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한대신문 문예상 비평 대상] 대칭, 틈입, 치환-꿈과 애도를 위한 세 가지 방법
[2022 한대신문 문예상 비평 대상] 대칭, 틈입, 치환-꿈과 애도를 위한 세 가지 방법
  • 정윤수<경금대 경제금융학과 15>씨
  • 승인 2022.11.28
  • 호수 1558
  • 8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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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서곡

 

빠져나간다. 빠져나갈 수 없는 각도를

그곳에서는

모든 음들이 한꺼번에 울리고 있다.

 

(「시인의 말」)

 

이렇게 시작해요. 내가 당신의 꿈을 꾼다고. 꿈속에서는, 불가능이 가능해진다고. 그곳에서는 모든 음들이 한꺼번에 울리고 있다고. 당신은 무엇인가요. 나는 무엇인가요. 꿈속에서 나는 누구의 꿈인가요. 옛날과 오늘 할 것 없이 영웅담들은 주인공을 전제합니다. 꿈은 주인공을 잃는 장소예요. 영웅들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한 시련들을 돌파하는 사람이곤 하죠. 며칠 전의 꿈에서 저는 심부름을 하다가 길을 잃었습니다. 당신을 봤어요. 당신은 무엇이었나요. 저는 오랜만에 이수명을 다시 읽었습니다.

 

 

2. 백색 소음(white noise)과 대칭

 

꿈속에 이식되었을 때를 기억해요. ‘우리보다 키가 큰 식물들이 불쑥불쑥 들어와 우리를 에워쌌“어요. ”식물들은 단 하나의 식물이 되기 위해“, ”나는 단 하나의 식물을 통과하기 위해“ 불어났어요. 움직이고 작용했어요. 꿈속에서 식물은 더 이상 베란다 화분에 키우던 단 하나의 물망초 분재가 아니었어요. 내가 다가갈수록 진동하며 불어나는 의미들이었습니다. 물을 주고 관상하는 존재를 벗어난 물망초는 내가 ”속삭이며 날아가버리기“(「이식」)를 기다려도 내 마음 같지 않았어요.

생각해 보면 그건 당신과 있었던 일들과도 마찬가지였어요. 우리가 함께한 시간은 ”나의 꿈을 놓“는 동안 당신도 ”꿈과 꿈 사이를 꿈으로 채“우는 과정이었을지도 몰라요. 당신의 꿈과 나의 꿈은 레고처럼 조립될 수 있는 성질의 물체가 아니었기에, 우리의 ”꿈이 겹쳐지면서 꿈은 지워졌“(「꿈」)던 걸까요.

다시 읽으면서도, 이수명이 예전의 다른 시들과 다르다는 건 쉽게 느껴졌어요. 그동안 많은 ’시‘들은 헤겔적 주체성을 전제했잖아요. 시인의 지각 속에서 시정신이 대상을 반성적으로 드러내는 것으로 미학적 총체성을 느낄 수 있다고요. 우리는 고등학교 때까지 동화나 투사의 원리를 배워 왔어요. 동일성의 원리.

그러나 꿈을 꿀 때마다 나는 당신이 내 마음대로 반성적인 존재가 될 수 없다는 걸 다시금 깨닫곤 했습니다. ASMR을 자주 들었던가요. 백색 소음을 아시나요?

(화이트 노이즈 스펙트럼, 위키피디아)

백색 소음은 모든 주파수에 걸쳐 랜덤한 소리를 내는 일종의 노이즈예요. ”모든 음들이 한 번에 울리고“ 있는 것이죠. 당신이 나와 대칭되는, 한번에 다 알 수 없는 주체성을 지니고 있다면, 내가 좋아하는 당신을 보는 건 백색 소음 속에서 좋아하는 음을 고르는 것과 비슷한 게 아닐까 하고는 했어요.

내가 모르는 당신의 모습을 이해하는 것, 관상용을 보듯이 하는 마음 가운데에서도 놀랄 수 있었던 근거는 ”잘라도 잘라도 자라는 / 이쪽으로 저쪽으로 춤을 추며 자라나는“(「전지가위」) 당신의 모습들 아니었을까요. 그런 당신은 즐거워 보일 것 같아서. 내 마음만을 생각하지 않고 나처럼 대칭되는 당신의 마음을 생각했어요. 그러다가 생각했어요. 당신 마음의 노이즈가 나와 대칭이라면, 나는 무슨 마음일까.

 

 

3. 분홍 소음(pink noise)과 틈입

 

헤겔적 주체는 대상을 압도하고 정복하지만, 과연 그것이 가능할까요? 혹은 헤겔적 주체가 되기를 실패하는 마음은 무엇인가요. 백색 소음을 들으면 귀가 아픈 삐- 소리가 나는 거 기억해요? 기억할 수 있나요? 노이즈들은 자연에서도 쉽게 발견되지만, 인간들은 노이즈가 아닌 노래를 불러요. 기억하기 위해서. 그건 백색광에서 적녹청을 구분하거나, 흑색에서 시안, 마젠타, 노랑의 색을 추출하는 것과 비슷한 행위일 거예요.

