 많은 책들을 다 옮긴 건가요? 남의 기억을 멋대로 조작해 자기 입맛대로? 나는 경탄에 덜덜 떨면서도 분노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아닙니다. 천만에요. 우선 필요하지 않으면 조작하지 않았습니다. 기록이 사실 자체라고 믿진 않았습니다만 사람들 자신이 저마다 기록한 그대로를 최대한 존중했습니다. 내가 신도 아니고요. 그리고 무엇보다 나는… 나는 사람이 그리웠습니다. 생생한 사람들의 체취를 원했습니다.
 그는 눈물을 흘렸다. 처음에는 수십 명의 인생 기록을 옮겨 적어 넣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으론 이 큰 건물에 택도 없지요. 그런데 어느 날 놀라운 발견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이야기 책들이 증식하기 시작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겁니다. 게다가 도미노처럼 서로 연결되어 짜여져 있단 사실도 알게 되었습니다. 전혀 관계가 없는 사람들조차 보이지 않는 실에 꿰어 있는 것처럼. 나는 그저 거기서 선택을 했을 뿐이죠. 내가 몇 명을 지목하면 보이지 않는 수십, 수백의 이야기가 딸려 나온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을 깨달았을 때에야 사람과 사람 사이에 숨겨 있던 공간이 들어찬다는 것을 알게 되더군요. 마치 지하철 의자를 사이에 두고 수십 명의 사람이 드나드는 것처럼. 혹은 끊임없이 선택을 요구하면서 전혀 다른 이야기를 내놓는 하이퍼텍스트처럼. 나는 거기에 매료되었습니다.
 다만……. 그는 격정에 가득 찬 고백을 멈췄다. 고해성사 같다고 생각하는 순간 그와 나 사이에 또 어떤 벽이 있는 것 같았다. 서로의 목소리만 들리고 나는 그가 누군지 알지만 말해서는 안 될 것 같았다. 그는 내게 모종의 부탁을 하려는 것이다.
 다만 말입니다. 나는 이제 지쳤습니다. 그리고 이젠 이게 필요가 없어졌지요. 사실 너무 오래 유지되어왔습니다. 책들의 숨이 넘어가는 소리가 들립니다. 구석구석에서는 책벌레들이 기어 다니는 소리도 들립니다. 누렇게 변색된 종이의 낡은 냄새가 코끝까지 전해져 옵니다. 아까 신선한 책으로 채우고 싶다고 했지요? 사람들의 생생한 삶의 기록은 그것이 끝나는 순간 돌처럼 굳어지나 봅니다. 변해지지 않는 하나의 비밀스러운 두루마리로. 자기들끼리 연결되고 하이퍼텍스트처럼 변화무쌍한 활기를 느낄 수 없게 되는 것 같습니다. 이제 그것들은 그들의 혼을 가둬두고 있을 뿐입니다. 더불어 내 혼도요.
 태워주십시오. 그가 말하자 내 손에는 횃불이 들려졌다. 책장에 불을 지펴 주세요. 나는 이제 퇴장하고 당신은 다음이야기로 넘어가야 합니다. 당신이 받게 될 유산은 아니지만 유산은 이미 전해졌습니다. 당신도 이런 결말이 마음에 들지요?
 섬뜩했다. 처음 문을 들어선 순간부터 화려한 이 성에 불을 붙여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아마 환한 나무에 석양이 비췄기 때문인 것 같다. 당신은 어떻게 되는 거죠?
 나는 말입니다. 예전부터 꿈이 있었습니다. 이건 내 허리가 딱딱하게 굳어서 돌처럼 변했을 때부터 갖게 된 생각입니다. 나는 날고 싶습니다. 김해경의 움터오는 날개처럼. 다만 그가 그만둔 것 같지 않은 이룰 수 있는 꿈으로써 날고 싶습니다. 내 허리는 이미 딱딱한 나무요 내 다리는 걷는 데는 쓸모없는 나무뿌리 같습니다. 여기에 날개를 달아주십시오. 불을 붙이면 저기 성 앞의 나무들처럼 나는 튀어오를 것입니다.
  나는 불을 붙였다. 기름을 뿌린 것처럼 불은 타닥- 소리를 내며 재빠르게 타들어갔다. 책들은 울부짖었다. 성의 베란다 바깥에서는 지는 해의 노랫소리가 들렸다. 그 노래가 암벽에 가 돌들을 때리고, 그것들이 부딪는 소리가 성안을 맴돌자 책들이 진동을 멈췄다. 빈 껍질 같은 책들이 토악질을 했다. 거기서 앙상한 시체 같은 사람들이 일어났다. 사람들은 더 늘어났다. 다리가 없는 그들은 날개를 뿜어냈다. 책이 생명을 다하고 영혼들을 더 토해내자 그들은 불을 붙이고 날아가기 시작했다. 탑이 무너지고 나무가 솟구치고 굳어버린 등골을 지탱하는 날개를 달고. 모든 광경을 그와 나는 경탄에 차서 지켜보고 있었다. 때 아닌 진눈깨비가 내렸다. 아직 겨울은 멀었는데? 눈발은 비로 변했다. 비가 천장을 부쉈다. 비가 불을 짓밟았다. 책들은 글씨를 쏟아내었다. 소나기처럼 퍼붓는 글씨의 범람에서 그는 잠겨갔다.  귀국하면 이곳으로 찾아가 보세요. 당신에게 직접적인 도움이 될 겁니다. 잊어버린 사람도 찾을 수 있을 것이고요. 이것이 그나마 내가 드리는 사과의 선물입니다. 그 말과 함께 그는 종이를 건넸다. 그것이 그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성의 이름이 펴지는 눈꺼풀처럼 의식에 옮겨지면서 나는 현실로 돌아 왔다. 


