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는 통치의 문제가 아니라 참여의 문제
정치는 통치의 문제가 아니라 참여의 문제
  • 한양대학보
  • 승인 2008.03.09
  • 호수 12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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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연재 - 철학가의 사상으로 본 지도자상

한 정치 공동체에서 지도자(leader)는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그런데 정치 공동체 내에서 지도자가 어떤 위상을 갖는 것으로 봐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커다란 의견의 차이가 있을 수 있다. 정치를 통치행위로만 이해한다면 지도자는 통치자로서의 식견과 자질을 필요로 할 것이지만, 정치를 소통과 조정의 장으로 이해한다면 지도자는 의견의 조직적 조율사로서의 자질을 우선시해야 할 것이다.

정치지도자 개념을 중심으로 정치사상을 전개시킨 전형적인 인물은 플라톤이다. 바람직한 국가의 이상적 모형을 인식자인 철학자가 정치가가 되든지, 혹은 정치가가 그런 철학자가 되어야 한다는 플라톤의 주장은 정치체제 내에서의 정치지도자의 위상을 강력하게 그려내고 있다.

하지만 이런 유형의 정치지도자의 위상 설정을 하는 태도에 대해 가장 강력한 비판을 하는 정치사상가가 바로 한나 아렌트이다. 그녀의 「정치의 약속」의 첫째 논문 “소크라테스”는 플라톤에 대한 아렌트의 강력한 비판이다. 플라톤이 그리는 지도자는 진리의 독재를 수행하는 통치자일 뿐이기 때문이라는 이유에서이다.

우리는 너무나 쉽게 정치=통치라는 등식을 받아들인다. 하지만 정치는 그런 것이 아니라 인간의 정치성이라는 실존적 차원에 뿌리를 내리고 있고, 다양한 사람들이 다양한 의견을 표출하는 가운데 서로 함께 살아가는 방식에 대한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정치는 함께 살아가는 예술이다. 이를 위해 정치 지도자가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가를 묻는 것이 바람직한 정치 지도자상에 대한 아렌트의 대답이 된다.

바람직한 정치는 정치적 참여를 이뤄내는 개개인의 의식에 달린 것이다. 정치는 통치가 아니라 참여와 토의의 문제다. 정치는 바람직한 이념을 실현해 가는 공작의 장이 아니라, 다양한 사람들이 함께 어울려 살아가는 방식의 발견이고 과정이다.

비유적으로 말해 정치는 위에서 통치자가 이끌어가는 것이 아니라, 아래에서 사람들의 능동적 정치적 참여가 수렴돼야 형성되는 것이어야 한다.

이를 위해 현실정치에서 정치 엘리트가 필요하다. 정치 공동체도 필수적이다. 따라서 제도적 정치 가운데 정치 지도자란, 정치 공동체 내에서 등장하는 의견을 조정하고, 합의를 도출해 내고, 도출한 합의를 수행해 내고, 민중들의 생활의 문제를 해결하는 동시에 정치적 참여도 보장하며, 정치참여를 통한 기쁨과 삶의 다양성의 외적 구현도 동시에 이루어낼 줄 아는 사람이 돼야 한다.

아렌트는 어떤 특정 정치 체제를 바람직하다고 주장한 적은 없었다. 굳이 말하자면 개인의 참여를 수렴해 내는 위원회(council)의 전국적 조직체를 생각했던 적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모두의 참여를 담보해 낼 수 있는 위원회 조직이야말로 생생한 정치적 역동성의 불을 끄지 않고 유지할 수 있는 제도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 같은 아래로부터의 힘을 수렴할 수 있는 정치가라면 아렌트는 바람직한 지도자라 생각했을 것이다.   
 김선욱 <숭실대ㆍ철학과>

※다음 호에는 김병채<인문대ㆍ철학과>ㅛㄱ수가 공자의 사상에서 바라본 지도자상을 집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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