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윤리와 자기결정권 사이의 존엄사
생명윤리와 자기결정권 사이의 존엄사
  • 차진세 기자
  • 승인 2009.11.08
  • 호수 130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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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할머니 사건으로 시작된 존엄사 논쟁 되돌아보기

폐종양 조직검사를 위해 세브란스병원을 찾은 김 할머니가 작년 2월 과다출혈, 저산소증에 의한 뇌 손상으로 식물인간 상태에 빠졌다. 이에 김 할머니 가족은 “의료진 과실로 인해 식물인간 상태에 빠졌다”며 병원 측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또 환자 측은 이와 더불어 ‘무의미한 연명치료 중지’ 가처분 신청을 하는 동시에 “존엄사 관련법이 없는 것은 헌법이 보장하는 행복추구권의 원칙에 위배된다”며 헌법 소원까지 제기했다. 재판을 거듭한 끝에 대법원에서 “인공호흡기를 제거하라”는 판결이 지난 5월 선고됐다. 결국 6월 23일, 세브란스 병원 측은 김 할머니의 인공호흡기를 제거했다.

그러나 당초 3시간 내지 하루 내로 김 할머니가 숨을 거둘 것이라는 예상은 빗나가고 말았다. 김 할머니는 여전히 의식불명 상태에 빠져있지만 인공호흡기 제거 후 130여일이 지난 현재까지 사망하지 않고 있다. 세브란스 병원 관계자는 “김 할머니는 인공호흡기를 제거한 직후 일시적으로 위험한 상태에 빠지기도 했으나 점차 호흡과 맥박이 회복돼 현재의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고 밝혔다.

‘존엄사’에서 ‘무의미한 연명치료 중단’으로
김 할머니가 생존 상태를 오래 유지하자 사건의 논점은 김 할머니가 존엄사 대상에 해당되는지로 옮겨 갔다. 지난달 21일 김 할머니가 호흡을 2분여 간 멈춰 의료진이 산소 호흡기를 이용해 일시적으로 할머니의 호흡을 도운 일이 있었다. 이를 두고 일부에서는 ‘산소 공급이 존엄사 판결의 취지에 어긋나는 것은 아닌가’라는 의견이 제기됐다. 이에 대해 김 할머니 가족은 “일시적으로 산소를 공급한 것은 호흡기에 의해 호흡하는 것과는 다르다”며 “지속적인 호흡기 사용이나 심폐소생술 등의 적극적인 방법을 사용하지 않겠다는 것”이라고 답했다.

이석배<단국대ㆍ법학과> 교수는 “존엄사라는 용어를 사용하다 보니 ‘여전히 할머니가 살아 있는데 왜 존엄사냐’라는 얘기가 나온다”며 “호흡기를 제거하고도 자발호흡을 하는 김 할머니를 보며 국민들이 당혹해 하는 이유도 존엄사라는 단어에 내포된 죽음의 의미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또 이 교수는 “존엄사는 ‘의사 조력 자살’로 해석될 우려가 있다”며 “이는 환자의 죽음을 앞당기는 안락사와 혼동될 수 있는 의미다”라고 설명했다.

이렇듯 김 할머니의 인공호흡기를 제거하라는 법원의 판결 이후에도 존엄사에 관련된 개념과 용어의 혼란은 계속되고 있다. 이에 한국보건의료연구원은 ‘존엄사’라는 용어 대신 그것을 축소한 의미인 ‘무의미한 연명치료 중단’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기를 권고했다.

‘무의미한 연명치료 중단’이란 회복 불가능한 사망의 단계가 임박했을 때 의학적으로 불필요하다고 판단되는 기계호흡이나 심폐소생술을 중단한다는 의미다. 연명치료를 중단 하더라도 간접적인 산소 및 영양 공급은 계속 이뤄진다. 존엄사에 내재된 ‘죽음’이라는 조건을 완화한 셈이다. 환자의 죽음을 직ㆍ간접적으로 조장하는 안락사와 이 부분에서 차이가 있다.

무의미한 연명치료 중단에 대한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 내기 위해 지난 9월 대한의사협회와 대한병원협회, 대한변호사협회 등이 ‘연명치료 중지에 관한 지침’을 제시했다. 이 지침은 무의미한 연명치료 중단의 원칙으로 △환자 본인의 결정과 의사의 의학적 판단 △환자의 질환 및 치료 방법에 대한 적절한 정보와 설명 △의도적으로 생명을 단축하거나 환자의 자살을 돕는 행위 금지 등의 조항을 제시했다. 더불어 연명치료 중단의 대상 환자를 말기 암ㆍ에이즈ㆍ뇌사ㆍ식물인간 상태 등으로 정하고 연명치료 중단의 심의 절차를 △심폐소생술 미시행ㆍ인공호흡기 사용 중단 △뇌사 여부 △(환자의)명시적 의사 표시 △추정적 의사 △병원윤리위원회 회부의 순으로 명시했다.

이러한 연명치료 권고안이 제시된 이후에도 존엄사에 대한 논란은 끊이지 않고 있다. 찬성 측 입장인 강남석<조계종ㆍ불교생명윤리위원회> 위원은 “과거 고승들도 음식을 끊고 열반에 든 경우가 많다”며 “무의미하게 생명을 연장하려는 시도는 생에 대한 집착이기 때문에 불교적 가치관과도 맞지 않다”고 전했다.

반편 장봉훈<한국천주교ㆍ생명윤리위원회> 주교는 “온갖 수단을 다 동원해 죽음으로부터 도망치라는 것이 하나님의 뜻은 아닐 것”이라면서도 “무의미한 연명치료의 중단을 비롯한 존엄사 논의가 하루라도 삶을 이어가길 바라는 중환자들에게 부담을 주는 것은 아닐까 우려된다”고 견해를 밝혔다.

웰다잉, 아름답게 생을 마치려는 노력
‘무의미한 연명치료 중단’의 실시와 더불어 임사체험을 비롯한 웰다잉에 대한 관심도 늘어가는 추세다. 임사체험은 영정사진을 찍고 유서를 쓰고 수의를 입은 뒤 관에 들어가 삶을 돌아보는 과정으로 진행된다. 임사체험 외에도 인생 그래프, 후손에게 자신을 소개하는 글 쓰기 등 어렵지 않은 방법이 웰다잉의 하나로 소개되고 있다.

김기호<아름다운삶> 대표는 “웰다잉은 ‘아름답게 죽음을 맞이하자’는 운동이지만 역설적으로 하루하루의 충실함을 사람들에게 일깨워주기도 한다”며 “임사체험을 비롯한 웰다잉은 노년층뿐만 아니라 젊은 층에게도 큰 관심을 끌고 있다”고 말했다. 또 김 대표는 “체험 중 통곡을 하는 분들이 많다”며 “당사자에게는 삶을 돌아보고 다른 삶을 살기 위한 계기가 되는 것 같다”라고 설명했다.

웰다잉문화연구소에서는 △영정사진을 준비한다 △유언장을 작성한다 △존엄서와 사진의료지시서를 작성한다 △평소에 죽음에 대하여 사색하며 웰다잉 할 수 있도록 노력한다 등 7개 목록으로 구성된 ‘웰다잉 지침서’를 만들었다. 김조한<웰다잉문화연구소> 소장은 “존엄사 논란은 죽음을 우리 가까이에 놓는 계기가 됐다”며 “죽음은 더 이상 무겁고 동떨어진 주제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일러스트 주소희 기자
자료제공 : 보건복지가족부(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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