 퓌센에서 뮌헨으로 향하는 열차 안에서 인애는 잠을 깼다. 그녀가 쥐고 있는 열차표 뒷면에 마구 휘갈겨 쓴 글씨가 한자로 쓰여 있었다.
      

3

 “그래 뭐, 잘 지내십니까?”
 K는 인애에게 가볍게 인사했다. 그녀도 끄덕였다. 카페의 스피커에서 나오는 가벼운 음악이 분위기를 좀 더 환하게 만든다. 이거 지난 달 순위권 곡이었나? 그는 현란한 조명 아래서 살랑거리는 어린 여자들의 모습을 그려본다. 그 굴곡이 앞에 마주한 인애의 몸에 겹쳐지면서 괜스레 민망해진다. 그는 고개를 젓고 묻는다.
 “문자를 몇 번이나 보냈었는데, 어제야 답장이 오더라고요.”
 “그동안 외국에 가 있었어요.”
 “아…….”
 또 할 말이 없다. 아무리 방학 기간에 같이 동아리 활동을 했어도 어려운 관계는 변하지 않는다. 이럴 때 영한이라도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영한은 언젠가 갑자기 연락을 끊었다. 성실하게 학회 모임에 나오는 것 빼곤 장점이 없다, 싶었던 조용한 친구가 아무 말 없이 사라진 게 이상하다. 처음에 공지 문자를 보냈는데 답장이 없었을 때만 해도 어디 아픈가 보다 했지만, 그 후로도 몇 주 동안 기별이 없어 무슨 일인가 싶다. 그리고 이제 그가 데려온 여자 한 명과 마주하고 있는 것이다. 그의 사정을 알고 있을지 모르는 유일한 사람. K는 친구의 소식을 자신이 아닌 낯선 여자에게서 물어야 한다는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답장이 없었으면 제가 일하는 도서관에 가서 물어보셨어도 되는데. 그럼 바로 무슨 일인지 알려줬을 텐데 말이죠.”
 내가 뭐 때문에? K는 심술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내색하진 않는다.
 “아, 저는 제가 먼저 연락하면 답장이 올 때까지는 기다리는 주의라서요.”
 “그러시군요.”
 그러시군요, 라니. K는 그녀가 점점 싫어진다.
 “저는 만사 귀찮은 건 싫습니다. 사실 문자 보내고 나서 일일이 전화도 잘 하지 않아요. 그런 묘한 데 자존심을 갖고 있긴 합니다만, 그건 둘째 치고라도 애초에 반응을 보이지 않은 사람들은 어떤 연락도 무시하기 일쑤죠.”
 “그런가요?”
 또. 그는 커피를 벌컥벌컥 마신다. 그리고 새삼 커피는 빨리 식지 않는다는 것을 느낀다.
 “어떻게, 학회집은 잘 되어가고 있어요? 방학 때는 벌써 다 만들 것처럼 얘기가 되었는데 요즘은 어떤지 모르겠네요.”
 “후- 그게 그러질 않아요. 그동안 무슨 일이 있어서 학회집은커녕 학회 유지도 간당간당 하거든요. 후우- 어쨌든 뭘 내긴 내야 할 텐데, 이제 안 오는 사람이 많아서 원고 걷기도 힘들죠.”
 그는 개강 후 첫 모임을 생각한다.
 여느 때처럼 선정 작품을 읽어와 서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는 이런 쓸데없는 논의는 얼른 끝내고 어서 앞으로 할 구체적인 일들에 대해 말하고 싶어 했다. 다들 그런 의중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문제는 엉뚱한 곳에서 터졌다.
 선정한 작품이 문제였다. 그 소설은 우리 모임의 관례와 달리 다분히 정치성을 띠고 있는 소설이었다. 역시나 인기가 없어서 초판으로 절판되었고, 그 책도 학교나 동네 도서관에 없었다. 결국 처음 그 책을 고른 학회장 S가 어디선가 구해와 내용을 복사해서 돌렸다.
 이거 불법 아냐? 자주 티격태격하면서도 학회장과 친했던 선배 J가 시비를 걸었다. 사실 J와 회장은 추구하는 사상이 달랐다. 그는 애초에 S가 발제한 작품이 마음에 들지 않아 했다. 아니, 일단 구할 수 없고 모임은 유지했어야 하니까……. 회장이 말을 흐리자 J가 더 치고 나갔다. 그러니까 왜 이걸 골랐냐는 거지. 그 정도도 못 찾아봐? 네가 지금 학년이 몇인데, 이렇게 해야 됐어? 꼭 그렇게 말해야 돼? S도 슬슬 화가 나기 시작한 것 같았다. 내가 먼저 읽어보니까 좋은 것 같아서 함께 읽고 토론해보자는 건데 그것도 못해? 친구로서 그 정도도 이해 못해? 그게 네 생각이냐, 회장이라고 후배 앞에서 으스대는 놈아. 그게 뭐 대단한 거라고. 내가 가장 마음에 안 드는 건 그게 네 생각에서 고른 것도 아니라는 사실이지. 너, 지난 학기에 들었던 수업에서 공부했던 거 그대로 가져온 거 맞지? 그 불온한 강사가 강의했던 수업. 어차피 폐강된 것 같던데? J의 갑작스런 열변에 모두들 숨을 죽였다. S는 이런 경우는 생각도 못했다는 듯이 그저 멍하니 열만 씩씩 낼 수밖에 없었다.
