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 참상 속에서 검증받는 문화의 역량
전쟁, 참상 속에서 검증받는 문화의 역량
  • 강명수 기자
  • 승인 2007.10.01
  • 호수 125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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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휴전 협정을 평화 협정으로 정착시키고, 우리나라의 최고 통수권자인 대통령이 직접 휴전선 지뢰밭을 넘어 북쪽으로 걸어갈 것이라는 예측이 파다하다. 이러한 흐름은 21세기 대한민국의 새로운 평화를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이제껏 전쟁이 우리 곁에서 계속 진행돼 왔다는 뜻이기도 하다.

건국 50년의 대한민국 역사는 그 자체로 전쟁사다. 우리는 전쟁과 함께 건국됐고, 실제로도 2002년 서해에서 죽어간 고(故) 윤영하 소령 및 4명의 젊은이들은 ‘적’의 공격’을 받아 ‘교전 중 전사’했다. 이처럼 가까이 있는 전쟁. 우리는 전쟁에 대해, 그리고 무엇이 전쟁의 승패를 결정하는지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을까.

전쟁의 승패는 문화의 연장이다.

영화에서 보는 것처럼 잘 훈련된 문명권의 군대는 조직적인 편제를 이루며 싸우고, 야만인들의 부대는 오합지졸로 산만하게 싸우는 것이 우연일까. 우리가 ‘로마’를 생각할 때 떠올리는 것은 신장 2m의 ‘최홍만’부대가 아니라, 단단하게 진형을 유지하는 중장보병들이다. 그리고 그들과 맞서는 군대는 거의 언제나 웃통을 벗어던지고 몸을 물들인 야만족이다.

개인의 전투력에서 문명국가에 견주어 뒤떨어지지 않았던 이들을 물러서게 한 것은 군사력 너머에 있는 문화의 힘이었다. 그 문화의 힘이 한쪽은 진형을 갖추어 물러서지 않게 하고, 다른 한쪽은 미친듯이 달려들다가 죽음을 맞이하게 만들었다.

문화의 힘은 단순한 정신력과는 다른 개념이다. 2차대전에서 일본군의 가미가제 조종사들을 움직였던 정신력과 충성심은 정말이지 놀라운 것이다. 그러나 전장에 임하는 병사들에게 ‘정신교육’을 가장 중요한 것으로 생각하고 무조건적인 복종과 국가를 위한 무제한의 희생을 요구했던 일본군은, 천황의 신성한 권위와 황군(皇軍)의 철석같은 복종심에 의존했던 일본군은 대본영의 힘은 자유민주주의 선거에 따라 선출된 대통령과 함께 국가를 위한 희생이 아니라 자유와 평등이라는 가치를 위해 싸웠던 국가들 앞에서 철저하게 무너졌다.
그것은 우연이 아니다. 당시 일본인들은 자신을 신민(臣民)으로 생각했고, 스스로가 천부적인 권리를 타고난 하나의 자유로운 인격체로 생각지 않았다. 반면 연합군은 집단보다 개인적 자유와 개인의 권리에 대한 신뢰를 중시하는 문화를 누려왔다.

그리고 원자폭탄을 비롯한 더 나은 무기와 막강한 병력을 키워낸 것은 개인의 자유에 따라 창의력을 발휘할 수 있었던 수많은 천재 과학자들과 개인의 권리를 위해 목숨을 바쳤던 수많은 젊은이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당시의 일본 문화가 가질 수 없었던 힘이었다. 

국가를 위한 희생, 더 나아가 자살을 수용하고 후퇴를 치욕스런 것이라 여기게 하는 정신무장만을 강조한 일본은 ‘뛰어난 제독은 자신의 함선이 파괴돼도 여전히 제독이고, 훌륭한 조종사는 자살 폭탄보다는 교사로서 가치가 크다’며 표창과 명예에서도 개인을 중시하는 문화 앞에서 패배했다.

패전하는 그 순간까지 천황의 장군들에 대한 신성한 권위를 경외하던 일본인들이, 그들이 살아있는 군신(軍神)으로 여기던 일본 점령군 사령관 맥아더 장군이 대통령의 사인이 들어간 명령서 한 장에 해임될 것이라는 사실을 상상이나 할 수 있었을까. 그것을 가능케 만든 문화적 토양이야말로 전쟁의 승패를 결정한 능력이다.
 
과학은 문화의 토양 위에서 힘을 발휘한다.

대한민국은 일본과 지긋지긋한 악연을 맺어왔다. 그리고 그 악연이 직접적으로 드러난 것의 시작은 1592년의 임진왜란을 꼽을 수 있다. 당시 일본군은 조총(鳥銃)이란 신무기를 사용해 우리 민족을 공포의 도가니로 밀어넣었다.

화약을 이용한 기술적 집약체인 일본의 조총은 놀라운 수준으로 발전해 당시 유럽 최강의 육군을 보유했던 프랑스 왕실의 총사대들이 사용하는 총 이상의 성능을 발휘하고 있었다.  그러나 1853년, 미 해군 소속의 페리 제독이 일본을 찾아왔을 때 일본인들의 무기는 발전된 조총이 아니라 사무라이의 일본도였다. 300년 동안 일본인들은 과학기술을 오히려 퇴보시킨 것이다.

