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트맨, 질서와 규범의 마지막 수호자
배트맨, 질서와 규범의 마지막 수호자
  • 차진세 기자
  • 승인 2009.09.13
  • 호수 130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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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뇌하는 영웅 배트맨을 다시 바라보다

부패ㆍ탐욕ㆍ범죄로 썩은 가상의 도시, 고담시를 지키는 영웅이 있다. 그러나 그는 다른 영웅과는 달리 초능력도 없고 영웅으로서의 자긍심도 없이 항상 고뇌한다. 그렇기에 가면 뒤에 숨어 밤에만 활동하는 영웅, 그가 바로 ‘배트맨’이다.
1939년, 만화가 밥 케인과 스토리 작가 빌 핑거가 당시 인기를 끌던 「슈퍼맨」 시리즈에 대적할만한 캐릭터를 만들기 위해 창조한 「배트맨」은 이후 70년 동안 만화와 TV드라마, 영화 등으로 제작돼 세대를 뛰어넘는 인기를 끌고 있다.

만화에서 스크린으로, 배트맨의 역사
블록버스터 영화 「배트맨」은 1970년대 후반에 「배트맨」 탄생 50주년을 기념해 제작자 마이클 우슬란이 DC코믹스로부터 영화화를 위한 판권을 구입함으로써 시작됐다.
그 이후 만들어진 배트맨 영화는 총 6편이다. 팀 버튼 감독의 「배트맨」(1989)ㆍ「배트맨 리턴즈」(1992), 조엘 슈마허 감독의 「배트맨 포에버」(1995)ㆍ「배트맨&로빈」(1997),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배트맨 비긴즈」(2005)ㆍ「다크나이트」(2008)가 그것이다. 민용준<무비스트> 기자는 “이전에 「배트맨 더 무비」(1966) 등이 TV시리즈물의 극장판으로 제작된 적이 있었지만 배트맨 시리즈의 주제와 전혀 맞지 않는 밝은 분위기로 연출한데다 영화로써의 질 또한 현저히 낮다”고 말했다.
팀 버튼의 「배트맨」은 만화의 주제의식을 제대로 살린 최초의 영화로 평가받는다. 60년대의 만화 「배트맨」은 같은 회사의 작품 「슈퍼맨」의 영향을 받아 배트맨이 정의감에 넘치고 심지어 대낮에 활동하는 등, 본래 철저히 인간적인 모습으로 고뇌해야할 배트맨의 정체성을 무너뜨린 모습으로 표현됐다. 그 영향으로 「배트맨 더 무비」와 같은 작품이 등장했다.
반면 팀 버튼은 경기 침체, 전쟁 위협 등으로 비관주의와 암울함에 빠진 미국의 상황을 반영한 70년대의 배트맨을 선택해 배트맨을 원래 위치로 되돌렸다.
「배트맨」은 만화에서 영화로 옮겨지면서 몇 가지 모습 및 배경이 수정됐다. 우람한 근육질의 만화 속 배트맨과 달리 왜소한 체격의 코미디 배우인 마이클 키튼을 배트맨으로 캐스팅한 점, 배트맨의 친부모가 생계형 강도에게 살해당한 설정을 악당 조커가 살해한 것으로 바꾼 점, 과거가 전혀 알려져 있지 않고 어떤 신분도 없는 조커에게 실명과 신분을 부여한 점 등이 그것이다.
김세훈<세종대ㆍ만화애니메이션학과> 교수는 “이와 같은 차이점은 배트맨 원작 팬들에게 큰 반감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며 “그리하여 조커와 배트맨의 과거사 부분은 「배트맨 비긴즈」에서 원래 설정대로 수정됐다”고 전했다.
반면에 팀 버튼 이후 조엘 슈마허가 감독한 두 배트맨 작품은 60년대의 배트맨으로 회귀했다. 암울한 분위기를 벗어던지고 만화적인 익살에 중점을 둔 것이다. 민 기자는 조엘 슈마허의 「배트맨」에 대해 “배트맨이라는 캐릭터를 내세운 단순한 영웅놀이”라며 “영화적으로 특별히 논할 것이 없다”고 비판했다.
4편 「배트맨&로빈」의 실패 이후 8년간 배트맨은 영화로 만들어지지 않았다. 그 공백을 깨고 배트맨은 2005년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프리퀄(1편 영화의 이전 이야기를 다룬 속편) 「배트맨 비긴즈」로 재등장했다.
민 기자는 “크리스토퍼 놀란의 「배트맨 비긴즈」와 「다크나이트」는 팀 버튼의 「배트맨」과 비교했을 때 배트맨 원작 만화의 주제의식에 상대적으로 충실하다”며 “극도로 현실적으로 장면을 표현하는 것도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특징이다”고 전했다. 민 기자는 크리스토퍼 놀란의 현실적 표현에 대해 “팀 버튼의 조커는 어릴 적에 독성 약품에 빠진 설정으로 광대같은 얼굴을 선천적으로 갖고 있다”며 “이에 반해 크리스토퍼 놀란의 조커는 화장이라는 현실적 설정을 통해 팀 버튼의 상상적 설정과 거리를 뒀다”고 설명했다.