 자자, 우리 앞으로 해야 할 일이나 얘기합시다. K는 어떻게든 분위기를 가라앉혀야겠다고 생각했다. 일단 유지가 중요한 것이다. 우린 아직 할 일도 많으니까. 비록 이 작은 모임이라도. 다들 이런 내 생각에 동조해서 발제는 포기하고 다들 학회집에 대해 재빨리 논의 주제를 바꿨다.
 하지만 그렇게 묻어두었던 감정이 터지는 건 시간 문제였다. 뒤풀이 자리에서 오랜만에 몇 잔씩 돌린 게 폭발을 촉진시켰다. 술이 들어간 S가 이번엔 느닷없이 J의 멱살을 잡으며 욕을 했고 J는 그런 그를 뿌리치면서 먼저 선방을 날렸다. 금세 둘의 주먹이 오갔고 말리던 학회원들도 괜히 얻어맞았다. 그 뒤로 둘은 모임에서 종적을 감췄고 다른 사람들-대부분이 K의 동기인, 비록 한 살 어리긴 하지만 신입생들-도 맥이 꺾여 버려서 모임 자체가 지지부진하게 되었다. 가장 말이 없던 B가 회장이 하던 일을 하며 노력을 했지만 반응은 신통치 않았다. 당연히 학회집에 낼 원고 수집과 편집은 진척이 없었다.
 그런 학회집을 이 여자는 연락 한 번 안하다가 물어보는 것이다. 이 무슨 가벼움인가.
 “그 동안 힘들었겠네요.”
 “힘들었죠. 많이.”
 “그럼 영한은 연락이 안 되는 건가요?”
 “여기 나타나기 전의 그 쪽처럼 말이죠.”
 그는 자신도 모르게 빈정거리는 말을 하고 수습하기 위해 한참을 허둥거렸다.
 “아뇨, 미안해하실 필요는 없어요. 그보다 걔에 대해서 많이 어디까지 노력해 봤는데요?”
 “어디까지……. 글쎄요, 아까 말했던 것처럼, 귀찮은 건 싫어서 뭐랄까, 문자는 계속 보내봤는데 말이죠.”
 그는 변명을 했다. 실은 귀찮은 것이 아니다. 그에게 영한만큼은 다르다. K는 자존심을 거는 것이다. 언제나 문자 한 통이면 와줬던 영한. 하지만 어느 날 그는 K의 예상을 깨고 홀연히 사라진 것이다. 지기에게 일언반구도 없이.
 “연락은 안 했다는 거네요. 집에 전화는 해봤고요?” 
 “영한이는 혼자 살아요. 자취하죠. 가족들은 외국에 나가 사는 것 같던데요?”
 “그러니까 알긴 알아요?”
 왜 난 이 여자한테 꾸중을 들어야 하는 것인가. K는 후회감이 밀려왔다.
 “과 사무실에 들러서 이래저래 좀 물어봐요. 집 전화번호는 아니더라도 물어보면 혹시 휴학이라도 한 건지 알 수 있지 않겠어요? 아니다. 지금 같이 갈래요?”
 “아뇨. 지금 집에 가려던 참이라. 수업도 끝났으니 집에 갔다가 다음 주 쯤에 가서 물어볼게요.”
 “앓느니 죽겠네요. 제가 물어보죠.”
 K는 필요 없다고 속으로 세 번쯤은 외쳤다.
 “아, 그리고요. 저 어디 가려는데, 같이 가보지 않을래요? 도서관에 와서 찾아보니까 K씨께도 도움은 될 텐데. 그래도 국문과 전공이신데 이런 과제 한 번쯤은 하지 않겠어요? <우리 고전 문학과 관련된 장소 탐방 보고서 제출> 같은 거. 저 가려는 곳은 정확히 일치할 텐데, 내일 주말이기도 하고.”
 이제 필요 없다는 말이 스무 번에 이르렀다. 이 정도면 거의 주술인 걸? K는 그렇게 생각하며 전혀 겸연쩍어 하지 않고 화제를 바꾼 여자에게 비웃으며 대답했다.
 “아니에요. 지난 학기에 이미 했어요. 그리고 사실 전공이긴 한데 별로 관심은 없어서요.”
 “그래요? 아쉽네요. 혼자 가긴 좀 꺼림칙한 장소였는데.”
 웬 수작질인가. K는 그러면서도 가방을 챙기고 일어나는 인애를 향해 엉거주춤 서서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근데 누굴 찾으러 가는 건데요?”
 “<寄語朋知且莫笑/洪鈞賦與我非貧/男兒勤學平生志/羞作人間第二人> 이렇게 말한 사람을 찾아 가요. 도서관에서 찾느라 귀찮았죠.”
 “뭐라고요?”
 “저한테 거길 가라고 한 사람이 준 쪽지에 그렇게 쓰여 있었어요. 그 사람은 이렇게도 말했더군요. <천추(千秋)에 날 알아줄 이 자연 있으리니/한 세상에 마음 알아줄 이 없음을 무어 따질 것인가/세모의 초라한 집은 쓸쓸하기만 하니/시름겨워 숲을 떨치는 음울한 바람소리를 듣는다>. 수원으로 갑니다.”
 그 말과 함께 K를 남기고 인애는 카페를 떠났다.

