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내 현수막 훼손, 지성인 자세 아니다
교내 현수막 훼손, 지성인 자세 아니다
  • 성명수 기자
  • 승인 2007.10.01
  • 호수 125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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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추석연휴기간에 누군가가 안산배움터 곳곳에 설치된 현수막들을 훼손한 사건이 발생했다. 문제의 현수막들은 한 학생단체가 설치한 것으로 ‘남북정상회담 환영’ 등 사회 현안에 대한 내용들이 대부분이었다.

현수막의 내용과 반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그 반대주장을 그렇게밖에 표현할 수 없었는지에 대해 안타깝게 생각한다. 현수막을 훼손하고 이 같은 행위를 옹호하는 주장들을 보며 그들이 과연 지성인이라는 대학생자격이 있는지도 의문스럽다.

많은 학생들이 ‘운동권’ 학생단체를 비판하고 거부하는 움직임이나 목소리가 비단 어제오늘의 이야기는 아니다. 그러나 그 주체들의 비판방법 역시 비판의 대상이 되는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들은 운동권 학생회의 표현과 행동방식을 문제 삼는다. 하지만 그것이 문제로 성립하려면 그보다 더 바람직한 방법이 필요하다. 하지만 현수막을 훼손한다든지 ‘너희는 원래 그렇다’라는 원색적이고 편협한 비난은 문제해결에 아무런 도움을 주지 않는다.

이 학생단체가 내걸은 현수막이 통행을 방해하고 또 그 주장을 학내에서 현수막 설치의 방법으로 표현하는 것이 잘못됐다고 한다. 현수막 설치라는 방법이 잘못됐다면 그것을 인위적으로 훼손하는 행위가 그 방법에 반대하는 것이 될 수는 없다. 또한 현수막이 통행을 방해한다고 하는데 대학에서 학생들의 생활을 불편하게 하는 것이 비단 이것뿐인지에 대해서도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학생들의 통행이 아니라 교육의 기회를 방해하는 부당한 등록금 인상이 해마다 되풀이되고 있다. 부실한 교육환경이 개선되는 속도는 학교의 외형적인 발전에 비해 더디기만 하다. 이 같은 문제에 대해서는 눈과 귀를 닫으면서 길을 걸을 때 5초, 10초 돌아가야 하는 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이렇게도 폭발적인 반응을 보이는 것인가. 이것이야말로 이성적인 판단이 아니라 특정한 대상에 대한 맹목적인 거부감에서 비롯되는 것은 아닌가.

학교 행정을 비판하고 사회문제를 이야기하는 것은 운동권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다만 그 표현 방식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국가의 모습도 그렇지 않은가. 하나의 정책이 있으면 글로써 이 정책을 비판하는 평론가가 있는가하면 이론적인 토대를 마련하는 정책 연구원, 실제 정책이 입안된 이후를 고민하는 모니터요원, 그 정책을 직접 만들고 실행하는 국회의원 등 각자가 다른 역할과 고민을 가지고 있다. 평론가가 정치인의 정책이 잘못됐다고 비판할 수는 있으나 그 역할 자체를 부정할 수는 없다.

현수막을 설치한 학생단체 역시 사회문제에 대한 자신들의 역할을 현수막 게시를 통한 여론형성 정도로 생각한 것이 아닐까 싶다. 반미주장이 잘못됐고 대학사회 내에서의 정치선전현수막 게시가 잘못됐다면 그것에 대해 토론을 벌이자. 이 시대의 대학생들은 토론에서 화려한 모습을 보여주는 진중권 씨에게 열광하지 대통령 후보 경선에서 서로 좋은 자리를 차지하려고 몸싸움을 벌이는 정치인을 좋아하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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