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양대학보는 독자들이 지켜줘야 한다”
“한양대학보는 독자들이 지켜줘야 한다”
  • 조윤영 기자
  • 승인 2008.05.18
  • 호수 127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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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년 역사의 흔적을 거닐다(1)

1959년 5월 11일 한대신문으로 출발한 한양대학보는 올해로 49주년을 맞이한다. 김정기<신문학과 75> 동인, 정순민<국어국문학과 85> 동인, 조석장<정치외교학과 85> 동인, 김현상<경영학부 98> 동인을 만나 한양대학보의 변천사를 들을 수 있었다. 약 반 세기의 시간이 흐른 본지의 역사에 그들은 어떤 흔적을 남겼을까. 그리고 그들은 지금의 자리에서 어떤 흔적을 남기려고 하는지 이야기를 들어봤다.

김정기<신문학과 75> 동인은 1975년 4월 신문사 철문을 열었다. 김 동인이 한대신문사에 발을 들여놓은 지도 어언 30여 년이 지났다. 어느덧 64기 수습기자를 마주하고 있는 김 동인의 얼굴에는 한대신문사 후배들에 대한 반가움과 함께 세월의 흔적들이 묻어난다.

“신문사는 알파이자 오메가였다. 일주일 중 태반은 신문사에서 보냈다. 대학시절이 한대신문에 대한 기억으로 가득 차있다. 인생에서 한대신문이 차지하는 비중은 상당하다. 한대신문에 많은 부분을 빚졌다. 동시에 많은 부분을 배웠다. 교수도 마찬가지다. 한대신문에 대한 애착은 어느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만큼 강하다”

한대신문 그리고 한양대학보
그 당시 한대신문은 취재부ㆍ기획부ㆍ조사부ㆍ문화부 등 4개 부서로 구성됐다. 기본적으로 4면을 발행했으며 격주로 8면을 발행했다. 그리고 최대 2만3천 부 이상을 발행했다. 김 동인은 대개 취재부 기사를 맡았으며 기획부와 조사부에서도 활동했다. 더불어 제27대 편집국장을 역임했다. 편집국장 당시 21기 수습기자로 입사한 여기자는 신문사 후배이자 인생의 동반자로 김 동인의 옆을 지키고 있다.

“입사 시험일은 지금도 내 마음 속에 생생하게 남아있다. 홍길동전에 나올 법한 날이었다. 광풍이 불고 천지사방이 어두워 마음이 내키지 않았지만 시험을 치러야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10명 정도의 수습기자를 모집하는데 지원율은 2~30 대 1이었다. 약술 시험장을 대여하는데 3개 이상의 강의실이 필요할 만큼 경쟁이 치열했다”

그 때는 신문을 한부 더 받기 위해 한대신문사를 찾아오는 학생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았다. 친구 혹은 고향에 계신 부모님께 대학신문을 보내는 것이 정성어린 행동으로 여겨지던 시절이었다. 깊은 밤 신문사를 찾아와 학교에 대한 불만을 이야기하다가 울분을 터뜨리는 학생도 있었다.

“대학생들은 두 가지 방식으로 자신의 생각을 표출했다. 사회ㆍ정치적 상황과 맞물려 데모로 표현하는 학생도 있지만 신문사를 통한 지적 참여를 추구하는 학생도 있었다. 과거에도 영자신문이나 방송국이 있었지만 신문사가 가장 많은 사랑을 받았다”

한대신문의 자랑거리는 한글전용 신문이라는 사실이었다. 가로쓰기 도입도 자부심을 갖기에 충분했다. 오늘날에는 가로쓰기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지만 세로쓰기를 하던 대학신문도 있었다. 한글전용과 가로쓰기 도입은 상당히 혁신적인 시도였다.

“1면에는 ‘캠퍼스 앵글’이라는 코너가 있었다. 이는 한 장의 사진에 사회ㆍ문화적 현상이나 문제의식을 담는 공간이다. 타 대학신문에서는 시도하지 않은 참신한 코너다. 산업체에 취직한 동문을 찾아가 현장의 모습을 담은 ‘산업전선의 한양’도 독특한 기획이었다. 한대신문과 서로 경쟁하던 서울 소재 타 대학신문과 견주어 우수하다는 평을 받았다고 자부한다. 하지만 한대신문에서 한양대학보로 신문 제호가 바뀌어 상당히 유감이다. 한대신문의 갑작스런 변화에 대해 문제의식을 갖지 않는 사람도 있지만 대다수의 동인이 큰 실망감과 동시에 말할 수 없는 비애를 느끼고 있다”

김 동인은 대학신문의 몰락의 주요인을 특정 이데올로기에 치우쳐 학생ㆍ교수ㆍ그 외 대학구성원을 등한시했던 과거사에서 찾았다. 더불어 대학 인근 주민들도 끌어안을 수 있는 대학신문을 강조했다.

“근래 한양대학보의 노고에 박수를 보낸다. 지난날 등한시했던 대학 사회의 구성원들을 신문에 등장시키려는 노력이 엿보인다. 그러나 신문사까지 찾아와 신문을 받아가는 학생들을 바라보며 신문 한 부 더 나눠주는 것이 권력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시혜같이 여겨지던 전성기가 있었기에 미련과 아쉬움이 남아 있다”

교수이자 선배로서의 김 동인
“오늘날 대학은 대중교육의 모습을 띠고 있다. 7~80년대는 대학교육의 전환기다. 소수의 전유물이었던 고등교육이 대중교육으로 변모하는 시기였다. 우리학교도 공대에 치우쳤던 과거를 뒤로하고 종합대학의 체제를 갖추는 시기였다.

오늘날에는 타 대학에 비해 공대가 차지하는 비중이 크지만 번듯한 종합대학의 모습을 갖췄다고 생각한다. 형형색색의 봄빛이 우리학교의 현재와 미래를 동시에 반영한다. 곳곳마다 만발한 꽃들도 우리학교의 상승기류를 나타내고 있다”

김 동인은 신문과 우리학교와 떼려야 뗄 수 없는 표리일체의 관계다. 서울배움터 문리대 신문학과를 졸업한 그는 신문학과 대학원 석사과정을 마치고 언정대 신문방송학과 교수로 자리매김했다. 김 동인이 우리학교 강단에서 교편을 잡은 지도 10여 년이 지났다. 마치 우리학교와 보이지 않는 실타래로 엮어있는 듯하다.

“학생기자로 활동하면서 선배기자들의 경험을 얻기도 하고 기자들 간에 격렬한 토론을 벌이는 과정에서 교수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졌다. 외부 교수를 인터뷰하거나 기고를 받는 기획 기사가 많았다. 교수를 접하면서 교수에 대한 진면목을 발견할 수 있었다. 한대신문은 오늘날 모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는 모태의 씨앗이다”

한양대학보를 구독하는 독자에게
“아름다운 꽃도 애정 없이는 무럭무럭 자라나지 못한다. 한양대학보도 대학사회를 구성하는 구성인 모두가 물을 주고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져야 한다. 비판적 읽기를 통해 부족한 부분은 신랄하게 비판해야 한다. 한양대학보는 우리학교의 공론장이다. 디지털 시대이지만 대학신문과 같은 인쇄매체가 고유하게 맡은 중대한 역할이 있다. 이는 독자들이 지켜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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