 
 당당하게 말했던 그녀도 당일에 찾아갈 수는 없었다. 계획은 대강 세워놨지만 뒤늦게 여독이 몰려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종일 찝찝하게 느껴지던 하늘에선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잠시만 집에서 쉬어야지, 하고 누운 상태 그대로 어둑한 새벽에 잠을 깨었다.
 다음 날 아침은 맑게 개었다. 주말이라 그런지 출근 시간의 수원행 좌석버스는 꽤나 한산했다. 그는 도서관에서 빌려온 역서 두 권과 소설책을 다시 되짚어 봤다. 역서의 시는 어렵긴 해도 해석이 다 달려 있어서 현대식으로 이해 가능한 부분만 공감할 수 있었다. 마치 예전에 어떤 사람의 과거를 볼 때 온통 아버지 어머니의 이름으로 주석이 달린 기록을 보고 있는 기분이었다. 물론 그것은 주체성이 없는 사람이었지만. 그리고 그것은 성의 없는 주석으로 이름뿐이었다. 우리 엄마가, 우리 아빠가 하고 말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경우에는 해석이 보충을 잘 해줘서 시대 상황까지 음미할 수 있었다. 친구가 말하던 주석 달린 셜록 홈즈 같다고 할까. 여러 텍스트를 한 곳에 모아놨다고 해야 할까. 촘촘히 엮인 꿈속에서 본 도서관 책장이 떠올랐다. 그래도 시가 아닌 편지나 학문을 연구한 산문은 읽기 어려웠다.
 반면 소설은 고전 소설이긴 해도 재밌었다. 꽤 복잡하게 전개되는 이야기였음에도 불구하고 한 사람의 이야기가 여러 이야기로 뻗쳐 나가는 것이 흥미로웠다. 이것도 잘 엮인 복합 텍스트라고 할 수 있을까. 저자에 대해 논쟁이 있긴 하지만 만약 지금 찾아가는 사람의 것이라면 거의 평생을 골방에서 신음하던 사람의 마음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는 그 작은 방에서 세상 돌아가는 이치와 여러 사람이 만들어가는 거대한 또 하나의 세상을 창조한 것이리라.
 그녀가 이런 생각을 하는 사이 차는 번화한 수원역에 도착했다.

