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적, 가까운데서 정의 실현하기
성적, 가까운데서 정의 실현하기
  • 취재부
  • 승인 2005.11.20
  • 호수 120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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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위원│정규원 <법대·법> 교수
한 학기가 마무리 되어가는 이맘때쯤이면 마음이 불안해진다. 단지 한 학기가 아무런 성과도 없이 소비되었다는 이유 때문만은 아니다. 필자의 마음을 가장 무겁게 하는 것은 바로 학생들이 한 학기 동안 필자의 강의에서 무엇을 얼마나 배웠는가를 평가한 결과인 성적 때문이다. 성적을 받아들 학생들도 불안해하고는 있을까?

채점결과를 합산하고 조금은 복잡한 수학적(?) 처리과정을 거쳐 최종적으로 성적을 결정할 때마다 나를 당혹스럽게 만드는 문제가 있다. 이상하게도 성적의 분포가 양극화 현상을 보인다는 것이다. 특히 최근 몇 년은 이러한 성적의 양극화가 더욱 두드러지고 있다. 필자의 강의를 듣는 학생들의 능력이 불균등한 결과이건 아니면 내 강의가 특정한 유형의 학생들에게만 적합한 것이건 성적의 양극화는 바람직스러운 것이 아니다. 하지만 성적 양극화의 진정한 이유는 다른 것이 아닐까?

강의를 시작하는 첫 시간에 학생들에게 언제나 당부하는 말이 있다. 공부는 스스로 하는 것이고 강의시간에 참석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 강의내용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이다. 강의시간에 참석하여 앉아있는 것만으로 학생으로서의 소임을 다하였으니 학점을 달라는 것은 내가 고급차를 구입하였으니 나는 자동차에 관한 고도의 지식을 가지고 있다는 것과 무엇이 다를까? 그런데 강의 첫 시간의 당부가 학생들에게는 다른 의미로 받아들여지기도 하는 것 같다. 마치 강의에 충실하게 참석하지 않아도 된다는 의미로 말이다. 대학에서 이루어지는 강의도 중·고등학교 수업에서처럼 강제적으로 이루어져야 하는 것일까? 아직도 정신적 이유기를 지나지 못한 것일까?

외부적 강제 없이 지내던 학생들은 성적정정기간에 바빠지는 것 같다. 한 학기 동안의 삶의 결과가 너무나도 처참하여 스스로 견딜 수 없거나 아니면 남들이 바라보는 눈길 때문이건, 납득이 잘 되지 않는 이유를 장황하게 설명하면서 성적을 정정하려고 하는 학생들이 있다. 필자도 초짜 교수시절에는 이러한 학생들의 영악함에 넘어가기도 하였다. 영악함의 희생물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의 허탈함이란. 이와 같은 불신은 출석을 체크하는 과정에서도 발생한다. 사실 개인적으로는 대학 강의에서 출석을 부른다는 것은 별로 바람직하지 못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학생들의 강의참여 강제라는 이유가 아닌 전혀 다른 이유에서 출석을 체크한다. 필자의 강의에서는 출석이 불이익을 주기보다는 이익을 주는 쪽으로 - 그래야만 학생들이 보여준 한 학기의 결과가 비참한데 대한 개인적 위안도 되기에 - 기능을 한다. 그런데 대출을 하거나 강의가 끝나고 한 시간 가까이 지나서 지각을 했다면서 연구실을 찾아오는 학생들이 있다. 비록 별 다른 말을 안 하지만 나는 그런 학생들의 얼굴을 유심히 기억하여 둔다.

비난을 받아야 할 것은 능력이 없어서 좋은 성적을 올리지 못하거나 - 열심히 노력을 하였음에도 평균적 성적을 올리지 못한다면 빨리 다른 길을 찾아보기를 권한다 - 출석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진정 비난받아야 할 것은 자신의 한 학기 동안의 삶의 결과인 성적을 비열한 방식으로 정정하려고 하거나 출석을 하지 않고도 출석으로 인한 이익을 획득하려는 야비함이다. 왜 자신의 행동에 대하여 스스로 떳떳하지 못한가? 자신이 한 행동이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면 그에 대한 불이익을 감수하면서 반성하여야 할 것이고 만일 결과를 예측하면서도 정당한 이유에서 그와 같은 행동을 했다고 생각한다면 그 결과에 당당하여야 할 것이다. 올바름이나 진리, 정의는 그리 멀리 있는 것이 아니다.

필자는 대의를 앞에 내세우는 사람들을 대체로 신뢰하지 않는다. 그들이 내세우는 대의 뒤에서 개인적 욕심이 고개를 드는 경우를 종종 보기 때문이다. 사실 절대적 가치가 존재하는지를 의심하는 필자로서는 대의가 무엇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자기 마음대로 사는 것을 권유하는 것은 아니다. 자기가 받은 만큼 돌려주고 자기가 행동한 만큼 대접을 받는 것, 그것이 - 항상 받은 것에 비해 적은 것을 돌려주는 - 필자가 바라는 최선이다. 자신을 주장하기 위해서는 그것에 수반되는 의무를 다하여야 할 것이다.

다시 추운 겨울이 다가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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