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 속의 불안, 우리의 사상에서 답을 찾다
마음 속의 불안, 우리의 사상에서 답을 찾다
  • 강명수 기자
  • 승인 2007.11.19
  • 호수 125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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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가치에 대한 불안감

사회심리학자들은 청년기에 접어든 젊은이들이 느끼는 불안감을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불안’과 ‘삶의 가치에 대한 불안’으로 구분한다. ‘미래에 대한 불안’이란 취업과 노후 등 물질적·경제적인 쪽에 가깝다. 말 그대로 현실적인 고민이기에 지금도 많은 대학생들이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대비책으로 자격증·토익 등 여러 가지를 준비하는 것이다. 이런 현실적 불안을 해소하는 데 대한 관심은 매우 강렬하다.

‘보다 나은 미래’를 추구하는 젊은이들을 위한 교욱·인턴십·투자 프로그램 등 대학과 사회를 막론하고 많은 시스템적 지원을 하고 있다. 서점이나 도서관에서 찾아볼 수 있는 관련 서적 또한 굉장히 풍부하다. 현실 생활에서 직접 피부에 와닿는 부분이다 보니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대비할 수 있는 환경 조건이 갖춰져 있는 것이다.

그러나 사회 분위기 자체가 현실생활에서 느끼는 불안감을 해소하는 데 집중해 온 나머지 삶의 가치에 대한 불안은 상대적으로 드러나지 않고 있다. 물질적 가치의 추구에 대한 지원은 이미 구축된 사회 시스템의 도움을 받으면서도, 정작 중요한 삶의 가치에 관련된 불안을 해소하는 일은 대부분 개개인이 알아서 할 일로 넘겨버리는 것이다. 거기다 정신적인 상담을 통해 도움을 받는 것이 일반적인 서양과 달리, 정신적 상담이라는 용어만으로도 비호의적인 시선을 보내는 우리 사회에서 홀로 남겨진 개인이 자신의 삶에 대한 가치를 발견하는 일은 쉽지 않다.

하지만 인간은 자신의 삶에 어떤 중요한 의미를 부여할 때 행복해질 수 있다. 물질적인 풍요를 기반으로 정신적인 욕구가 충족될 때 행복해진다는 것이다. 또한 많은 사회심리학자들이 지적하는 것처럼, 우리나라의 경우 수능시험이란 절대명제 앞에서 다른 곳에 눈돌릴 틈 없이 달려온 대학생들은 대학에 와서야 비로소 정신적 욕구를 깨닫고 공허함을 느끼게 된다.

취업 열풍으로 인해 잘 드러나지는 않지만 많은 학생들이 종교의 문을 두드리고, 또 많은 학생들이 학생운동에 참여하는 등 대학생들 역시 삶의 가치에 대한 불안감을 해소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하고 있다.

우리 사상 안에서 찾아낸 ‘내 삶의 가치’

정신적인 욕구충족의 표현은 정신문화유산인 사상과 철학, 그리고 종교와 예술 등의 형태로 나타난다. 정신문화는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란 질문에 대한 문화권 각각이 내린 해결책이다. 따라서 정신문화는 특정 문화권 사람들의 신화적 세계관이 반영된 고유의 지적 결과물인 셈이다. 우리 문화와 지성 또한 19세기의 동아시아적 혼란기 속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나’란 질문에 대한 하나의 지적 결과물로 내놓은 것이 동학이다. 

동학은 수많은 이론적 논쟁과 교리 투쟁보다 실천적인 의지를 중시한다. 인생과 마찬가지로 이론적 해결보다 실천적 결단을 요구하는 것이다. 그것은 외부 대상에 대한 객관적 지식을 갖추기에 앞서 자기 자신에 대한 각성과 변화가 먼저 요구된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동학은 초월적 의지가 지정하는 운명에 순응하는 인간이 아니라, 주체적이고 창조적인 가능성을 가진 인간을 주창한다.