 역에서 32번 수원 시내버스를 탔다. 수능을 몇 달 남겨서인지 인근 학교의 여고생들이 버스에 많이 있었다. 그들의 표정은 하나같이 지쳐보였는데, 수중에는 그녀들의 감기는 눈꺼풀만큼이나 무거운 두껍고 큰 문제집들이 널빤지처럼 들려 있었다. 이름을 들어봄직한 여러 대학을 지나쳐 버스는 해병대 사령부 역에서 멈췄다. 그녀는 그곳에 볼 일이 있는 것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역 이름에 멈칫했다. 그녀가 찾아가야 하는 곳은 그 낡은 콘크리트로 만들어진 오래된 역부터 죽 걸어가야 나온다고 했다.
 그녀는 한참을 걸었다. 그래서 해병대 사령부가 멀지 않았다는 빨간 푯말도 지나치고, 편의점과 그래도 좀 인적이 느껴지는 건물-편의점, 여관, 식당-들을 뒤로 했다. 우측으론 일하는 사람 없이 팽개쳐진 밭이, 왼쪽으로는 점점 물기가 살아나는 강물이 흐르고 있었다. 얼마나 걸어야 하는 걸까. 그녀는 그의 묘가 해병대 사령부 전에 있다는 것을 인터넷으로 확인했었다. 그런데 그녀의 눈에는 이미 사령부 건물과 그 앞에 복무 중인 군인들의 실루엣이 보이기 시작했다.
 길을 잘못 찾아온 걸까? 그녀는 이래도 되려나 싶은 마음을 갖고 보초를 서고 있는 제일 앞의 군인에게 길을 물었다. 혹이 졸수재의 묘가 이 근처에 있나요? 그런 이름 못 들어봤습니다. 그는 잠깐 고민하더니 바로 대답했다. 그의 얼굴에 서린 슬픈 기운 때문에 그녀는 더 묻지 못하고 뒤돌아 걸었다.
 이상하다, 여기가 맞는데. 그녀는 인터넷 블로그에서 뽑은 사진 속의 ‘聖期之墓’라 쓰인 묘비를 찾느라 헤맸다. 사진은 두 개였다. 묘비 정면에서 찍은 사진. 그리고 봉분 뒤에서 강을 바라보며 찍은 사진이 또 한 개. 햇살이 비치는 건물 뒤로 강물이 배경처럼 보였다.
 저기서 낚시하는 사람들에게 물어봐야겠다. 그녀는 낚시꾼들에게 가기 위해 강가로 내려가려고 했다. 그러다가 이상한 느낌에 뒤를 돌아봤다. 어디서 많이 본 건물인데? 그녀의 건너편에는 사진 속 건물과 똑같은 모양의 건물이 말쑥하게 서 있었다.
 그녀는 그 묘지로 가 자세히 관찰했다. 알 수 없는 한자가 많았고 언덕 기슭에 있어서 그런지 벌레도 징그럽게 기어 다녔다. 인애는 그 자리에서 반시간 정도를 머물렀지만 공부에 도움이 되겠다거나 기념비적인 요소 빼고는 특별한 무언가를 얻을 수 없었다. 이전의 어떤 환상적인 경험이나 계시 같은 것이 없었던 것이다.
 그 남자에게 속은 걸까? 병든 위인들에게서 동질감을 느끼고 싶어 했던 그 곱사등이 남자. 눈을 게슴츠레 뜬 것이 괜히 마음에 걸려왔다. 그러다가 그녀에게 도움이 될 것이라 말했던 게 떠올랐다. 직접적인 도움. 잊어버린 사람을 되찾는다. 망각의 귀환. 회귀. 이것은 그녀가 모임에 갔던 첫날에 이야기했던 소설의 핵심 주제가 아닌가. 나를 놀리는 거였나. 거기까지 생각이 미쳤을 때, 어떤 기억 하나가 그녀를 스치고 갔다. 그리고 그녀는 놀라움에 아까 자신이 갔던 곳으로 다시 걸어갔다. 그의 얼굴을 확인하기 위해서.


