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과 독서에 대한 외로운 명상
가을과 독서에 대한 외로운 명상
  • 취재부
  • 승인 2005.10.30
  • 호수 120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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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복<국문대,국문>교수
‘가을은 독서의 계절’이라는 말이 요즘처럼 심란하게 들린 적도 없다. 이 말은 이제 빛바랜 기억 속에서 희미하게 존재하는 유폐된 가을의 언어가 되어버렸다. 그동안 이 말은 어떤 별다른 이해 판단의 과정을 거치지 않고 자연스럽게 우리의 정서를 지배해 온 것이 사실이다. 이것은 가을과 독서 사이에 강한 친연성이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이 친연성은 어디에서 기인하는 것일까?

곰곰이 따져 보지 않아도 그것은 먼저 우리의 몸을 통해 드러난다. 가을은 우리 몸이 쾌적함을 느끼는 최적의 온도와 습도를 유지하고 있다. 여름처럼 덥지도 겨울처럼 춥지도 않은 상태에서 집중력을 요하는 독서 행위가 이루어지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가을과 독서의 친연성을 여기에서 찾다보면 자칫 독서 주체를 감각인으로만 규정짓는 우를 범할 수 있다.

몸의 감각은 독서의 한 조건이지 그 자체가 전부는 아니다. 가을은 몸의 감각 너머의 정서의 폭과 인식의 깊이를 가진다. 일몰 혹은 죽음이라는 가을의 아키타입(archetype)이 빚어내는 우울과 고독은 우리를 정서의 독에 빠지게 할 정도로 비극적인 것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 비극 속에 우리의 영혼을 살찌우는 인자가 숨어 있다. 이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우리의 감각으로 쉽게 포착할 수 없는 세계이다. 이런 점에서 이 세계는 내적 풍요로움의 한 표상이라고 할 수 있다. 

가을의 묘미는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감각 너머의 내적 풍요로움으로 가득 찬 세계에 빠지는 것은 그래서 감미롭고 황홀한 일이다. 그런데 가을이 주는 이 묘미를 한 권의 책을 읽으면서 체험하게 된다는 것이다. 독서의 가장 큰 즐거움은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를 자유롭게 상상하면서 자신만의 세계를 꿈꿀 수 있다는 점에 있다. 독서 삼매경에 빠지면 우리는 외부 현실의 간섭을 받지 않는다. 그 중에서도 가장 크게 부각되는 것은 현실의 속도를 따르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다.

모든 견고한 것은 속도 속으로 녹아내리는 세계에 우리는 살고 있다. 속도가 노동생산성을 결정하고 있는 세계에서 그 속도는 절대선이 될 수밖에 없다. 이 속도에 의해 우리의 문화와 문명이 구성되고 또 생성되는 것이다. 지금 여기의 속도에 무감각해지면서 우리는 느림의 미학을 잃었고, 그 결과 심층의 저 밑바닥에서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아주 느리고 자연스럽게 생성되는 내적인 자유를 잃게 된 것이다.

속도가 절대선이 되고, 보는 것이 곧 믿는 것이 되어버린 시대에 독서를 이야기하는 것은 아주 비현실적이고 또 비생산적인 태도 아닐까? 하지만 한 권의 책을 집어 들었을 때의 부피감과 감촉, 여기에서 비롯되는 따뜻한 온기, 톱니바퀴 같은 시스템화된 시간의 규율과 질서에서 벗어나 어떤 틈을 발견하고 여기에서 체험하는 자유, 그리고 공간의 구속을 받지 않는데서 오는 평온함과 확장된 인식 등은 독서를 통해 얻을 수 있는 즐거움이라고 할 수 있다.

지난 여름에 구입해 서가 한 쪽에 꽂아둔 리처드 니스벳의 ‘생각의 지도’라는 책을 읽다가 문득 고개를 들어 바라본 가을 하늘은 깊고 또 깊다. 무엇이 진정 가치 있는 삶인가? 이 가을에 곰곰이 생각해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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