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단계의 유혹에 빠지다
다단계의 유혹에 빠지다
  • 서정훈 기자
  • 승인 2009.09.27
  • 호수 130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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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다단계 피해자가 겪은 이야기


우리 주변에는 불법 다단계 업체에서 구입한 물건 때문에 피해를 보는 사람들도 많지만 다단계 업체에서 실제 활동을 하다 손해를 입은 피해자들도 많다. 이 이야기는 그 중 한 명의 이야기를 각색해 재구성한 것이다.

경기가 어렵다는 말, 취업이 바늘 구멍 뚫기라는 말. 모두 나에게는 해당되지 않을 줄 알았다. 서울에 있는 대학을 다니고 학점도 나름 괜찮은 편에 속했기에 졸업 후 백수로 살 것이란 생각은 꿈에도 해보지 못했다. 최종 면접까지 올라간 횟수도 여러 번, 하지만 결과는 언제나 낙방이었다.

집에 들어가면 부모님 얼굴 뵙기 민망하고 학교에서도 죄다 취업 성공 얘기만 들리니 나만 인생의 패배자가 된 기분이다. 미취업자로 졸업하는 불명예졸업은 먼 나라 이야긴 줄 알았는데 내가 그 당사자가 되니 자괴감만 든다.

그렇게 하루하루를 무료하게 보내던 어느날, 고등학교 동기 녀석에게 전화가 왔다. 연락이 끊겼던 친구였는데 먼저 연락이 오다니 반가운 마음이 앞서 전화를 받았다. 안부를 물으며 시작된 전화는 고등학교 때 추억 이야기로 넘어갔고 나는 과거의 행복했던 기억에 젖어 친구와 한참을 웃고 떠들었다. 꽤 오랜 시간 통화 후 갑자기 친구의 목소리가 진지해진다. “요즘 뭐하고 지내?”라는 친구의 물음에 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잠시간의 침묵 끝에 친구가 달콤한 제안을 건넨다. “내가 지금 일하고 있는 회사 사장님께 널 추천해줄게. 우리 같이 일해보자.” 작은 회사라지만 백수 탈출에 성공한 것만으로도 너무 기뻤다.

친구를 따라 들어간 그 회사는 생각보다 큰 규모의 회사였다. 테이블이 여러 개 있었고 각 테이블마다 투자자들이 북적이고 있었다. ‘작지만 튼튼한 회사’라는 설명에 믿음이 갔다. 자리에 앉아 부장이라는 사람의 설명을 듣다보니 회사가 참 가족 같은 분위기라 좋은 것 같다. 내가 본래 가고 싶었던 직장은 이것보다 훨씬 좋은 곳이었지만, 첫 시작을 이곳에서 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맡은 일은 핸드폰을 판매하는 일이었다. ‘핸드폰 회사 판매 전략의 허점을 이용해 핸드폰을 싸게 살 수 있다’고 사람들에게 광고한 뒤 물건을 팔면 되는 일이었다. 전략의 허점이 무엇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었으나 취직한 기념으로 주변 사람들 핸드폰이나 싸게 바꿔주라는 부장의 말에 혹해 자비로 물건을 구입한 뒤 친구들에게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친구를 한 2명만 더 모아봐. 그러면 친구들은 10만원 주고 핸드폰 사도 넌 3만원에 살 수 있게 해줄게. 10만원에 최신 휴대폰을 살 수 있는 기회 흔치 않아. 친구들 모으면 연락해줘.” 이런 전화를 하루에 몇 통이나 건지 모른다. 싼 가격에 최신형 핸드폰을 준다는 나의 말에 친구들은 어느새 기기 값을 통장으로 입금했고 하루 만에 꽤 많은 돈을 벌 수 있었다. 하지만 그때부터 뭔가가 이상했다. 돈이 들어오고 난 뒤 부장의 태도는 돌변했다. 본사의 감시망을 피하려면 친구가 핸드폰 값을 일단 모두 지불해야 하며 부가서비스 이용도 필수라고 했다. 한달 후 더 낸 돈은 친구 계좌로 보내주니 걱정 말라는 말도 덧붙였다. 의심스러웠지만 일단 부장 말대로 친구에게 연락을 했고, 친구는 의심 없이 돈을 보내줬다.

시간이 흐르고 친구의 독촉 전화가 잦아진다. 부장에게 물어봐도 ‘잠시만 기다리라’는 답변 뿐. 기껏 직장을 얻어 일을 시작했는데 난관에 부딪힌 것 같아 초조하다. 집에 돌아가는 길 독촉 전화를 피하느라 잘 열어보지 않던 핸드폰을 꺼냈다. 어릴 때부터 친하게 지내던 친구의 문자가 도착해 있다. ‘그렇게 살지마’라고 적힌 여섯 개의 글자를 보니 눈물만 날 뿐이다. 모두에게 도움이 될 줄 알았는데 이런 결과가 나오니 하늘이 무너진 것 같다.

결국 부모님께 손을 벌려 친구들에게 돈을 돌려줬다. 그때만 생각하면 간담이 서늘하다. 친구들 볼 낯도 없다. ‘직장을 구했다’는 기쁨도 잠시, 이제 사람 만나는 것 조차 두렵다. 왜 사람들이 다단계를 보고 돈도 잃고 사람도 잃는 지름길이라고 표현하는지 직접 겪어보니 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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