 K는 처음으로 영한에게 문자 보내기 버튼이 아닌 통화 버튼을 눌렀다. 내 고집도 알아줘야 돼, 그는 혼잣말을 하면서 전화기에 귀를 가까이 댔다. 그의 전화기는 해지되어 있었다.
 
 귀가길 지하철 안에서 졸고 있는 K의 전화기에 문자가 여러 통 왔다. 인애로부터의 문자였다. 그는 확인도 하지 않고 슬라이드를 닫았다. 거기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나는 독일에서 어떤 사람을 봤어요. 그 사람은 자기 조국이 그리워서 자신이 산 책들을 조금씩 불 지르고 있었어요. 그렇게 알맹이만을 태우고 그 표지 안에 자신의 소중한 책들을 숨겨요. 그렇게 하는 이유는 그가 가족에게 자신이 이곳을 그리워한다는 소식을 숨기려고 하기 때문이에요. 부적응자로 낙인찍힐까봐. 문학회 동아리 사람들, 그 싸웠다는 J와 S를 다시 불러서 사정을 들으려고 하세요. 쉬운 일은 없으니까. 겉으로 드러난 그런 이유 말고 다른 어떤 사정들을. 우리는 아직 그런 걸로 나뉘기엔 너무 어리니까. 후일엔 진실도 알 수 없을 테니까. 너무 긴 내용이지만 문자 애용자인 K씨를 위해서 굳이 문자로 이렇게 보낼게요.
 
 한참의 간격을 두고 다시 문자가 왔다. 그것은 아마도 그녀가 비오는 중에 집에 가면서 보낸 문자일 것이다.


 영한이 군대 갔대요.
     
4(0′)

 영한은 여전히 이어폰을 꽂고 역 앞에서 K를 기다리고 있다. K는 많이 늦을 모양이다. 이어폰에서는 다운받은 소설 이야기가 흘러나오고 있다. 이 부분은 작가의 실제 경험이군. 그는 고개를 끄덕인다. 사인 받은 저자의 다른 소설책이 집에 있다. 그는 다시 소리를 들으며 영상을 떠올린다.
 
