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의 토론 문화, 그 가능성
대학의 토론 문화, 그 가능성
  • 한양대학보
  • 승인 2008.11.02
  • 호수 12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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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이후 우리 역사는 권위주의 통치체제 아래서 전개돼왔다. 이러한 ‘힘’에 의해 강요된 규율과 억압은 사상적 획일성, 보수주의적 세대론, 천민자본주의의 증식, 경제 논리 과잉 등 온갖 부정적 의식을 우리에게 안겨줬다.

이렇듯 경색된 체제와 제도 내에서 구성원들끼리의 수평적 의사 교환이 정착되기란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그보다는 소수 엘리트 집단에 의해 확정된 포맷이 아래로 전달되는 일방적 소통 구조가 주도적 의사 결정 과정으로 나타나기 십상이었다. 그야말로 “그대가 결정하면 우리는 따른다”였다.

최근 여러 미디어들이 앞 다퉈 토론 프로그램을 내보냄으로써 우리 사회에도 참여적 토론 문화가 자리잡아가고 있는 듯하다. 하지만 아직도 방송매체 외에 대중들이 관심을 가지는 이슈에 대해 토론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는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서인지 커다란 이슈에 대한 토론 문화는 미디어들을 중심으로 어느 정도 정착되는 반면, 소규모 집단의 의사 결정이나 새로운 의견 도출 과정은 여전히 상명하복의 잔재를 갖고 있다. 가령 우리 사회 곳곳에서 목도할 수 있는 풍경을 생각해보자.

어떤 새로운 안을 검토하는 자리에서 A씨는 신선한 방안을 하나 내놓는다. 혹은 어떤 결과를 놓고 반성하는 모임에서 B씨는 실행자의 빗나간 예측을 비판한다. 그럴 경우, 우리 사회의 반응은 대개 이렇다. 그 자리에서 적임자를 선출하고 그에게 힘을 몰아주는 대신, A씨에게 “그건 자네가 책임지고 구체적 안을 만들어 제출해”라거나, B씨에게 “그럼 자네가 한번 해봐” 하는 당혹스러운 책임 넘기기의 순서로 이어진다.

이러한 풍경들은 우리 사회에 적극적 의견 제시와 비판적 자기반성이 부재한 이유를 잘 보여준다. “가만히 있으면 중간은 간다”는 소극적 보신 논리가 힘을 얻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새로운 의견 개진을 톡톡 튀는 태도로 여기고, 의견에 대한 비판을 인격 모독으로 동일시한다거나, 격의 없는 의견을 ‘장유유서’를 깨뜨리는 언행으로 치부하는 사회에서 토론 문화의 정착은 어렵다.

그렇다면 한 사회의 예비 주역들의 집합체이자 비판 그룹이라 할 수 있는 대학에서의 토론 문화는 어떠한가. 원래 ‘대학’이라는 근대적 제도는 그 목표를 ‘교양인’과 ‘전문인’의 양성이라는 두 마리 토끼에 맞춘 채로 출발했다.

그런데 최근 우리 대학은 취업지상주의나 경제 논리의 우위에 따라 현저하게 ‘교양’ 교육기관으로서의 성격을 상실했다. 자연히 개인주의의 분위기가 커졌고, 공동체 문화의 형식인 토론 문화는 명분의 중요성과 관계없이 그 필요성이 격감했다. 최상의 수행성과 효율성을 강조하는 취업과 경제 논리는 대학을 삶의 현장이 아닌, 그 현장으로 나아가는 한시적 교량쯤으로 생각하게끔 만들었다.

오히려 서로간의 무관심으로 ‘토론’ 자체의 필요성이 줄어들면서, 대학 사회의 무기력을 키우고 있는 듯하다. 하지만 대학 사회에서의 토론은 자신들의 정체성과 사회적 존재 형식 그리고 실천 형식에 대해 고민과 힘겨운 모색을 거듭한다는 점에서, 다른 집단에서 가질 수 없는 새로움과 창의성을 가진다.

삶의 중요한 국면마다 우리는 새로운 선택을 해야만 하는 불가피한 순간들을 맞곤 한다. 거기서 많은 이들의 의견을 수렴해 최대 다수의 의견을 결집하는 토론 문화는 일정한 논쟁적 성격에도 불구하고 우리 모두에게 민주주의의 기율을 가르쳐주는 이상적인 행위 양식이다. 거기서는 ‘지시자-수용자’가 아닌 수평적이고 다양한 의견을 주고받는 열린 타자들만 존재한다.

지난날의 권위주의적 의사 교환 회로를 바꾸고 새로운 민주적 감각을 착근시켜가기 위해서도, 우리는 토론 문화의 본래적 의미를 확인해야 하는 절실한 시점에 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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