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양대학보의 살아있는 역사를 듣다
한양대학보의 살아있는 역사를 듣다
  • 차진세 기자
  • 승인 2009.09.06
  • 호수 13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1호ㆍ200호ㆍ1000호 제작한 동인과의 만남

본지는 지난 1959년 1호 창간호부터 시작해 100호씩 발행될 때마다 특집호를 제작했다. 1호부터 1300호까지 총 14편의 특집호는 본지가 이제껏 걸어온 길을 보여주는 중요한 지표다. 이에 본지의 역사에서 중요한 시기인 1호, 200호, 1000호를 펴낼 당시 신문 제작에 참여했던 동인을 만나 각 특집호 제작 당시의 일화를 들어봤다.

한양대학보의 시작 - 1호

창간 1300호를 맞은 한양대학보는 50년 전인 지난 1959년 5월 11일에 창간호가 발행되면서 그 탄생을 세상에 알렸다.
50년이 지난 2009년 오늘까지 한양대학보의 시작을 기억하고 있는 사람은 별로 남아있지 않다. 하지만 아직 창간 당시에 직접 신문제작에 참가했던 기자로써 현재의 한양대학보를 뒤에서 지켜보며 격려를 아끼지 않는 동인이 있다.
바로 제3대 편집국장 엄태웅<건축학과 59> 동인이다. 창간 당시 1학년이었던 그는 이제 70대 할아버지가 됐다. 어렸을 적 할머니의 옛날이야기를 듣는 기분으로 엄 동인에게 한양대학보 탄생비화를 들어봤다.

뜻 있는 사람들의 결집

“우리는 일종의 특채로 들어왔어. 시험 치르는 것 없이 오로지 자원자로만 구성된 거지”
한대신문사에 최초로 입사한 기자들은 1기가 아니라 그보다 위인 ‘특기’로 불린다. 1기 이후의 기수는 치열한 입사시험을 통해 신문사에 들어왔다.
반면 특기는 시험은 보지 않았지만 한양대학보를 최초로 제작하고 그 기틀을 잡아 후배들에게 넘겨줬다는 점에서 특별하게 불리는 것이다.
“그래도 우리는 다들 뜻이 있는 사람들이 모인 것이었어. 고등학교 때 문예지 편집을 하던 사람들이 많이 들어왔었지. 나도 그렇고 같은 특기인 제1대 편집국장 배종순 동인과 제2대 편집국장 임흥택 동인도 고등학교 때 문예부장 활동을 하던 사람들이었으니까”

그 때 그 신문
엄 동인에게 당시의 신문이 어떤 모습이었는가를 물었다. 뜻을 가지고 만든 최초의 신문이었지만 그는 처음의 신문을 ‘학교홍보지’라고 기억하고 있었다.
“나도 자세히는 모르지만 우리학교가 종합대학이 되기 이전에도 ‘한양대학보’라는 이름의 잡지 비슷한 학보가 있었다고 하더라고. 그래서 우리가 1호 사설에 ‘창간’이라는 단어를 쓰지 않고 ‘복간’이라는 단어를 썼어. 아무튼 이렇게 신문형태로 새롭게 탄생한 학보였지만 사실 처음에는 학교 건물 소개 등의 홍보기사로 면을 채웠지”
당시 신문의 편집도 상당히 열악한 수준이었다고 한다. 기자들이 '신문‘이라는 매체를 편집해본 경험이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제목과 기사가 구분이 되지 않았었어. 이 제목이 포함하는 기사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인지 알 수 없었지. 또 사진도 아주 조그맣게 인물사진으로나 들어가는 수준이었어. 초창기 1년이 지나서야 점차 우리 신문이 그랬던 점을 많이 개선하고 신문다워지게 됐지”

자긍심과 자기 의지
“학보라고 해서 학교 홍보지가 돼서는 안 돼. 신문다운 신문이 돼야지. 그러려면 낯가림을 버리고 본인이 기자라는 사실에 자긍심을 가지라고. 자신감을 갖게 되면 어떤 아이디어든지 떠오르게 돼 있어. 대학생이라면 자기 의지를 표현할 줄 알아야지”
후배들에게 당부하는 엄 동인의 손은 전혀 노인의 손 같지 않았다. 70대로 접어든 나이에도 불구하고 엄 동인과의 만남에서 알 수 있었던 그의 모습은 한양대학보에 대한 애정과 후배들을 아끼는 마음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엄 동인이 지금까지 한양대학보의 가장 존경받는 선배가 될 수 있었던 원동력이 아니었을까.

