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격자」와 도시의 익명성
「추격자」와 도시의 익명성
  • 장형수 기자
  • 승인 2008.03.17
  • 호수 126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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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추격자」 나홍진 감독님을 만났습니다. 이번 신문은 의도하진 않았지만 ‘추격자 특집호’가 될 것 같습니다(웃음). 그만큼 인상 깊었던 만남이었고, 의미 있는 시간들이었습니다. (스포일러가 있으니 주의하세요.)
「추격자」는 서울 한복판에서 벌어지는 연쇄살인범과 그를 추격하는 전직 경찰의 이야기입니다. 언뜻 보면 「살인의 추억」과 비슷한 영화처럼 보입니다. 영화전문잡지 「씨네21」에서도 “추격자는 살인의 추억과 함께 논의될 운명”이라고 평하더군요.

하지만 두 영화는 엄연히 다른 영화입니다. 「살인의 추억」의 경우 농촌이 배경이고, 끝까지 범인을 밝히지 않습니다. 하지만 「추격자」는 배경이 도시일 수밖에 없는 영화인데다가 초반부터 범인을 드러내는 자신감을 보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추격자」는 영화 막판까지 관객을 끌고 가며 한순간도 긴장의 끈을 놓지 않게 합니다. 

여기서 주목해야할 부분이 도시의 익명성입니다. 궁극적으로 공동체의 유대관계가 옅어져야 가능한 도시의 익명성은 공동체의 붕괴를 담고 있을 뿐만 아니라, 서로에 대한 관심이나 보호를 최소화하기도 합니다. 이런 익명성의 부작용을 극대화해 탄생한 것이 바로 「추격자」인 것이죠.

피해자로 등장하는 출장안마사 여성들은 사회가 보호하지 못하는 가장 대표적인 계층입니다. 사회는 그녀들의 죽음은 물론, 실종조차 알지 못하죠. 익명성으로 둘러싸인 도시에서는 아무도 그들의 존재를 궁금해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가장 대표적인 장면이 연쇄살인범에게서 탈출해 동네를 거니는 김미진(서영희)의 모습입니다. 그녀는 피범벅이 된 채로 그 넓은 동네를 뛰어다녔지만 결국 아무도 마주치지 못합니다.

어쩌면 이는 우리 사회의 현주소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살인을 저지르고도 아무렇지 않은 연쇄살인범. 우리 사회가 양산해낸 괴물. 그리고 어디서도 보이지 않는 우리들.「추격자」는 이렇게 우리 사회의 단면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세상이 점점 잔인해지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들은 그런 세상에 열심히 적응 중이구요. 10년 뒤, 아니 5년 뒤에는 어떤 일들이 벌어질까요. 동기 없는 무차별 살인,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라며 제3자의 일로 치부하는 우리들. 그 이상의 것들이 있을까요. 상상조차 하기 힘듭니다.

「추격자」의 순항이 다행이라면 그나마 다행입니다. 나 감독님의 바람처럼 영화를 보고 잔인한 세상에 대한 우리들의 시선이나 생각들이 하나 둘씩 변해 가기를 바랍니다. 아직 세상은 살만한 곳이며 희망이 존재하는 공간이니까요. 「추격자」가 우리나라 영화계에 좋은 귀감이 되길 바라며. 더불어 나홍진 감독님의 차기작도 대박 나길 기원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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