 K는 여전히 집에서 늦게 출발한다. 그가 졸다가 지하철을 바꿔 탔다는 것은 거짓말이다. 그는 영한과의 만남에서 절대 졸지 않는다. 영한이 여자를 데려오면서 자신과의 관계를 끝냈다고 생각하고 냉랭해졌지만 그런 관계가 아니라는 때늦은 영한의 변명에 그만 용서를 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과 그는 남과 연애를 할 수 없을 것이다. 몸이 뜨거워지고 있다. 그와 문자를 주고받으며 밤을 밝히던 날들이 떠오른다. 그리고 이제 사흘도 채 남지 않은 자신의 입영에 한숨을 푹 내쉰다. 하지만 영한은 그때까지도 항상 그래왔던 것처럼 그를 기다릴 것이다.

 영한은 앞의 연인들을 다시 한 번 본다. 그는 이미 기억의 조작으로 그들 중 여자의 머리에서 자신에 대한 기억을 말끔히 지워냈다. 그래서 자기가 바로 앞에 있음에도 그녀는 전혀 알아보지 못하는 것이다. 인애는 자신이 말했던 남자친구 중 한 명과 뜨겁게 손을 마주잡고 있다. 남자는 구레나룻이 많이 길다. 제대한 지 얼마 안 된 영한의 머리와는 비교도 할 수 없다. 그럼에도 복학생 티는 난다.
 찬바람이 또 불어온다. 휘몰아친다. 날씨가 이상스레 춥다.

 왜 영준은 그렇게 해야만 했을까? 자신의 능력을, 이 저주받은 눈을 나에게 전해주려 했던 것인가? 자신을 매몰차게 찼던 여자의 수치심을 일으키는 눈빛 때문에? 아니면 그처럼 되지 말라는 부모님의 서운한 말 때문에? 어쩌면 나 때문일지도 모른다. 영한은 그렇게 생각한다.
 언제나 함께할 것 같던 어린 시절로부터 점점 멀어지면서 그만큼 소원해진 서로의 거리 때문인지도. 무엇이 되었든 자신 때문인 것은 확실하다. 그래서 사랑했던 여자의, 그리고 자신이 아는 여자들의 온갖 정사의 장면이 그의 눈에 항상 아른거리는 것이다. 그녀들을 거칠게 쥐는 남자들의 알몸이 그를 괴롭게 한다. 이것은 저주에 분명하다. 인애와는 달리 그는 영상을 보는 것이 너무 쉽다. 그게 더 힘들다.
 하인애. 여자는 유명한 전설을 노래한 시인의 이름과 닮았다. 그리고 그 전설까지도 닮아가고 있다. 영준은 그녀의 매몰찬 시선 때문에, 그리고 그녀의 친구는 그녀의 더 우월한 매력 때문에 몰락해버렸다. 영준은 그녀에게 복수한답시고 그녀를 능력의 운반책으로 쓴 것 같다. 분명 그녀도 상처를 입었다. 아름다운 로렐라이 언덕의 그녀도 너무나 큰 실연을 겪고 고통스럽게 노래를 해야만 했으니까. 이제는 형제간의 택배상자가 되어 버렸다. 잃어버린 기억이 꿈에서 그녀를 절벽 위로 인도할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영준의 속내를 좀 더 명확히 알고 싶다. 어쩌면 형은 자신이 미래까지 보려고 했던 것은 아닐까. 그로 인해 미래의 가증스러운 조그만 행복을 찾아, 수십 년 치의 쾌락을 단 몇 주 만에 소진해 버린 채 낙담했던 것은 아닐까. 영한은 알 수 없다. 형이 자신이 할 말만을 남긴 채 그의 세계를 불태웠기 때문이다. 마치 그의 최후가 실제로 그러했듯이.
 어쩔 수 없다. 침몰해가는 뱃소리를 들으며 영한도 동지를 찾아 나선다. 영준이 저주받은 고목 혹은 괴짜 성주, 인애가 의뭉스러운 너구리였다면 그는 물귀신이다.
 우선, 사람들의 서랍 속에 담긴 종이 상자를 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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