일본은 전장의 혁명을, 사무라이 계급의 공고한 지배구조를 한순간에 무너뜨릴 수 있는 혁신적인 도구를 받아들일 만한 문화적 토대도, 이러한 수단을 통해 사회적인 신분을 상승시키려는 권리를 가진 자유로운 개인도 존재하지 않았다. 지구 반대편에서 아랍의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엘리트 전사였던 예니체리들도 총을 악마의 무기라며 배척했던 것도 같은 이유다.

과학적인 발전보다 소수 엘리트에 의한 지배를 중시하는 문화구조를 지닌 이들은 과학의 발전을 막았고 심지어 퇴보시킨 것이다. 반면 과학의 발전에 따른 효과적 수단이 사회의 변혁 수단으로 작용하고, 소수 엘리트의 자존심을 무너뜨릴 수 있는 문화적 구조를 지녔던 국가에서 화포는 재빨리 받아들여졌고 끊임없이 개량됐다. 레판토 해전에서 대포를 실은 6문의 갈레온을 향해 화살을 쏘아야만 했던 예니체리는 아랍의 기술자들이 무능했기 때문이 아니라 아랍의 문화가 과학 발전을 받아들이지 않는 구조였기 때문이다. 

과학기술의 발전과 혁신은 개인의 능력을 극대화하고, 개인의 공적을 인정하는 문화적 토대에서 이뤄진다. 2차대전 직전의 독일은 세계적인 수준의 물리학과 수학, 화학적 역량을 자랑했다. 그러나 전쟁이 시작되고 국가 총동원을 통해 개인의 자유와 능력이 사장되고, 공적에 대한 평가가 자유롭지 못하게 되자 독일의 과학자와 물리학자들은 개인의 권리를 보장하는 미국으로 옮겨갔다.

오펜하이머, 파인만 등 원자폭탄을 개발하고, 암호 해독기 ‘에니그마’를 개발하는 과학자들 중 얼마나 많은 수가 독일 출신이었던가. 현재 무기 시장을 지배하는 것은 미국산 무기이다. 그것은 미국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총인 M-16을 발명, 제조한 유진 스토너와 콜트 사는 그로 인해 엄청난 부를 축적했지만, 소련을 대표하는 AK-47을 발명한 칼리시니코프는 가난한 생활을 면치 못하고 있다는 점과 무관하지 않다. 이 차이는 도덕이나 기술의 문제가 아니라 문화에서 나온다.    
  
전쟁과 군사력은 국가의 독점물이 아니다

비도덕적으로 보일지는 몰라도. 그리고 거부감이 들지는 몰라도 전쟁의 승패와 과학의 발전은 항상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극대화하는 문화를 보유한 편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심지어 오늘날엔 그 주체가 국가가 아닌 개인과 기업으로 넘어가고 있다.

1995년의 시에라리온은 반란군의 공세로 인해 완전한 무정부 사태에 빠져 있었다. 극도의 혼란 상태에 치안은 기대할 수 없는 수준으로 정부군은 무력하기 그지없었다. 전면적인 대학살의 가능성이 다가오자 외국인과 대사관 직원들은 대부분 철수했다.

어떤 나라도 그런 상황에 개입하려 들지 않았었다. 그러나 이후 기적이 일어나 단 2주 만에 반군은 수도에서 밀려났고 몇 달 안에 완전히 해체됐다. 그 이후 시에라리온은 23년 만에 처음으로 자유 선거를 치러 민주주의 정부를 세울 수 있었다. 그 기적은 남아프리카 공화국에 본부를 둔 이그제큐티브 아웃컴즈(Executive Outcomes: EO)란 한 민간 기업의 직원들에 의해 일어났다. 이 기업은 퇴역 군인과 비즈니스 전문가들에 의해 움직이지만, 수호이 전투기에서 최첨단 기갑전차에 이르는 ‘군수 서비스’를 제공한다.

군사ㆍ안보 영역의 변화는 믿을 수 없을 정도다. 9.11 테러 이후 진행된 아프간 전쟁에서 최첨단 무인 전투기를 조종한 사람들은 군인이 아닌 민간기업 직원들이었다. 그들은 전투 장비를 관리하고 보급을 지원했으며 토목건설을 진행했다.

심지어 인권침해로 논란이 거센 관타나모 수용소조차 미국의 브라운 앤 루트(B&R) 사에 의해 건설된 것이다. 이런 변화는 비용과 효율성 면에서, 그리고 개인의 창의력을 발휘하고 개인에게 무조건적인 의무를 강제하지 않는다는 측면에서 기업이 군대 조직과 비교할 수 없는 수준을 자랑하기 때문이다.

‘군대는 사회의 변화를 시험하는 곳이 아니다’는 불문율처럼, ‘군대’하면 누구나 꽉 막히고 경직된 사회를 연상한다. 그러나 이제까지 전쟁의 승패를 좌우해왔던 문화의 힘은 이제 군대 그 자체의 영역 판도 역시 뒤바꾸고 있다. 비대한 관료제와 엄청나게 방만하고 낙후된 시스템으로 운영되던 특정 국가들의 군대가 그나마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은 군사력 자체를 국가가 독점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오늘날 안보 영역에서 국가의 역할은 이전의 특권을 상실했다. 개인의 창의력과 권리를 최대한으로 보장해주지 못하는 국가의 군대는 이전과 같은 압도적인 위치를 자랑할 수 없다. 지금 이 시점에서, 승패를 결정하는 거대한 흐름에 우리의 군사적 문화를 다시 한 번 비교해 볼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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