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전만이 꿈을 찾을 수 있는 길입니다”
“도전만이 꿈을 찾을 수 있는 길입니다”
  • 이채린 기자
  • 승인 2009.11.21
  • 호수 130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공대 졸업 후 변호사로 활동 중인 이원구<세라믹공학과 91> 동문

우연히 신문사로 날아든 변호사 이원구 동문의 인사장을 별 흥미 없이 읽어 내려가던 중 시선을 붙잡아 끈 것이 있었으니, 우리학교 공대 세라믹공학과를 졸업했다는 대목이었다. ‘공대 출신 변호사?’ 신기한 마음에 주변 사람들에게 이야기하니 ‘괴짜’, ‘괴물’, ‘별종’ 등의 말들이 튀어나온다. 기자 또한 호기심에 그 ‘괴물’을 만나보고 싶어 전화기를 들었다. 다짜고짜 인터뷰를 청해 당황할 법도 한데 “그러죠”라는 말이 흔쾌히 떨어진다. 역시 ‘괴물’이구나 싶었다.

열정으로 가득 찼던 대학시절, 그리고 수감생활
“학생운동 하다 2년 동안 빵에 들어갔다 나왔어요.”
전국에서 손가락 안에 꼽히는 한양 공대를 졸업한 뒤 사법고시에 합격한 이력. 공부 외에는 관심도 없는 엄청난 공부벌레거나 수재일거라는 기대를 한 방에 날려버린 그의 첫 마디 말이다.

“전과자인 셈이죠.” 하며 터뜨리는 호탕한 웃음에 떨떠름하게 따라 웃는 기자를 바라보는 눈빛이, 전과자 같지 않게 따스하다는 생각이 스쳤다. 그가 대학에 입학한 1991년은 노태우 정권에 대한 학생운동이 거세던 시절이다. 입학과 동시에 선배, 동기들로부터 전에는 알지 못했던 사회 문제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며 수많은 밤을 토론으로 지샜다.

“학생회와의 접촉도 많아지면서 자연스럽게 학생운동에 관심을 갖게 됐어요. 그때만 하더라도 학생운동에 대한 거부감이 없었고 대부분의 대학생들이 심적으로 동조하던 때였죠. 대다수 국민이 노태우의 군사독재에 반대하던 시절이었으니까요.”

그는 경찰에 의해 친구를 잃는 일도 겪었다. 그 사건은 그에게 충격과 함께 세상을 바꿔야 한다는 의지를 더욱 불타게 했다.
“희생된 친구들이 주는 정신적 충격이 엄청났어요. 온몸으로 사회의 모순을 체감하게 됐고 그 해결책을 당시에는 총학생회에서 발견했어요.”
조근조근하게 이야기하던 그의 어조가 강해지는 것 같더니 눈빛이 빛난다. 혼란스러웠던 당시의 시대 상황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러던 중 그는 1995년, 24대 총학생회장으로 당선된다.

“한총련 활동 중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2년 6개월 간 감옥신세를 지게 됐어요. 교도소에서 지내던 그 시간 동안 참 많은 생각들을 했어요. 어쩌면 교도소에 다녀온 덕분에 지금 변호사가 될 수 있었던 걸지도 몰라요.”

‘미친놈’ 소리 들으며 품은 꿈, 변호사
“교도소에서 지내면서 사회에 나가서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고민을 많이 했어요. 어떤 활동을 할 것인지도 고민하고요.
비록 공학도지만 대학시절 사회운동을 해왔기에 변호사라는 직업이 사회운동을 하는 도구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졸업 후에도 도전을 하며 살고 싶다는 생각도 했고요.”

그의 변호사라는 꿈은 그렇게 시작됐다. 어찌 보면 무모하기만 한 젊은이의 패기라고 할 수도 있다. 그 당시 공대 출신으로 사법고시에 합격한 사람은 한 명 뿐이었다.

그는 1998년에 출소한 뒤 복학해 2000년 학교를 졸업했다. 졸업하는데 근 10년의 세월이 걸린 그의 학점은 2.4 정도였다. 졸업학점은 거의 꼴등이었던 셈이다. 그런 그가 돌연 사법고시를 보겠다고 나서니 주변에서 ‘미친놈’이란 야유가 쏟아졌다.

“아버지의 반대도 심했어요. 그 당시 사촌형과 먼 친척 아저씨 한 분이 법대를 나온 뒤 사법고시를 10년 공부하다 실패했거든요. 법학 수업 한번 들어본 적 없는 놈이 교도소 다녀와서 10년 만에 졸업하고는 사법고시를 본다니 반대하실 만도 하죠. 1차 시험까지는 변리사 준비를 한다고 숨겼어요.”

하지만 그는 주변의 야유와 조롱을 뒤로하고 졸업 2년 만에 사법고시 합격을 이뤄냈다. 스스로도 믿기 힘든 성취였다. 합격의 비결을 묻자 “죽자 살자 공부했다”는 대답이 돌아온다.
합격하지 않으면 살아갈 방법이 없었다는 그는 그야말로 고시에 ‘올인’했다. 법대 출신 사이에서 고독하고 겸손하게 공부했다는 그는 법대 출신보다 빨리 합격한 쾌거를 이룰 수 있었다.

끝나지 않은 법조인으로서의 꿈
과거를 쭉 훑어 내려오니 변호사로서의 현재 그의 모습이 궁금하다. 공대 출신 변호사인 만큼 일반 변호사들과 어딘가 다른 점이 있을 것 같다. 그는 공학적 마인드가 득이 됐다고 말한다.
“공학을 전공했기에 아무래도 일반 법학 전공자보다 공학적 마인드가 뛰어나 특허나 지적재산권 분야에 있어서 법의 해석과 적용이 용이한 것 같아요.”

교도소 수감시절, 사회운동을 위해 법조인을 결심했던 그는 지금도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이하 민변)’에 가입해 활동하는 등 그때의 시대정신을 잊지 않으려 노력하고 있다. 촛불집회에 대한 변론도 맡고 있다.

“공부할 때 가졌던 마음가짐에 비해서 지금 모습은 형편없어요. 막상 가정이 생기고 나니 사회운동에 전력을 쏟는다는 것이 생각처럼 쉽지 않더라고요. 민변활동을 하는 등 노력하려고 하지만 말처럼 쉽진 않아요.” 여전히 젊은 시절의 마음을 잊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그는 그가 그랬듯 지금의 대학생들에게 도전과 다양한 경험을 권한다.

“항상 도전정신을 가졌으면 좋겠어요. 젊었을 때 도전하지 않으면 시간이 흐를수록  안주하려고만 한다는 걸 살면서 깨달았어요. 도전할 수 있는 모든 다양한 경험을 한다면 꿈을 찾고 그 꿈을 이룰 수 있을 거라 확신합니다.” 

사진 최서현 기자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