징크스와 터부로부터의 자유
징크스와 터부로부터의 자유
  • 한양대학보
  • 승인 2009.11.01
  • 호수 1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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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형중<의대 의학과> 교수
세상에는 꼭 해야 될 일보다 하지 말아야 할 일들이 훨씬 더 많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순간부터 자신의 생각과 행동을 끊임없이 검증받게 된다. 교양인으로 살아가려면 좁은 선로 안에서 옆 사람 어깨에 부딪치지 않게 눈치보고 의식하면서 조심조심 걸어야만 한다.

그러다보면 옛날 검정교복 목을 옭매던 금속성 호크처럼 조금만 움직여도 스치는 기분 나쁜 기억을 떠올리게 된다. 과도한 눈치의 결과로 아직 생기지도 않은 일을 이솝우화의 여우처럼 극단적인 자기합리화로 사고예방의 기쁨을 누리는 방어기제도 생길 수 있다.

징크스는 일단 만들어지면 프렉탈처럼 무한히 자기복제를 해 유사한 상황에서 데자뷰 현상을 유발시켜 줄곧 심리적 압제로 작용해 반항할 수 없게 만든다.

지인소개 환자에서 이상하게 문제가 더 발생한다는 VIP 증후군, 의사 앞에서 유달리 고분고분한 환자 보호자들은 뒤통수를 치는 경우가 오히려 더 많다는 등의 감성적이고 후향적 분석에 의거한 징크스는 이미 의료계의 잘 알려진 불문율이다.

징크스는 몇 차례의 경험을 거쳐 입증되고, 유사한 예가 잇따라 알려질수록 더욱 공고해진다. 원래 귀가 얇은 동물인 인간은 ‘카더라통신’에 약하며 자기최면의 발원지이며 동시에 수혜자가 되는 운명을 타고 난 듯하다. 그래서 긍정적인 구호보다는 “밤에 혼자 엘리베이터 거울을 보면…” 류의 부정적인 삽화전개에 약한 듯하다.

언제부터인지 모르겠으나 출근할 때 신호등에 연속 세 번 걸리면 하루 종일 재수가 없고, 오늘의 운세에 좋지 않은 것이 있으면 수술이 꼬이곤 했으며, 손 닦기 전에는 반드시 워밍업으로 컴퓨터의 카드 게임을 세판 연속으로 깨뜨려야 한다는 강박감이 생겼다.

그 중에 압권은 외국 상표가 선명히 새겨진 붉은 색 트렁크팬티를 입지 않으면 수술을 망친다는 기담이다. 붉은 색이 재물운도 있고, 수술 중에 피가 튀어도 잘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 이유였다. 그러다 보니 어려웠던 수술에서 동고동락을 했던 바, 정규수술이 잡혀 있지 않아도 입지 않으면 왠지 불안해지곤 하였다.

어느 오후 연구실. 서너 가지 일을 함께 벌여 놓고 연신 시계를 보고 있는데 전화가 걸려왔다. 상태가 좋지 않은 VIP환자라서 수술실로 직행했다. 어렵사리 수술이 끝나고 탈의실에서 옷을 갈아입으면서 역시 붉은 색이 내겐 행운을 가져다준다고 생각한 순간, 아침에 아들과 서로 속옷을 바꿔 입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십년간 쌓아놓았던 공든 징크스가 와르르 무너져 버리면서 체육시간에 옷 갈아입으며 황당해 할 아들 얼굴이 떠올랐다.

지금도 붉은 색을 선호하지만 예전만큼은 아니다. 바쁘면 카드 게임을 생략하기도 한다. 징크스와 터부는 자기 자신을 재점검하고 분석할 기회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중요하지만 시지프스의 바위나 아틀라스 어깨 위의 지구처럼 스스로를 구속하는 말이 씨가 되는 쥐덫이 돼서는 곤란하겠다.
가끔 다른 색의 아들 속옷을 입고도 결과에 만족해하는 착각도 필요하리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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