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동서양을 뛰어넘는 중양(中洋)으로 새롭게 인류사 통찰하기
[칼럼] 동서양을 뛰어넘는 중양(中洋)으로 새롭게 인류사 통찰하기
  • 이희수<국문대 문화인류학과> 명예교수
  • 승인 2022.11.21
  • 호수 1557
  • 7면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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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14년 독일 고고학자 클라우스 슈미트 팀은 튀르키예 아나톨리아 동남부 괴베클리 테페에서 1만 1천600년 전에 세워진 신전 도시 유적을 공개했다. 

‘신석기 시대의 대성당’이라 할 수 있는 중앙 신전의 지름은 30미터에 이르고 평균 5미터 높이의 기둥들이 원을 이루며 둘러서 있다. 기둥 1개의 무게가 10톤에서 30톤씩이나 되는 돌기둥에는 △멧돼지 △뱀 △사자 △여우 △오리 △전갈 같은 다양한 동물이 살아움직이는 듯 생생하게 조각돼 있다. 

투박한 원시 예술의 진수를 맘껏 발산하고 있는 이 조각들은 금속기를 사용할 상상조차 하지 못 하던 수렵·채취 시대의 작품들이다. 비석에 표현된 동물의 표정과 그 상징성은 아마도 죽은 사람의 영혼을 보호하려는 의미나 우주를 향한 종교적 메시지가 담겨 있을 것이다. 사면체 각 기둥에 표현된, 알 수 없는 부호와 일련의 질서 정연한 조각이 자아내는 규칙성은 그들의 독특한 문자이자 소통 방식이었을 것이다. 

그 후 지금까지 아나톨리아에서는 수많은 문명이 명멸해가면서 다양한 △공동체 △과학기술 △삶 △신앙 △제도가 실험되고 배태됐다. 동양과 서양이 만나고 이슬람과 기독교가 공존하게 되면서 태생적으로 서로 다른 문화를 받아들이는 용광로 역할을 했던 것이다. 빛을 머금은 아나톨리아 문명은 지중해를 통해 그리스 로마로, 남쪽의 메소포타미아로, 카스피해 남부를 지나 실크로드라는 문명 젖줄을 따라 중앙아시아와 동방으로 전달됐다. 

중양(中洋)과 중반구의 핵이라 할수 있는 아나톨리아는 단순히 고대의 문명 전파자 역할에만 머물지 않았다. 트로이 전쟁, 당나귀 귀와 황금 손을 가진 미다스 왕과 여인왕국 아마존 이야기 같은 흥미로운 신화와 전설의 고향이기도 하다.

성서고고학의 측면에서 보더라도 노아의 방주가 걸렸다고 추정되는 △반(Van)호수 주변의 에덴동산 △사도 바울의 생가인 다소(Tarsus) △성모 마리아가 여생을 보냈다는 마리아 하우스 △튀르키예에서 가장 높은 산인 아라라트산 △아브라함의 활동 무대였던 하란은 물론, 초대 7대 교회와 △니케아 △산타클로스의 실제 무대라 알려져 있는 성 니콜라스 주교 성당 △에페스 공의회가 열린 장소 △칼케돈이 모두 아나톨리아의 문명 바닷속에 살아있다. 

그리스 역사학의 아버지 헤로도토스와 불멸의 대서사시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의 작가인 호메로스는 물론, △밀레투스 학파의 3대 철학자인 탈레스 △의학의 아버지 히포크라테스 △밀레토스 학파 철학자인 아낙시만드로스와 아낙시메네스도 모두 아나톨리아 문명이 길러낸 인물들이다. 

인류 문명의 시원과 역사발전의 맥락을 제대로 이해한다면, 왜 세계 4대 문명 중 세 곳이 아나톨리아 반도를 중심으로 중동 일대에서 탄생하게 됐는지, 어떻게 지중해를 통해 인류의 찬연한 역사와 문명이 꽃필 수 있었는지에 대해 좀 더 신선한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느 순간 등장한 물질자본주의와 유럽중심주의가 종교적 우월감과 인종주의라는 절대가치의 무기를 들고 전 세계를 호령하기 시작했다. 이에 경제적으로 낙후되고, 정치적으로 약자이고, 종교적으로 이슬람의 전통을 고수해 온 문명의 본고장은 ‘막연한 동방’으로 인식되면서 철저히 세계의 주변부로 밀려나게 됐다. 

동서로 문명을 전파한 역사적 역할은 일정 부분 인정됐지만, 19세기 이후 서양 문화의 절대적 우월성은 너무나 확고해 보였다. 그러나 이제 아나톨리아를 제대로 조망해야 한다. 동서양 중심의 문명관에서 벗어나서 ‘중양’이라는 새로운 시선과 지혜의 그릇으로 인류사를 통찰하는 일을 시작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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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혜원 2023-08-01 20:01:57
아나톨리아는 수렵·채취 시대부터 다양한 문화와 종교가 만나고 섞여 발전해온 곳으로 중요한 역사적 역할을 맡았습니다. 그러나 동서양 중심의 문명관이 지배하는 현대에는 많이 뒤떨어져있다는 인식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제 아나톨리아를 다시 조망하고 새로운 시선으로 인류사를 바라볼 때입니다. 중양(中洋)이라는 새로운 시선과 지혜를 통해 아나톨리아의 역사와 문명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