한글 전용과 주간지로의 변화 - 200호

한양대학보 200호가 발행된 즈음인 1960년대 중후반은 한양대학보의 역사에 가장 중요한 시기 중 하나다.
발간 초기 한자의 비율이 더 높던 국ㆍ한문혼용체에서 점차 한글의 비중이 높아지다가 이 시기에 와서는 한글전용신문으로 완전히 탈바꿈했다.
또 월간과 격주간, 순간(10일간)으로 점점 짧아지던 신문 발행 주기가 현재의 주간발행으로 확실히 자리를 잡은 시기이기도 하다. 200호 발행 당시 편집국장직을 역임했던 제16대 편집국장 장세혁<신문학과 67> 동문을 만나 한양대학보가 가장 빠르게 발전하던 이 시기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특별하지 않은 특집호
1호를 비롯해 1300호에 이르기까지 모든 한양대학보 특집호는 일반 신문보다 더 많은 면을 펴내왔다. 하지만 200호 특집만은 예외다. 축사와 기획기사가 있을 뿐 면 수로는 일반 신문과 차이가 없어 겉으로만 보면 특집호라는 느낌이 별로 들지 않는다.
“당시 신문사 자체적으로 200호 특집이 독자들에게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는 판단을 내려서 딱히 면을 증면할 이유를 느끼지 못했어. 학교 설립과도 관련있는 창간 10주년 등의 특집호와는 다르다고 생각했지”

변화를 선도하는 역할
특집호에서 특별함을 줄인 대신 당시 한양대학보는 우리학교 학생들에게 새로운 비전을 제시 했다.
“교화지정운동은 물론이고 지금도 사용되는 ‘진사로’ 등의 길 이름이라든지, 행당산 꽃으로 꾸미기 운동 등을 통해 학생들에게 애교심을 불어넣어 주는 활동을 했지”
이미 당시 국내 신문 최초로 가로쓰기를 시행했던 한양대학보는 한글전용화와 주간지화를 통해 스스로 발전하려는 노력을 했고. 오늘까지 내려오고 있는 학술ㆍ문예상을 제정해 학생들의 참여를 유도했다.
“주간지화는 다른 대학신문들에 비해 조금 늦은 편이었지만 한글전용은 비교적 빠르게 시행됐어. 80년대 들어서야 한글전용이 보편화된 일간지나 다른 신문에 비해서 말이지. 또 학술ㆍ문예상 당선자들이 나중에 사회에서 큰 역할을 하게 되는 경우가 많더라고”

교수와 학생의 지지
활발했던 당시의 활동에 힘입어 한양대학보는 일반 학생들의 높은 지지를 받았다. 200호를 맞아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90%가 넘는 학생들이 한양대학보를 읽는다는 결과가 나왔다.
또 가로쓰기도 비슷한 비율의 지지를 받았고 한글전용 신문에 대한 찬성도는 논란이 있었지만 지지율이 더 높았다.
높아진 학생들의 지지에 한대신문사 입사 지원자들의 경쟁률 역시 높아졌다. 장 동인이 기억하는 당시 입사 경쟁률은 거의 30대 1에 육박했다고 한다.
학생들뿐만 아니라 교수들 역시 한양대학보에 큰 관심을 보였다. 유명한 시인인 박목월 전 교수도 그런 교수들 중 하나였다.
“그분이 누구든지 글을 써서 첨삭을 부탁드리면 그 자리에서 고쳐줄 정도로 친절하신 분이었어. 게다가 원고를 부탁하면 거절하는 법이 없으셨지. 우리가 축사나 축시를 부탁드릴 일이 생기면 가장 먼저 염두에 두곤 했어”
한양대학보가 우리학교의 대표적 언론으로 위치를 공고히 할 수 있었던 기초를 만든 동인으로서 장 동인은 후배들을 걱정하는 마음도 남다르다.
“지금 일하면서 갈등을 겪더라도 이 순간에 할 수 있는 것을 했으면 좋겠어”

한양대학보 역사상 가장 두꺼운 신문 - 1000호

1997년 11월 25일에 발간된 한양대학보 1000호는 48면으로 구성돼 역대 특집호 중 가장 많은 면 수를 자랑한다. ‘지금까지 나온 신문 중 가장 두껍게 만들어보자’는 각오 아래 만들어졌다는 1000호, 그 중심에는 제59대 편집국장 황기우<경영학과 95> 동인이 있었다.

