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조리에 항거하는 실존의 힘
부조리에 항거하는 실존의 힘
  • 손수정 기자
  • 승인 2009.05.17
  • 호수 129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사르트르가 말하는 촛불 1주년 기념집회
나는 실존에 대해 정의 내리기 위해 ‘실존은 본질에 선행 한다'라 말했다. 본질은 이 세상에  모든 것들이 존재하는 이유다. 컵은 모양은 다 각각이더라도 액체나 고체를 ‘담는’ 본질이 있다.
사람의 본질은 무엇일까. 사람들은 물건과 같은 단순한 본질만이 자신의 존재를 증명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본질과 같이 사용의 의미가 아닌 존재 자체로서 의미를 지니는 더 앞선 무언가. 바로 ‘실존’이다.
내가 서두에 실존을 언급한 이유는 지난 2일 열린 ‘촛불 시위 1주년’ 기념집회에 대해 말하기 위해서다. 많은 시민들이 제도와 권력에 굴복하지 않고 부조리에 항거하는 모습은 존재의 자유를 위협하는 세력과 맞서 싸우는 자세인 ‘앙가주망(참여)’ 이었다.

촛불집회에 참여하는 시민들을 보며 내가 집필한 소설「구토」가 생각났다. 이 소설의 주인공 로캉탱은 존재할 이유가 없이 존재하는 것들에 대한 환멸 때문에 구토를 느낀다. 나는 촛불 집회의 촛불들이 시민들이 뱉어낸 토사물과 같다고 생각했다. 시민들은 촛불을 통해 사회제도가 만든 권력 속에서 무분별하게 휘둘리는 자신의 존재의 이유를 찾기 위해 구토하는 것이다.

또 다른 나의 저서인「벽」에서는 「구토」에서 나아가 인간의 존재를 무의미하게 만드는 권력에 저항하는 인간상을 볼 수 있다. 주인공은 나치 장교에게 불려가 동지들의 아지트에 대해 발설할 것을 강요받는다.
그러나 주인공은 처절한 고문과정에도 발설하지 않는다. 그에게는 침묵 이라는 자유가 있기 때문이다. 의경들과 대치돼 있고 무력 진압 속에서 자유를 외치는 시민들의 모습 역시 같다.

이 두 소설 속의 주인공의 모습은 실제 인간의 삶과 같다. 우리는 즉흥 연기를 맡은 배우다. 연습도 없다. 대본도 없다. 우리는 어떻게 살아갈지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 스스로 결정하는 삶이란 세상 속에서 자신의 실존을 주장하는 삶이다.

촛불집회는 1주년을 맞았지만 권력 아래에서 안주하고 있는 시민들도 있을 것이다. 그들은 촛불 집회의 모습을 마치 극을 보듯 감상하고 있다. 나는 감히 이들을 비겁한 인간이라 부르고 싶다.

비겁한 인간은 자기의 비겁함에 책임이 있다. 단념이나 양보로 스스로 실존을 포기하고 본질만 존재하는 인간으로 남기를 자처했기 때문이다. 비겁한 인간은 더 이상 ‘나아가는’ 인간이 될 수 없다. 항거에의 자유를 포기한 인간은 결국 권력자들의 소모품으로 전락한다.

나는 자본가 계급이었지만 제도적인 권위로 나를 포장하려 하지 않았다. 좌우 이데올로기는 나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한때 프랑스에서 마르크시즘 운동에 참여했지만 정당에는 가입하지 않았다. 책 속이 아닌 삶의 현장을 누비며 실존의 중요성을 외치고 싶었을 뿐이었다.

권력이 그대들의 실존을 무의미하게 만들기 위해 그대들을 억압한다 할지라도, 그대들에게는 촛불을 켤 수 있는 용기, 본질이 아닌 실존으로서의 인간의 모습이 있음을 잊지 않길 바란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