라이벌, 배트맨 vs 조커
만화의 전제에 충실함으로써 「배트맨 비긴즈」와 「다크나이트」는 원작의 갈등 구조에 가장 가까이 다가섰다. 그리고 배트맨 개인의 탄생과 고뇌를 다룬 「배트맨 비긴즈」를 넘어 후속작 「다크나이트」에 이르러는 주요 캐릭터인 배트맨과 조커, ‘투페이스’ 하비 덴트의 성격이 극명하게 드러난다.
「다크나이트」의 세 주요 인물들은 결코 같을 수 없는 존재이면서도 공통점을 갖고 있다. 그들은 모종의 권력을 가진 존재이며 누구도 정의나 폭력을 일관되게 추구하지 않는다. 배트맨은 낮에는 합법적인 모습으로, 밤에는 불법적인 모습으로 이중성을 보인다.
하비 덴트는 검사로서 고담시의 정의를 수호하다가 조커의 계략에 빠져 불법과 폭력의 괴물 ‘투페이스’로 전락한다.
또한 조커는 전적으로 악행만을 저지르지만 그의 관념은 ‘선’과 ‘악’이라는 틀에 가둘 수 없는 영역에 놓여있다.
특히 조커는 다른 영웅 영화의 악당과 전혀 다르게 악행의 구체적인 목표가 없다. 세계정복도, 심지어 배트맨의 죽음도 조커의 궁극적인 목표는 아니다.
그는 운의 영역에 자신을 완전히 내맡기며 무엇에도 연연하지 않는다. 영화 극초반에 조커는 은행을 털다 자신이 고용한 악당에게 죽을 위기를 맞는다. 악당이 곧장 총을 쐈다면 조커는 죽었을 것이다. 예측할 수 없는 상황에서 그는 은행으로 치고 들어오는 버스에 의해 구출된다. 또 중반부에 조커는 무일푼이면서도 기껏 얻은 돈을 아무 거리낌 없이 태워버린다. 조커는 어떠한 규범과 법칙, 조직도 인정하지 않고 오로지 혼돈만을 극단적으로 추구하는 존재로 그려진다.
배트맨과 조커는 영화에서 가장 대립각을 세우는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행동 양상에 있어서 상당한 공통점을 보인다. 배트맨조차도 규범과 질서의 수호라는 목표를 위해 온 도시를 감시하며 때로는 파괴하는 극단성을 드러낸다. 영화 중반 조커는 구치소에서 배트맨과 대면해 서로의 이러한 공통점을 설명한다.
“결국 너도 나와 같아. 지금은 저들이 너를 영웅으로 숭상하고 있지만 말이지”-「다크나이트」 中
<한겨레>에 관련 칼럼을 기고한 정정훈 변호사는 “기본적으로 영웅에 의한 ‘법치’는 없다”며 “권력의 괴물화를 은폐한 배트맨의 선택은 오히려 법치의 정신에 반하는 것이다”라고 평했다.

「배트맨」에 대한 비판적 이해
조커는 배트맨이 있어야만 존재의 이유를 가지는 인물이다. 영화에서 조커는 완전히 독립적으로 행동하는 듯 하지만 결국 그 행동의 모든 초점은 배트맨에게만 맞춰져 있다. 요컨대 영화 내에서 조커에게 주체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조커 스스로도 그 점을 인지하고 있다.
“넌 날 완전하게 만들어”-「다크나이트」 中
정 변호사는 “영화 내에서 조커는 ‘파괴’만을 논할 뿐 그 결론을 내린 과정이 드러나지 않는다”며 “이것은 조커라는 인물이 지배자의 입장에서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존재로 인식되기 때문일 것”이라고 전했다.
정 변호사와 유사한 맥락에서 배트맨의 정치관을 파시즘과 연결 짓는 이들도 있다. 배트맨 매니아 김용혁<인문대ㆍ철학과 05> 군은 “「다크나이트」의 정치관은 권력의 공백을 선의의 거짓말로라도 채워야 한다는 것이다”며 “하비 덴트의 죽음을 영웅화하려는 것은 이와 같은 맥락이며, 이는 소수의 영웅이 대중을 좌우한다는 파시즘의 논리와 동일하다”고 말했다.
어떤 사람들은 ‘영화는 영화일 뿐이다’라며 영화를 단순히 눈으로만 즐기려 할지 모른다. 하지만 영화는 물론 모든 대중 및 예술 작품에는 나름의 철학적 의미가 존재한다. 그것이 평단으로부터 대중성과 철학성 모두를 인정받은 「다크나이트」와 같은 영화라면 더욱 그러하다. 영화를 단지 시각적으로만 바라볼 것이 아니라 그에 내포된 의미를 나름대로 분석해본다면 영화를 새롭게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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