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 세상을 이어주는 문이 되다
번역, 세상을 이어주는 문이 되다
  • 이휘경 기자
  • 승인 2022.10.10
  • 호수 1555
  • 4면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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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영화 속 주인공이 말을 거는 영화가 있다. 영화 시작부터 출연자가 자신을 ‘신이 내린 또라이(God’s Perfect Idiot)’라 직접 소개하더니 제작비를 지원해준 사람들에겐 ‘호구들(Asshats)’, 감독을 ‘돈만 많이 처받는 초짜(An Overpaid Tool)’라고 말하는 영화. 바로 <데드풀>이다. 영화와 관객 사이의 장벽을 허문단 세계관을 그대로 살려 크레딧까지 생생히 번역한 황석희 번역가는 데드풀의 한국 개봉 직후 수많은 찬사를 받았다. 영화 속 맛깔스러운 대사들을 한국인이 이해하기 쉽게 잘 살렸단 호평이다. 이렇듯 번역은 언어와 언어 사이를 이어주는 역할이자, 다른 언어를 한국의 문화와 그 안에 깃든 정서에 맞게 한국어로 바꿔주는 작업이다.

경계를 넘나드는 말과 글, 그 속엔
번역의 사전적 정의는 ‘어떤 언어로 된 글을 다른 언어의 글로 옮김’이다. 그 ‘옮김’엔 인류가 언어를 사용하기 시작하고 지금에 이르기까지의 오랜 역사가 담겨있다. 최정화<한국외대 통번역대학원> 교수는 “아주 오래전 말이 통하지 않는 것은 문화콘텐츠를 즐기지 못하거나 사업이 무산되는 차원의 문제가 아닌, 생사를 결정하는 중대한 문제”였다며 “두 부족이 그림과 몸짓을 더해 의사소통을 한 것부터 번역의 기원이라 할 수 있을 것”이라 설명했다.

이후 오늘날의 ‘번역’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것은 종교계였다. 우리나라의 경우 과거 불교의 경전을 옮기는 작업이 있었는데, 19세기 말부터 동서양을 막론하고 기독교의 선교 활동이 활발해지자 국내에도 선교가 이어지며 대규모 번역 작업이 이뤄졌다.

이러한 종교의 확산은 국가 간 인적·물적 교류를 가능하게 했다. 이는 타국에 대한 궁금증을 촉발시켰고, 번역이 발전하는 데에 중요한 계기가 됐다. 박진영<성균관대 국어국문학과> 교수는 “서양의 종교 서적이 한글로 번역되면서 읽기는 하는데, 그러면서 ‘이 사람들은 뭘까’, ‘서양인들은 어떤 사람일까’ 하는 궁금증이 생겼을 것”이라며 “바다 건너온 다른 세계에 대한 민간 차원의 지적 욕구가 따라오면서 번역 작업이 다수 필요로 하게 됐다”고 말했다.

번역은 언제나 국가 간 교류와 함께 수반된다. 새로운 교류가 있을 때마다 번역의 역할이 발생하고, 시장이 형성되기 때문이다. 현대 사회로 들어와 AI 기술을 이용한 기계 번역이 급격히 성장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번역은 ‘새로운 교류’와 궤를 같이한단 점에서 기술로 완전히 대체되긴 어려운 작업이다. 박 교수는 “기계 번역은 이미 학습된 정보들을 귀납적으로 활용하는 방식이기 때문에 창조성이 없다”며 “번역은 대부분 새로운 만남과 교류 과정에서 일어나기 때문에 인간적인 개입이 필수적”이라 설명했다.

이해와 공감의 장을 열다
번역은 최근 한류의 확산으로 국내에서 만들어진 영화 또는 드라마가 해외로 진출하는 데에 톡톡한 역할을 하고 있다. 영상 번역의 경우 번역하려는 언어권 독자의 정서에 맞춰 내용의 맥락을 이해하고 번역하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에 단순한 해석을 넘어선다. 함혜숙 번역가는 “번역을 할 때는 시대가 허용 또는 비허용하는 표현을 잘 반영해야 하는 등 다양한 요소를 종합적으로 고려한다”며 “그렇기에 시시각각 변하는 시대상을 파악하기 위해 뉴스 시청과 독서를 꾸준히 한다”고 말했다. 작품 내용 파악에 있어서도 그는 “기계 번역은 작품 속 맥락을 잘 파악하지 못한단 한계가 있다”라며 “영상 번역의 경우 등장인물의 표정이나 말투, 감정 등 여러 가지 요소를 고려해 번역하기 때문에 섬세한 감정 포착도 굉장히 중요하다”고 전했다.

