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중철(한양대 국문과 강사)
“사람이 한평생을 살자면 죽기보다 어려운 고비가 꼭 있게 마련이니라. 그럴 때는 잊지 말고 내 말을 명심해라. 저 자신보다 더 중요한 것은
제가 맡고 있는 책임인즉.”
최명희의 대하소설 <혼불>의 한 대목이다. 어린 나이에 종가집 큰며느리로 시집을 와 갖은 고생을
하며 혼자 눈물짓고 있는 손자며느리 효원에게 청암부인이 들려주는 말이다. 책임 때문에 함부로 죽어서도 안 된다는 것이다. 누구에게든 버릴 수
없는 책임이란 게 있는 법이다. 혼자 외딴 곳에 숨어 있지 않는 한 ‘해야 하는’ 일이 있는 법이다. 내가 아니고서는, 나 대신 아무도 대신
감당할 수 없는 그런 책임 말이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우리가 맡고 있는 책임이란 한 두 개가 아닐 것이다. “살펴보면 나는 / 나의 아버지의 아들이고 / 나의 아들의 아버지고
/ 나의 형의 동생이고 / 나의 동생의 형이고 / 나의 아내의 남편이고 / 나의 누이의 오빠고 / 나의 아저씨의 조카고 / 나의 조카의 아저씨고
…”(김광규의 시 <나> 중에서) 그 많은 ‘직함’ 만큼이나 많은 책임들을 어깨에 메고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하나이지만
“오직 하나뿐인 / 나는 아니다.” 내 이름과 몸은 하나이지만 그 이름과 몸으로 해야 하는 것은 한 두 개가 아니다. 그 모든 것들이 내가 버릴
수 없는 책임들이다. 머리가 지끈거리고 몸이 쑤셔도, 눈이 아프고 다리에 힘이 빠져도, 해야 하는 일들이 언제나 우리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