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낭소리」 유감
「워낭소리」 유감
  • 한양대학보
  • 승인 2009.03.23
  • 호수 12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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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영화 「워낭소리」가 화제다. 독립영화로는 드물게 이백만 관객을 동원하면서 우리 문화계에 ‘인디 신드롬’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인디 문화에 대한 관심은 우리 문화계의 고질적인 병폐인 문화적 쏠림 현상을 바로 잡을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우선 주목에 값한다. 인디 문화층이 얼마나 두터우냐에 따라 그 문화의 다양성과 견실성이 결정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가 상업적이고 선정적이라고 비난하는 할리우드나 일본 문화의 저변에는 이러한 두터운 인디 층이 자리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워낭소리」에서 비롯된 인디 신드롬은 여간 반가운 것이 아니다.

하지만 요 며칠 사이 이 반가움의 실체가 아이러니하게도 또 다른 쏠림 현상일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서 환희는 환멸로 바뀌었다. 「워낭소리」신드롬 역시 우리 문화현상의 무섭고 강력한 소통 기제인 입소문을 통해 만들어진 것이다.

입소문이란 거대한 자본 공세를 통해 블록버스터식의 광고 시스템과는 다른 소통 구조와 효과를 창출한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평가할만한 부분이 적지 않다. 입소문은 일단 그 소통의 주체가 거대 자본을 소유한 집단이 아니라 개인이 된다. 개인의 취향과 의지에 따라 문화의 향유 대상이 결정되는 것이다.

인디 영화나 음악의 향유는 대개 이런 과정을 통해 이뤄진다고 할 수 있다. 인디 영화 전용관이나 홍대 앞 인디 밴드 공연은 주류적인 문화 향유에서는 볼 수 없는 입소문과 같은 독립된 은밀한 소통 구조를 통해 그것이 이뤄진다.
「워낭소리」신드롬 역시 이렇게 출발한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이 거대 정치, 문화 권력 혹은 권력자의 눈과 입을 타면서 그것은 더 이상 소문이 아닌 공개된 담론체로 재탄생하기에 이른다. 이제 이 영화의 향유는 자발적으로 이뤄지지 않고 자기 스스로를 이러한 담론 구조 속에서 검열하고 규제하고 규율하는 과정을 통해 이뤄지게 된다.

「워낭소리」를 향유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사이에 체험적인 가치에 대한 우열과 주종 관계가 성립되고 소외의 변증법이 작동하게 된다. 입소문 속에서 그 존재성을 드러내는 자발적인 향유는 사라지고 전체주의적인 문화 파시즘이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된다. 자발적인 향유가 가능할 때 「워낭소리」에 대한 평가가 제대로 이뤄질 수 있다. 「워낭소리」에 대한 평가는 지금 이러한 현상에 가려 그 실체가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고 있다.

「워낭소리」는 우리가 호들갑을 떨 정도로 그렇게 뛰어난 영화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무엇보다도 ‘지금’, ‘여기’에서 어떤 현실적인 맥락이나 암시도 없이 느닷없이 맞닥트린 노스탤지어의 세계가 당황스럽다. 소의 커다란 눈망울과 거기에 고여 있는 그렁그렁한 눈물이 더 이상 리얼하게 다가오지 않을 뿐만 아니라 우리의 삶과 현실에서 리얼하다는 것이 무엇인지 잊게 만든다.

힘겨운 현실을 잊고 소와 노인이 펼치는 노스탤지어의 세계 속에 우리를 유폐시켜 놓으려는 음험한 보수주의자들의 논리에 우리가 놀아난 것은 아닐까? 이 영화를 보고 나서 나는 왜 남들처럼 향수를 느끼지 못하고 참을 수 없을 정도의 허무감을 느낀 것일까? 단순히 관점과 취향의 차이일까? 아니면 보다 본질적인 의식의 구조나 세계관의 차이일까? 「워낭소리」와 ‘나’ 사이에 어떤 긴장도 없다면 내 눈 앞에 한 시간 넘게 펼쳐진 노스탤지어의 세계는 신기루처럼 끊임없이 나를 욕망하게 만드는 환상이나 환각의 세계조차도 아닌 것이다.

사정이 이러하다면 「워낭소리」신드롬은 모든 현실적인 긴장으로부터 놓여나고 싶은 욕망이 만들어 낸 허무의 산물인지도 모른다. 이런 점에서 「워낭소리」신드롬의 확산은 불안하고 불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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