문학계에서도 마찬가지로 번역은 중요한 작업으로 자리한다. 한국 작품을 번역해 스페인에 소개하고 있는 알바로 트리고 말도나도<살라망카대 현대문학부> 교수는 한 매체와의 인터뷰를 통해 김훈의 장편소설 「남한산성」을 번역하는 과정에서 조선 시대에 대해 조사했다고 답했는데, 이같은 과정은 문학 번역에 반드시 수반되는 선행 과정이다. 이에 더해 박 교수는 “번역에 있어서 언어 능력은 중요하다”며 “그러나 외국어를 하는 사람들이 모두 다 번역을 할 수 있는 건 아니다”라 말했다. 언어를 잘 이해해도 번역 과정에 있어서 모국어로 옮길 수 있는 능력을 모두 가진 건 아니란 것이다. 그는 “문학 번역의 경우 작품 자체에 대한 깊이 있는 공부와 문장력 등 여러 사전 작업 및 능력을 필요로 한다”고 전했다. 최재직<번역협동조합> 사무국장도 “한국엔 정말 다채로운 표현들이 많은데, 이를테면 ‘너무’라는 부사는 ‘상당히’, ‘몹시’, ‘더없이’ 등 굉장히 다양한 부사로 변주될 수 있다”며 “아무리 외국어를 잘해도 한국어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가 없다면 질 좋은 번역을 할 수 없다”고 말했다. 

올바른 역사 해석의 주체가 되기도
번역은 역사를 올바르게 해석하는 데에 주체가 되기도 한다. 한국문학은 특히 역사적 애환을 담은 작품들이 많은데, 이러한 작품을 번역하는 데엔 역사적 사실과 한국 정서에 대한 깊은 이해가 있어야 번역이 제대로 이뤄질 수 있다. 30년 넘게 한국문학을 번역해 온 브루스 풀턴<브리티시콜롬비아대 아시아학> 부교수는 직접 작가와 출판사에 연락을 취해 김숨 작가의 도서 「한 명」을 번역한 바 있는데, 이 책은 일제 식민지 시기 성노예 피해자 할머니들의 증언을 토대로 쓰인 소설이다.

김자경<중앙대 국제대학원> 교수의 논문 ‘한국문학 번역에서 문학 번역가의 역할(한국번역학회, 2021)’에 따르면, 폴턴 교수는 작품 제목인  「한 명」을 “One Person”으로 직역하지 않고 “One Left”로 직역했다. 그는 제목이 단순히 ‘한 사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 ‘위안부’란 이름으로 끌려간 20만 명 이상의 소녀들을 의미하며, 그들 중 남은 마지막 피해자의 상황, 생존자가 얼마 남지 않은 상황 등 소설 속 상황을 그대로 드러내기 위한 선택이었다 전했다.

이뿐만 아니라 소설에 등장하는 ‘언니’를 ‘ŏnni’로 음역하기도 했는데, 이에 대해선 피해자들이 서로를 ‘언니’라고 부르는 부분은 서로를 향해 강한 애정과 연민, 연대 의식을 갖고 있었음을 독자에게 전달하도록 하기 위해서라 말했다.

덧붙여 그는 지난 3월 한국국제문화교류진흥원 통신원과의 인터뷰에서 공지영 작가의 도서 「도가니」를 언급하며 “더 나은 미래를 위해, 다시는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역사적 기억을 끄집어내고 마주해야 한다”라며 “이를 위해 번역가로서 계속 번역하는 일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지식의 교류에 기여하다
문화콘텐츠 번역에만 익숙할 법하지만, 번역은 마케팅부터 법학, 의학 등 여러 산업 및 학문이 발전하는 데도 이바지하고 있다.

이는 ‘산업 번역’ 혹은 ‘기술 번역’이라 칭하며 국가 간 학문적 교류가 어느 때보다 활발한 지금, 굉장한 전문성을 필요로 하는 분야다. 이미선 번역가는 “번역 작업에 앞서 계약서 등 문서의 성격을 파악하고, 독자를 파악한다”며 “의학 문서의 경우 의사가 읽는 것인지 독자가 읽는 것인지 알고 전문 용어를 어느 수준까지 풀지 결정하는 작업을 한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번역의 목적과 쓰임새에 최대한 맞춰 번역하더라도 완전히 해당 분야의 전문가가 아닌 이상 부족할 때가 있다”며 “이 때문에 관련 개념에 방대하게 검색하고 조사해서 공부를 하고, 정확도를 높이려 한다”고 말했다.

