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기의 설레임, 꾸준한 레벨업의 롤플레잉
신학기의 설레임, 꾸준한 레벨업의 롤플레잉
  • 취재부
  • 승인 2005.08.29
  • 호수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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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위원│정규원 <법대·법학과> 교수

나는 컴퓨터게임을 즐겨한다. 논문을 쓰는데 진도가 잘 나가지 않거나 뭔가 일이 잘 풀리지 않고 문제의 해결책이 떠오르지 않을 때 나는 습관처럼 컴퓨터를 켠다. 사실 내가 컴퓨터를 사용하는 주된 목적은 원고작성 보다는 게임이다. 그렇다고 내가 게임을 무척 잘 하는 것은 아니다. 그냥 즐기는 것이다. 그런데 나는 컴퓨터게임을 하면서 몇 가지 특성을 보이는 것 같다.

첫 번째는 복잡한 게임은 절대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특히 시뮬레이션게임은 의도적으로 피한다. 주로 야구게임이나 롤플레잉게임을 하는데 가능하면 단순화하여 게임을 진행시킨다. 내가 이와 같이 단순하게 게임을 진행시키는 데에는 특별한 이유가 있다. 이상하게도(?) 나는 책을 읽거나 논문을 읽으면서 생각을 떠올리지 못한다. 아무 생각 없이 마우스를 움직이고 있거나 운전대를 잡고 있을 때 새로운 아이디어들이 내 머릿속에서 살며시 고개를 드는 것이다. 그러니 복잡한 게임은 피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은가.

내가 컴퓨터게임을 하면서 보이는 또 다른 특성은 대부분의 경우 하나의 게임을 두달 이상 지속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는 것이다. 특히 롤플레잉의 경우에는 그렇다. 온라인게임을 하는 사람들은 다 경험하여 본 느낌이겠지만 처음 프로그램을 다운받아 인스톨할 때의 설레임이란. 이제 새로운 나의 분신을 창조하고 새로운 세계에 진입하기 위한 간단한 트레이닝을 받는다.

그리고는 또 다른 세계에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는 것이다. 일단 몇 차례의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레벨을 올려가고 보다 성능이 좋은- 혹은 뽀대나는 -  아이템을 획득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 전략을 고안한다. 그런데 어느 정도 레벨이 오르면 고민에 빠지기 시작한다. 도대체 내가 뭐하는 짓이지? 처음에는 하루에도 몇 차례나 업되던 레벨이 일주일에 한 번도 업되기 어렵고 어제도 오늘도 그 아이템이 그 아이템이다. 이쯤 되면 나는 또 다른 게임을 찾아 인터넷을 헤맨다. 재미있고 참신한 새로운 게임이 없나? 내가 하나의 게임을 두 달 이상하지 못하는 것에 대하여 내가 끈기가 없다거나 진득하지 못하다는 비난을 하는 친구들에게 나는 이렇게 대답한다.

도대체 시나리오가 튼튼하지 않아서 재미가 없어. 하지만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꼭 그것만도 아닌 것 같다. 처음 게임을 다운받아 인스톨할 때의 설레임은 사라지고 매일 똑같은 마우스작동을 반복하면서 단순 막노동을 하면서 느끼는 익숙함 때문은 아닌가?            밤잠을 설치게 하던 더위도 한풀 꺾이고, 도심의 소음이 되어버린 매미소리도 잦아드는 것을 보니, 또 한 계절이 지나가는 모양이다. 학교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여름이 지나가는 것은 또 다른 학기가 시작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맘때가 되면 학생들은 새로운 학기의 시간표를 작성하느라 온갖 정보를 분석하고 있을 것이고 나는 새로운 학기의 강의준비에 마음 졸이고 있다. 지나간 학기들을 생각해 보면 매 학기의 시작에 나는 여러 가지 새로운 계획들을 떠올리고 고민했었다. 하지만 중간시험 정도가 되면 인스톨하였던 게임프로그램들을 삭제하고 싶은 것과 같은 유혹에 빠지고 한다.
그러나 현실의 삶은 인스톨된 게임을 삭제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새로운 삶을 살도록 허용하지는 않는다. 가만 생각해 보면 또 다른 세상의 내가 어느 날 갑자기 레벨 1에서 레벨 30으로 업되는 기적은 결코 발생하지 않는다.

레벨 30에 이른 캐릭터는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수많은 퀘스트와 전투를 거치면서 그 단계에 이른 것이다. 현재의 우리의 모습은 지나간 과정들의 결집체이다. 축적된 경험치들이 어느 순간 레벨업이라는 질적 변화를 일으키듯이 하나하나 모아온 조그마한 경험들이 우리 삶의 질적 변화를 일으키는 것은 아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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