동학의 창시자인 수운 최제우(崔濟愚)는 ‘불택선악의 한울’을 설파했다. ‘한울’의 감응은 초월자 자신의 의지로서 행해지는 것이 아니다. 인간에 영향을 미치는 ‘한울’이란 존재는 있지만 그 선악과 길흉의 방향성은 인간에게 달린 것이다. 따라서 어떤 삶을 살 것인지는 자기 스스로에게 달린 것이지 신에 의해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렇기에 도덕적 실천과 역사의 창조는 신의 심판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의 의지와 노력으로 만들어가야 한다는 것을 밝히고 있다. 이는 잘못된 관념과 타락한 이기주의로 인해 서로가 서로를 헐뜯고 적대하는 삶 속에 빠진 채 살아가는 사람들을 올바른 길로 인도하고, 공동체에 바람직한 방향으로 살아가는 삶의 자세를 갖게 한다는 동학의 본래 목적과도 합치한다.

동학이 주창하는 ‘인내천’에서의 하늘인 ‘한울’은 카톨릭이나 이슬람의 초월자와 달리 자체 의지를 가진 인격적 존재가 아니다. 동학에서는 우주를 하나의 진화하는 생명으로 보고 이를 ‘한울’이라 말하는데, 그것이 여러 단계를 거쳐 인간 단계로까지 진화하여 비로소 현재 인간이 나타났다고 가르친다. 그러므로 인간의 내부엔 이미 우주의 모든 진화의 단계가 들어 있을 뿐 아니라 무한한 시간이 들어 있으며, 초월적인 한울과 더불어 미래에 대한 창조성까지 들어 있다는 것이다.

최제우의 가르침은 인간이 자신의 무한함에 의한 간접적인 작용으로 신을 창조하고, 신을 무상의 존재로 숭배하는 대신 자기 자신을 비천한 존재로 보았던 과거의 종교에서 탈피한다. 사고가 무한히 발전함에 따라 인간은 스스로에 대해 깊이 생각하고, 마침내 자기 자신의 무궁함을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무궁한 생명에 의해 진화해 온 인간은 자신이 이미 신과 동격이라 할 수 있다. 자기 자신이 이미 한울과 다르지 않기 때문에 자신을 노예로 낮추거나 초월적인 인격을 갖춘 또다른 신을 생각할 필요가 없으며, 인간 단계(격)가 중심이 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 최제우의 '수운주의'이며 '인간격 중심주의'이다.

그러나 ‘사람이 곧 한울’(人乃天)을 종지로 삼았다고 하여 동학의 사상을 인간지상주의(人間至上主義)라고 할 수는 없다. 동학의 가르침에서는 사람이 한울이듯이, 우주의 모든 만물 역시 한울 아님이 없다고 가르치기 때문이다. 동학의 2대 교조인 해월 최시형의 “저 나무 사이에서 울고 있는 새소리 역시 시천주”란 가르침처럼 이 우주에 가득한 온갖 만물들 또한 ‘한울’을 모시고 있다고 보는 것이다.

따라서 동학의 이러한 사상을 체득하게 되면, “한울님을 공경하듯이(敬天), 사람도 공경을 해야 하며(敬人), 나아가 만유도 이와 같이 공경해야 한다(敬物)”는 생활방식을 갖게 된다.

동학에 ‘도를 아십니까’란 질문은 없다

길을 가다 보면 ‘기운이 참 맑으시네요’라며 접근해오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 천도교에 입문한 지 6개월 정도 된 신참 교도들이 전개하는 포교 활동이다. 그러나 동학의 본래 가르침에서는 믿음과 수행은 어떤 사실을 받아들이고 받아들이지 않는 앎의 차원이나 신념의 차원이 아니라고 말한다. 진정한 믿음은 다른 모든 가치에 앞서 신앙의 대상이 되는 보편적 가치를 자기 삶의 중심적인 가치로 받아들이고 살아가는 마음의 태도라고 보는 것이다.