격동의 시기에 만들어진 특집호
1997년은 정치적으로 격동의 시기였다. 제15대 대통령선거를 앞둔데다 IMF 외환위기 사태가 시작된 때였다. 그런 시기에 만들어진 한양대학보 1000호는 최근의 대학신문과는 달리 학생운동, 통일문제, 민중문화 등을 주된 주제로 다뤘다.
“당시에 학생운동 문제는 다루지 않을 수 없는 문제였어. 대학신문에서 기성언론이 말하지 않는 주제를 말하는 것이 필수적이라고 생각한거지. 요즘이라면 생각하기 힘든 연변 방문 취재같은 기획이 그렇게 나온거야”
황 동인은 1000호 취재 중 저서「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등을 쓴 통일문제 전문가 리영희 전 교수에게 기고 요청을 했던 일이 기억에 특히 남는다고 한다. 평소 독특한 성격을 가진 것으로 유명했던 리 전 교수에게 글을 부탁하는 것부터 직접 찾아가기까지 쉽지만은 않았다고.
“당시 리 교수님께 꼭 특별기고를 받아야겠다고 생각했었어. 그래서 연락을 드렸는데 우리가 말씀드린 주제가 너무 진부하다며 대뜸 화를 내시는 거야. 우여곡절 끝에 사진기자와 함께 직접 찾아가 말씀을 들었는데 그때 좀 고생을 했지. 질문하는 입장인 우리에게 가끔 날카롭게 되물으시면서 대답이 시원치 않으면 ‘기자들이 그것도 모르나!’고 호통을 치셨으니 말이야(웃음)”

48면이기에 생긴 추억
1000호 신문은 두 쪽으로 나눠져 있다. 1면부터 24면까지 있는 신문과 25면부터 48면까지 있는 또 하나의 신문으로 묶여 발행됐다. 두 개의 신문이 ‘1000호 발간 특집호’라는 이름으로 엮여 나온 셈이다. 당시 독자들은 이렇게 만들어진 신문이 생소했기에 신문을 집어들며  약간의 혼란을 겪기도 했단다.
“신문을 그렇게 만든 이유는 하나로 접기에 너무 두꺼워서 그랬어. 그러다 보니 가판대에서 무심코 신문을 집다가 같은 걸 두 개 집은 줄 알고 하나를 다시 돌려놓는 학생들도 있었지”
48면이라는 면 수는 일간지에서도 엄두를 못 낼 만큼의 방대한 양이다. 황 동인은 48면 제작의 추억에는 ‘힘들었다’는 기억밖에 없다고 한다.
“48면을 한다고는 했지만 막상 해보니까 이게 보통 일이 아니더라. 나는 편집국장이라 기사를 쓰지는 않았지만 보고 받고 마감 상황 점검하는 것만으로도 지치더라고. 심지어 1000호가 나오고 그 신문과 기사를 평가하는 평가회의조차 하루 만에 끝낼 수가 없을 정도였지”
그래도 황 동인은 1000호로 힘든 것보다 1000호의 48면 펴냄을 성공적으로 이뤄냈다는 점에서 큰 기쁨을 느꼈다고 한다.
“부담감은 많았어도 우리가 세운 목표를 우리가 달성했다는 점에서 한양대학보에 대한, 우리 자신에 대한 자부심을 느끼게 된 거지”

고마운 동료들
황 동인은 1000호를 만들면서 동료들과 힘들었던 기억을 회상했다. 특히 간담회 기사에서 어떤 패널을 초청할 것인지로 기자들끼리 격렬하게 논쟁을 벌이다가 급기야 한 기자가 분을 이기지 못하고 문을 쾅 닫고 나가버렸던 사건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한다.
“우리 기자들이 고생이 많았지.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그렇게 화낼 일도 아니었는데 말이야. 그때는 신문을 만드는 데 너무 급급해서 아무 말도 못했는데 지금이라도 당시 동료들에게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어”
한양대학보 50년 역사에서 중요한 획을 그었다는 점이 자랑스럽다는 그의 표정에서 긍지가 느껴진다.
사진 박효은ㆍ차진세ㆍ최서현 기자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