나는 완전히 동등하고 대칭되는 세계와 사물들을 경험하거나 경험하고 싶지만, 당신이 있는 꿈을 꾸고 싶지만, 그게 어떻게 가능할까요. 이수명의 시에서의 대칭들은 긴장감을 품고 있어요. 우리는 손을 흔들며 인사했지만, 분명히 포옹하기도 했는걸요. 우리는 서로를 믿을 수 있는 구석이 있었어요. 개가 접시를 핥다가 ”혀가 얼마나 긴지 / 그 혀는 천천히 자신의 얼굴을 핥고 / 줄을 잡고 있는 / 내 얼굴을 핥“(「먹이」)는 것처럼. 어떤 틈입, 표면의 침범이 일어났어요.

(핑크 노이즈 스펙트럼, 위키피디아)

분홍 소음은 백색 소음에서 옥타브 당 3db씩 크기를 감소시킨 소음이에요. 백색 소음을 가공한 인공적인 소음인데요, 특이한 점은 사람이 듣기에 고음부가 강조된 백색 소음과 달리 모든 음이 고르게 들린다는 거예요. 이걸 기계에 인간의 마음이 틈입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우리의 마음이 소음이라면, 우리는 서로의 소음을 가공해서 상대방에게 가 닿나요. 가 닿지 않을 때 ”벽보다 더“ ”문보다 더“ 많은 손을 가지고도 ”내가 만지는 순간 / 벽은 벽이 되고 / 벽은 또 다른 문이“(「너무 많은 손」) 되는 건가요.

서로의 마음에 침범하는 노이즈가 많아질수록 나는 나도 모르게 ”더 많은 서랍“(「서랍 속의 벌레」)이 됩니다. 대상이 대상성을 잃어갈수록 주체의 주체성도 희미해지나요.

 

 

4. 애도의 가능성과…… 치환

 

칸트는 구상력과 상상력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구상력이 눈앞에 없는 대상을 직관으로 표상하는 능력이라면, 상상력은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을 이을 수 있는 무한하고 창조적인 능력이라고 하지요.

우리가 서로의 마음을 상상하면서, 서로의 표면을 침범하면서 새로운 시적 주체와 대상을 만들어낼 수 있다면 좋겠어요. 그게 존재 속에서 영원하고 무한한 창조 능력이면 좋겠어요. 그런데 추모는, 더 이상 주체가 될 수 없(다고 상정되)는 대상을 상상하는 행위잖아요. 내가 기억으로부터 당신을 해방시키고, 시공으로부터 당신을 해방시켜 상상하고 공상하더라도, 당신이 주체로서 정말로 살아 있을 수 없다면 정말로 유효하지 않은 거잖아요.

이수명의 대상들, 「해부」, 「비명 소리」, 「마네킹」과 같은 시 제목들에서 지금 살아있을 수 없는 대상들을 생각하게 돼요. 「의자의 구조」, 「실내」에서 나오는 내용에서 반복되는 움직임을 보면서, 자꾸만 결정의 순간은, 꿈에서 깨어나는 순간을 지연한다고 생각이 드는 건 어쩌죠.

시집 1부의 마지막 시를 보면 이수명은 답을 알고 있었을까 싶어요. 고양이들이 ”고양이 비디오를 틀어놓고 // 모두들 고양이 흉내를“(「고양이 비디오를 보는 고양이」) 낸다는 건 비디오와 같은 기술매체가 아니라 대상과 주체성 속에서 이미 결정된 관계였던 걸까요. 3인칭에서 1부를 끝낸 이수명은 시집의 마지막 시에서 다시 1인칭 화자를 불러냅니다. 네가 얼룩말을 내리치고 사라져도 ”너는 시작되지도 / 끝나지도 않“(「얼룩말 현상학」)는 세계. 그런 너에 대해서만 말할 수 있는, 자연스럽게 나 또한 갇힌 세계. 너와 나의 자리를 바꾸는 세계.

현상학은 심리적 기초 위에서 보이는 그대로에 대해 말하는 학문이었어요. 결국은 나를 드러낼 수밖에 없다면, 우리의 치환이 주체의 비주체성과 대상의 비대상성을 함께할 수 있는 장르라면, 적어도 그 상상력이 기만이라 해도 스스로의 기만성을 인지할 수 있는 기만이라면. 만나요, 당신. 나는 오늘도 꿈을 꾸고 싶지만 길을 잃어서라도 기다릴 거예요. 아, 내 안에 너무 많은 당신을 나는 무엇이라고 말할까 밤새 고민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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