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거 없는 낙천주의자가 바라 본 ‘푸른 세상’
근거 없는 낙천주의자가 바라 본 ‘푸른 세상’
  • 손수정 기자
  • 승인 2009.09.06
  • 호수 13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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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의 감성을 지닌 김조광수<연극영화학과 83> 동문

‘청년필름’ 대표인 그는 한 마디로 ‘청년’이라는 단어로 표현할 수 있다. 학생시절 더 나은 세상을 위해 열정을 다했던 학생운동. 자신의 청년시절 경험을 녹여낸 그의 영화. 성적 소수자이지만 낙관적인 자세로 행복하게 사는 삶. 모두 청년 김조광수의 모습이다. 세월이 지나 얼굴은 주름이 지기도 했지만 여전히 그는 ‘푸르게’ 살고 있다.

유쾌하고 발랄한 소수자들의 영화
제작자로서 10년 가까이 일해오던 그는 최근 단편독립영화 「소년, 소년을 만나다」를 시작으로 감독으로서의 커리어를 쌓고 있다.
“제작자는 창작의 핵심이 아니기 때문에 영화를 제작하더라도 사람들은 감독을 기억할 뿐이에요. 제 밑바탕에서는 남들이 내가 만든 영화를 알아봐줬으면 하는 욕구가 있는 것 같아서 제작자의 일 보다는 감독일이 훨씬 재미있지 않나 싶어요.”

현재 그는 차기 영화로 「친구사이?」를 연출하고 있다. 두 편 모두 동성애 커플의 이야기를 발랄하게 풀어냈다. 「소년, 소년을 만나다」는 첫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지지를 받았다. 조심스럽게 동인녀들의 지지 덕분이 아니냐고 묻자 그는 그들의 지지를 어느 정도 부정할 수 없다고 답했다.  동인녀들의 요구대로 영화를 만들려 하진 않지만 가끔 그들의 판타지가 부담이 될 때가 있다고 한다.

“게이들은 다 옷도 잘입고 잘생기고 성격도 ‘쿨’ 할거라고 생각하죠. 그러지만 게이들 중에도 못생기고 뚱뚱한 사람도 있어요. 저도 게이를 바라보는 현실성 없는 판타지가 대중들에게 각인되는 게 옳지 않다고 생각해요.”

그는 자신이 연출한 영화의 장점을 “유쾌하고 발랄한 소수자들의 영화”로 꼽았다. 소수자의 이야기를 다룬 대부분의 영화 속에서 주인공들은 항상 힘겹게 살아간다. 하지만 그는 소수자의 마냥 힘든 모습이 아니라 오히려 더 즐겁게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그는 자신이 연출하는 영화에는 계속 소수자의 이야기를 담고 싶단다. 장편 데뷔작으로 준비 중인 작품은 장애인이 주인공인 이야기로 유쾌 발랄이라는 그만의 장점을 살리면서도 그 안에 진지한 주제를 담을 예정이다.

청년이 서야 조국이 선다
1983년 당시 우리나라는 전두환 정권 아래 군사독재가 한창이었다. 그 시절에는 대학생의 정치참여가 활발했던 시기였다. 83년 대학을 갓 입학한 그에게도 이런 시류는 빗겨가지 않았다. 때문에 그는 자연스럽게 인문대 학생회장, 총학생회 학생복지위원회의 위원장을 맡으며 학생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됐다. 학생운동을 열심히 하다 보니 그만큼 영화에 소홀해 지기도 했다.

“1학년 때 선배가 광주항쟁 당시 광주를 찍은 비디오를 보여 주었는데 어린마음에 충격을 받았어요. 우리나라 군인이 우리나라 국민을 총으로 죽이는 나라에서 영화를 한다는 것은 사치가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하지만 막상 학교를 졸업하고 무엇을 하면서 살 것인가 고민을 하던 그에게 다시 영화가 생각났다. 같은 과 후배들의 격려로 그는 청년필름에서 제작자로 일하게 됐다. 여러 활동을 통해 다져진 리더십 덕분에 기획 능력과 전체 제작 과정을 조율하는 일에는 자신이 있었기에 제작자로서 성큼 한발을 내딛었다.
 
