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근·현대사와 울고 웃은 야학 100년의 길
한국 근·현대사와 울고 웃은 야학 100년의 길
  • 유광석 기자
  • 승인 2008.03.31
  • 호수 126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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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학의 시초는 1906년 함흥군에 설립된 보성야학이다. 그 후 전국으로 퍼진 야학은 2년여 만에 서울에만 100여개를 비롯 전국적으로 5천여개가 넘는 야학이 생겨났다. 당시 야학은 학교 교육보다는 사회운동의 성격을 더 많이 띄었다. 일본의 강점기 하에 지식인들은 야학을 통해 독립의식과 민족의식을 기르는 것이 우리나라의 힘을 기르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1920년대, 1930년대를 지나면서 우리나라 교육의 장으로 발전하게 됐다. 1930년대 친일 야학이 생겨나는 등의 탄압이 있었지만, 야학은 꾸준히 발전해 왔다. 전쟁의 여파로 1950년대 야학은 농민과 빈민들을 대상으로 대도시에서 교실이 아닌 천막에서 수업을 하는 모습이 비일비재 했다.

그 후 1960년대에는 야학 활동이 본격적으로 이뤄졌다. 4·19혁명이 군사정부로 인해 좌절이 되면서 대학생들이 전국 도시에서 재건활동, 빈민봉사활동을 일으키는 속에 야학의 수가 확대 된 것이다. 그 영향으로 1960년대 말에는 대도시의 빈민촌, 소공장 밀집지구 등에서 어렵지 않게 천막학교, 교회부설학교 등 야학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또한 1960년대의 야학은 농촌봉사활동과 연관되는 일련의 농촌계몽운동으로 나타났다. 비정규적인 교육기관으로서 검정고시 교육을 담당하는 기능(검시야학)을 하기도 한 것이다.

1970년대에 들어 야학은 유신 이후 독재화되는 권력 앞에 학교에서 방출된 학생들이 야학에 참여 하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60년대의 야학이 검정고시 교육을 담당하는 소위 ‘제도권 교육’을 보완했다면 70년대의 야학은 농민과 도시 빈민들의 소외 문제에 대한 교육을 하는 ‘생활야학’, 노동법교육ㆍ도시노동자들의 계급의식에 초점을 맞춘 ‘노동야학’ 등의 다양한 야학이 공존하게 된다.

노동야학의 경우 70년 전태일의 분신 이후 노동자의 문제가 수면위로 올라가면서 크게 활성화 됐다. 노동자의 문제가 사회적으로 만연해진 것이다. 60년대 수가 크게 증가한 검시야학의 경우 점차 학교 등의 제도교육으로 편입돼 가기도 했다.

1980년대 야학은 대학생들의 현실 참여의 장으로 여겨졌다. 특히 80년대 성장한 노동자층을 기반으로 한 노동운동의 부각이 두드러지게 된다. 또한 지식인운동ㆍ청년운동ㆍ여성운동 등 전문화된 사회운동이 대중적인 모습을 갖추게 되는 것도 볼 수 있다.

이 속에서 야학운동도 사회운동적 성격을 분명히 함과 동시에 그 성격을 질적으로 발전, 정립시키기 위해 그 활동이념과 목표를 분명히 하고 상호유대와 공동성 획득을 이루기 위한 여러가지 갈등, 대립 과정을 겪게 된다.

90년대 초부터 활동가들은 야학운동의 전망을 ‘지역운동ㆍ시민운동’으로 잡아 나가기 시작했고 논의는 94년 새날을 여는 지역교육센터ㆍ주부교실ㆍ한글교실로 구체화됐다. 그러나 90년대 중반을 접어들면서 야학운동은 위기 국면을 맞았다. 여기저기서 문을 닫았다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한 것이다. 위축된 야학은 2000년대 들어서 농민, 도시 빈민, 노동자들이 채우던 자리를 노인, 주부, 장애인, 이주노동자들 등으로 자리가 바뀌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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