그렇기에 동학에는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개념이 희박하다. 그보다는 어떤 가치를 마음의 중심에 두고 사느냐. 그래서 어떤 마음 상태를 가지고 어떤 삶의 방식으로 살아가느냐의 문제를 더욱 중요하게 여긴다.
따라서 '깨달음이란 무엇인가' '도란 무엇인가'란 질문은 동학의 가르침 앞에서 더 이상 효과적인 의문이라 할 수 없다. 깨달음은 인식의 대상이 아니라 일상에서 몸으로 체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동학의 가르침에 따르면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도’ 역시 앎의 대상이 아니다. ‘도’를 체득하여 세상에 구현하는 것만이 가능할 뿐이다. 그러므로 동학에서 이야기하는 깨달음은 나의 인격 안에서 체화되어 그것이 덕으로 세상에 드러나는 것을 의미한다. '깨달음'또는 '진리'는 그 내용이 아니라 드러나는 방식을 통해서만 간접적으로 알 수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깨달음’과 ‘도’를 실천하는 것이라 주장하는 동학의 가르침은 수행에 대한 인식 또한 변화시킨다. 일반적으로 ‘도인’이라 하면 속세와 단절된 산 속에서 홀로 생활하며 구도하는 은자의 이미지를 떠올리는 사람들과 달리, 동학에서 주장하는 수행과 수행의 주체인 도인은 그러한 존재가 아니다. 동학에서의 수행은 깨달음이라는 완전한 경지에 도달하려는 노력이라기보다는 몸의 욕망을 조절하고 부조리한 현실에서 최선의 지혜를 발휘할 수 있는 '삶의 기술'을 터득하는 과정에 더욱 가깝기 때문이다.

동학의 창시자인 수운 최제우조차도 수행과 속세를 나누지 않고 일반적인 가정에서 생활하며 장인이 매일같이 기술을 단련하듯 지속적인 단련을 통해 자신을 완성해 나갈 것을 강조했다. 그러므로 동학의 깨달음은 홀로 구원받을 수 있는 어떤 경지라기보다는 몸과 마음을 자유자재로 다스려 세상에 사랑과 자비와 덕과 정의를 펼 수 있는 삶의 기술을 터득한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주문(呪文)을 통한 수행방법

동양과 서양의 종교는 종교생활의 과정에 커다란 차이가 있다. 서양의 종교들은 절대적인 신에게 경배하고, 신의 은총을 바라며 믿고 의지하는 신앙생활을 영위한다. 즉 ‘신앙’에 중점을 두는 종교생활이 이뤄지는 것이다. 반면 동양의 종교는 신자들 스스로 어떠한 종교적 경지에 도달해 깨달음을 얻고 세상 만물의 의미를 밝혀내기 위해 정진할 것을 요구한다. 다시 말하자면 ‘수행’에 치중하는 종교생활에 가까운 것이다. 동학의 종교적 생활은 ‘수행과 신앙’ 두 가지를 겸비하고 있다는 특징이 있다.

동학의 수행을 실천하는 데 가장 기본이 되는 행위는 주문이다. 동학의 핵심적인 사상을 잘 축약하고 있는 주문은 ‘지기금지원위대강(至氣今至願爲大降)’의 강령주문 8자와 ‘시천주조화정영세불망만사지(侍天主造化定永世不忘萬事知)’의 본주문(本呪文) 13자가 있다. 수행자는 매일같이 주문을 반복적으로 읽는 행위를 통해 자신의 삶 속에서 동학의 가르침이 자연스럽게 배어들도록 하는 것이다.

일견 미신적으로 보이는 행위지만 심리학자들은 이러한 주문 암송이 자신의 무의식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주장한다. 끊임없는 반복과 정신집중을 통해 무의식이 그 방향으로 작용하고, 나아가 삶의 자세 전체가 변화하는 것이다. 스티븐 코비나 브라이언 트레이시와 같은 성공학 강사들이 강조하는 반복적 암송과 맥이 통하는 수행 방법이다. 

동학에서는 이러한 주문과 수행을 통해 생활 속에서 가르침을 실천하고, 더 나아가 잃어버린 본성을 회복함으로써 깊은 경지에 이르게 되는 길을 제시하고 있다. 생활 속에서 실천할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행위를 통해 수행과 신앙을 일치시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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