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양문예상- 시 부분
한양문예상- 시 부분
  • 한대신문
  • 승인 2006.12.02
  • 호수 123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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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수 : 사람이 없다

강인모<경금대 경제금융학부 05>

빛이 들지 않는 포도밭엔 사람이 없다. 차도 지나지 않던 이 동네에, 어느 날 갑자기 공장이 들어선다는 발표가 났고, 지붕에 먼지가 올라앉은 가정엔 모두 에어컨이 한 대씩 지급되었다. 착공이 시작되고 먼지가 날리자 사람들은 모두 창문을 닫았다. 주민들은 더 이상 밭에 나가지 않았다.

거름을 주지 않아도 포도는 잘 자랐다. 그런 것쯤이야 원래 거추장스러웠다는 듯, 동방사니, 여뀌, 쇠비름 모두 같이 어깨를 엮으며 잘 자랐다. 먼지가 날려 고랑은 이랑과 구분이 가지 않았으나, 먼지와 공사장 인부들이 오물 속에서도 포도는 잘 자랐다. 너무나도 당연한 듯 잘 자랐다.

마을 누구도 남의 밭은커녕 자기 밭도 돌보지 않았다. 마을 입구엔 어느새 부동산이 두 채나 들어섰다. 지난해부터 계속 가슴이 답답하다던 할아버지는 구월무렵에 말기암 판정을 받았다. 설에도 한가하던 집에 누구라고 할 것 없이, 가족들이 무여들었다. 이모는 흑염소를 고아왔고, 둘째삼촌은 당장 서울 큰 병원으로 올라가자며 소리쳤다. 집은 부산했고, 마을은 떠들썩했다. 할머니는 닭을 잡았으나, 숙모는 속이 좋지 않다는 이유로 먹지 않았다. 온 동네에는 닭 잡는 소리가 들렸다. 그렇게 마을은 부산했고 밭도 부산했지만, 빛이 들지 않는 포도밭엔 여전히 아무도 없다.

 

가작 : 강의실 공백기(空白期)
서정현<법대·법 05>

아침,
양치하며 훑는 네이버 뉴스에
조간신문 一面의 기사를 바라보며
더욱 강하게 칫솔질을 해대는 꼬락서니,
지하철 무료신문의 연예기사에
다소 웃음 진 얼굴로

초록문을 나와
푸른 하늘의 언덕을 지나
단지, 지나치는 후배의 고개인사에 대한 답례와
자판기 커피 겨우 한 잔 손에 쥐고
두리번거리며 강의실을 찾는데,
오늘은 수요일인지,
강의실은 이층인지,

날벼락 같은 휴강공고에
金宗三 쯤 되어 보이는 광대가
구석에서 소주 한 잔 권하기를
브란덴브르크 협주곡 제5번을 함께 기다리자는 그는
검은색이 진하게 묻어와서,
이곳은 詩人學校가 아닌
법대강의실 이라는 것을 애써 호통 치면서

점심도 먹고 저녁도 먹어야 하건만
어디서 무엇을 할까 두리번거리기만 할 뿐
실속 없는데, 토론도 없이,
FTA 반대를 흉내 낸 플랜카드만 바람에 날려
또 토론도 없이,
도서관에 앉아 영어책만 펼치는 습관

歸家라 해 보았지만
모니터만 뚫어라 바라볼 뿐
고작 손의 움직임일 뿐
반성도 없이, 이유도 생각 없이,
네이버 뉴스의 변화는 시간의 진행일 뿐
정치나 사회의 변화는 아니라는 것,
볼 수 없는 기사는 이미 지나간
오늘의 캠퍼스와 하루 이므로

思考라고는 단지
귀가 큰 詩人을 떠올렸을 뿐인데
아침에 고민해야 했던 것은 지나갔고
다시 이야기할 필요도 없이,
내용 없이,
토론도 없이,
日常을 살아가는
젊음의 大學生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강의실이 텅 비었으므로,

가작 : 사근동
문희철<인문대·영문 00>

기숙사로 들어가려고
한낮인데 꾸벅꾸벅 졸고 있는 가로등 불빛을 따라
오를수록 봄바람 살랑이는
사근 고개를 넘어설 때면
붉은 양옥에 스레트 지붕이
이 동네의 빛깔이다.
기술과학으로 유명한 한양대와는 별개로
배고픈 만큼 높은 하늘 인문대를 배경으로
코를 비죽 내민 채 토라지기도 하고
메아리 울려라 고함치기도 하고
제멋대로 굴러다니는 플래카드 조각
그냥 한 번 흔들어 보는 아카시아 바람은
이유도 없이 기분이 좋아
아스팔트에 등을 지지며 낮잠을 청한다.
사근문방구 앞에선 강아지만큼 많은 아이들이
녹은 아이스크림을 연신 핥아대고
녹는 만큼 번지는 웃음소리는
철권하러 가잔다.
배고픈 참새도 심심할 시간이 없는 동네, 사근동

가작(예비) : 자기 소개서
박재혁<인문대·국문 98>

어서오십시오, 란 인사를 받기가 머쓱한 곳이 있지
이를테면 은행에 대출받으러 갔을 때, 혹은 옛 애인과 머물던
분홍빛 여관 따위, 이 세상엔 반어와 역설로도 해명될 수 없는
무수한 말들이 있다는 걸, 나는
자기소개서를 쓰면서 깨달았다
생의 이력을 반듯이 줄 쳐진 서류용지에 채워 넣을 때마다
느끼는 아득한 절망감
스물 이후의 삶이란 기실 내가 누구인지 말할 자가 누구인가를
되묻는 과정일 뿐인데
회색빛 종이 위에 새겨지는 나의 삶이란
기실 나에게도 얼마나 낯설 뿐인가 귀사의 훌륭한 인재가 되어
드리겠습니다,라는 끝맺음된 자기소개서,
불면의 신새벽에 태우던 담배 필터 끝에 묻어나던 한숨과
터널을 통과하던 기분으로 지내온 청춘의 추억 따위는 묻어둔 채,
남들보다 더 값비싼 명함을 갖을 준비된 자임을 말하는
텅 빈 말들의 집합, 자기소개서
날렵한 봉투에 입사지원서와 함께 봉하여 붙인다
읽으실 때 주의할 점,
동창회 나가서 쪽은 안 팔릴 삶을 살고 싶어요,라는
전제는 생략됨, 아울러
평생 든든한 일꾼이 되겠다는 약속, 지킬 기회조차
안 준다는 것 알고 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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