마침 당시 학생운동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청년한양’이라는 동문회의 구성원들을 중심으로 영화제작 단체를 만들고자 하는 움직임이 있었다. 이에 ‘바람직한 청년이 되자, 한양대의 젊은 기운을 모아보자’는 취지아래 영화제작소 ‘청년필름’이 탄생했다.

이미 세월이 흘러 당시 청년필름의 주축이 됐던 사람들은 다들 40대가 됐다. 그래서 누군가는 ‘청년’필름이라는 말이 무색하지 않느냐고 묻는다. 하지만 그는 생물학적으로는 청년이 아니지만 마음은 아직 청년이라 자신한다.

“우리가 지향하는 바는 청년의 정신과 맞는 푸른 영화에요. 여전히 처음 만들 때의 그 초심, 그 순정으로 젊은 영화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어요.”


근거 없는 낙관주의자
2006년 그는 대중 앞에서 커밍아웃을 했다. 당시 「후회하지 않아」라는 영화를 제작하게 되면서 당신도 동성애자냐고 물어봤을 때 “아니다”라고 대답하고 싶지 않았다고.

“2001년 「와니와 준하」를 제작할 당시 한 기자가 인터뷰 도중에 동성애자라는 소문이 있는데 사실이냐고 물어봤어요. 그 말을 듣는 순간 머리가 하얗게 됐어요. ‘그렇습니다’라고 대답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었죠.”
당시 청년필름은 초창기였기 때문에 아직 안정적이지 않았다. 투자자나 감독이나 배우들 중에 동성애자에 대해 편견이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가 동성애자임을 밝히는 것이 회사 운영에 있어서는 불리한 요인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또 개인적으로 부모님께도 커밍아웃하기 전이었기 때문에 부모님께 먼저 얘기하고 사회적으로 커밍아웃 하는 길이 부모님께 상처를 덜 주는 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아니다”라고 얘기 했다.

그는 집요하게 묻는 기자에게 계속 부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인터뷰 후에 집에 와서 한참을 울었다. “평생 살면서 작은 거짓말들은 해왔지만 자신과 관련해서 거짓말 해본 적은 없었어요. 내 자신이 부끄럽지 않게 살아왔죠. 단지 준비가 안됐을 뿐인데‘이것이 그렇게 숨겨야 하는 일인가?’ 라고 생각했어요.”

그 후 그는 다섯 편의 영화를 제작을 해 오며 회사도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았고 제작자로서 후회없이 작품을 만들었다. “지금도 편견을 가지고 있다면 그건 감수하겠다고 생각했어요. 우리가 작품성 높은 영화를 만들어왔는데 불구하고 내가 게이라는 이유로 투자를 하지 않는다고 해도 ‘상관없다’라는 자신감이 생겼기 때문이었죠.”

그의 커밍아웃 이후 삶은 전보다 훨씬 행복해졌다. 당당히 자신을 사랑할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그는 자기 자신을 ‘근거 없는 낙관주의자’라 말한다. 근거 없는 낙관은 그의 삶의 큰 원동력이다. 평균보다는 지나치게 밝은 사람이라고 말하는 그는 성적 소수자로서 힘겹게 살아가더라도 언제나 “행복하다”고 외친다.

그와 같은 나이대의 친구들은 대기업 임원이나 사업을 하는 중산층 평범한 가장으로 살고 있다. 그러나 친구들에게 “넌 행복하니?” 라고 물었을 때 친구들은 선뜻 “난 행복해”라 말하지 못한다고.

“객관적으로 봤을 때 저는 우울하게 사는 게 맞는 사람이에요. 동성애자이기도 하고 영화제작자이지만 경제적으로 넉넉지 않죠. 하지만 다른 사람들과 비교해 봤을 때 전 영화를 활력소 삼아 긍정적으로 살고 있어요. 저는 행복만큼은 누구 못지않게 많이 느끼고 있다고 생각해요.”  

 

사진 이유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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