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은 효용보다 인간의 회복 우선해야
대학은 효용보다 인간의 회복 우선해야
  • 이시담 기자
  • 승인 2009.11.21
  • 호수 130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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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데거가 본 교육의 상업화

나는 존재란 무엇인가에 대해 계속해서 고민해왔다. 자타가 공인하는 내 주 저서가 「존재와 시간」이라는 점에서 볼 수 있듯이 존재에 대한 고민은 내 사유의 가장 큰 중심이다. 경제적 논리로 따지면 철학은 필요없는 학문이다. 철학의 성과는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존재에 대한 고민을 빼면, 철학을 빼면 인간에게는 무엇이 남는가.

이러한 관점에서 중앙대의 대학 구조조정 논란은 씁쓸하게 느껴진다. 지난달 27일 박용성<중앙대> 이사장은 교수들이 구조조정에 합의하지 않으면 상의 하달 방식으로 이를 추진하겠다는 내용의 이메일을 보냈다. 경영대의 인원 증원, 문과대와 자연대의 소멸 등의 내용이 퍼지며 갈등은 더욱 커졌고 문과대, 자연대, 공대에서 항의 성명을 내기에 이르렀다. 문과대 및 자연대의 소멸은 사실무근으로 밝혀졌지만 학문을 효용에 따라 취급하고 없앨 수 있다는 가능성은 큰 충격을 줬다.

이는 학문의 본질을 무시한 발상이다. 모든 학문은 철학에서 태어났다. 철학은 오직 인간에게만 가능한 학문이다. 인간만이 자연 전체의 존재의미와 존재근거에 대한 이해를 통해 자연과의 새로운 조화를 이룩하려는 열망이 있다. 이 열망을 해소하려는 시도는 다양한데, 이성을 통해 자연과 새로운 조화를 성취하고자 하는 시도를 형이상학이라고 부를 수 있다. 형이상학은  동물도 아닌 인간인 이상 자연스럽게 추구할 수밖에 없는 학문이다.

현대인은 과학과 기술로 세계의 객관적인 작용법칙을 파악하고 그것을 응용해 죽음과 질병, 천재지변을 제거하고자 노력해왔다. 이러한 현대 과학은 서구의 전통 형이상학의 전제를 극단까지 밀고 나간 결과물로 볼 수 있다. 전통 형이상학에서 인간은 이성을 통해 절대자들이 존재한다는 궁극적인 근거를 찾아내 존재자들이 갖는 낯설음을 제거하려 한다. 여기서 형이상학은 인간이 낯설음에 대해 갖는 불안감을 제거하는 도구로 사용된다. 현대 과학에서는 이것이 극단화 됐다고 볼 수 있다.

그 결과 현대 과학은 전통 형이상학을 배척하고 있다. 존재자의 근거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과학은 전체와의 합일이 아니라 전체의 지배와 통제를 통해 세계에 대한 인간의 공포를 없애려 했다.

그러나 이는 지배자의 자리만 만들뿐 인간의 마음의 고향, 안식처를 없애 버렸다. 현대의 과학기술문명에서 존재자, 즉 자연은 인간이 자신의 지배영역을 확대시키기 위해 이용하는 부품으로 전락한다. 존재자의 고유한 본질은 무시되며 인간역시 마찬가지다. 여기서 개개의 인간은 계산가능한 에너지의 집합체로 간주된다. 현대 문명은 외면적으로는 번창하고 있으나 공허가 그 이면을 지배하는 것이다.

과학기술문명은 인간의 고향을 황폐하게 만들었다. 때문에 철학은 기존의 철학과 대결하며 ‘고향’을 회복해야 한다. 이를 위해 인간은 현존재로서 존재의 근본 힘을 인수하면서 이를 통해 존재자가 그 자체로서 자신을 개시하도록 도와야한다. 지배에의 의지가 아니라 존재와 존재자가 그 자체로서 현존하도록 하려는 자세가 현존재로서의 인간을 특징짓는 것이다.

박 이사장은 지난 20일 중앙일보의 칼럼에서 앞설 수 있는 학생에게 그에 맞는 기회를 주겠다고 공언했다. 그러나 물질적으로 앞서는 것만이 진실로 앞서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고려할 때 박 이사장은 구조조정을 외치기 전에 인간의 존재이유를 찾게 해주는 진정한 교육에 대해 고민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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