이 또한 AI 기술로는 대체될 수 없는 작업이기도 하다. 이 번역가는 “예를 들어 약물을 주입하는 내용이 있다고 할 때, 3mg와 30mg의 차이는 큰 위험으로 이어질 수 있는 문제”라며 “이러한 수치가 있거나, 단어 하나에 엄청난 돈이 걸려있는 경우 등이 있기 때문에 AI 기술이 산업 번역 시장에 많이 들어와 있어도 완전히 대체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고 말했다.

마케팅에서도 마찬가지다. 번역해야 하는 슬로건을 구성하는 단어들의 뜻을 파악하는 것을 넘어 단어들 간 통일감과 맥락을 모두 고려해 번역해야한다. 일례로 번역협동조합은 코로나19 기간에 있었던 거리두기 공익 광고 슬로건인 ‘떨어져/있어도/마음은/가까이’를 ‘Social Distancing Does Not Mean Emotional Distancing’이라 번역해 라임을 맞추면서도 의미를 그대로 살렸다. 해당 조합은 광고뿐만 아니라 캐나다의 신용협동조합의 이야기를 담은 작품을 직접 발굴해 번역하는 등 사회적 활동을 이어오고 있기도 하다.

산업화된 번역 업계, 그러나
곳곳에서 사람과 사람, 국가와 국가 간 연결고리 역할을 해주던 ‘번역 작업’은 시간을 거쳐 점점 복잡한 과정으로 발전해왔다. 단순히 번역가 개인이 참여하는 것을 넘어 △작가 △감수자 △출판사 관계자 등 다양한 주체가 참여하는 작업이 된 것이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번역가는 수동적으로 문장을 해석하는 기술자로서 취급됐다. 한국문학 번역 업계에서의 번역가에 대한 인식을 지적한 김 교수는 “번역가에 대한 사회적 존중과 보상이 부족하단 것은 오래전부터 지적돼 왔다”고 전했다.

실제로 여전히 번역 기술에 대한 적절한 급여 체계가 만들어지지 않고 있다. 대다수의 번역이 개별 프리랜서 형태로 계약되는 것이다. 박 교수는 “번역 작업이 산업화되면서 각 단계에서 이윤 추구를 최우선으로 하게 됐다”며 “그래서 낮은 단가로 단시간에 번역하려다 보면 번역의 질이 낮아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최 교수 또한 “요즘엔 해외에서 공부한 사람도 많고, 기계 번역 기술 성능이 크게 향상돼 번역 단가가 터무니없이 낮아지는 경우를 종종 목도한다”며 “한편 질 높은 번역을 해낼 번역가를 쉽게 찾기 어려운 것 또한 현실”이라 지적했다.

이러한 현상은 오히려 번역가의 주체성이 필수적임을 역설한다. 번역이 단순히 납기일과 단가를 맞추기 위해 수동적으로 문장을 옮기는 작업이 돼버리면 이는 곧 번역의 질로 즉시 이어지기 때문이다. 최 교수는 “번역가는 단어 하나를 번역하기 위해 몇 시간을 고민하고, 신선하고 자연스러운 표현을 찾기 위해 수차례 글을 고쳐 쓴다”며 “번역은 고뇌의 시간이 주어지는 만큼 더욱 완성도 높은 결과물을 도출해낸다”고 말했다.

한국에 대한 세계적 관심에 노 저으려면
전문가들은 세계적 수요에 따라 한국을 널리 알리고, 번역 산업을 성장시키기 위해선 번역가의 노동 가치를 인정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김 교수는 “번역 업계에 대한 사회적 관심과 문제의식이 커질 때 개선이 이뤄질 수 있다”며 “번역가의 역할과 기여, 현실적인 제약과 어려움 등 이들이 처한 사회적 상황에 대한 논의가 더욱 활발해질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이에 대해 박 교수도 “번역은 굉장히 자유롭고 평등하며, 민주적이고 평화로운 만남을 가능케 한다”며 “세계적으로 한국이 주목되는 상황 속에서 국가 정책, 제도적 지원이 뒷받침돼야 번역 산업이 더 성장할 수 있을 것”이라 말했다.

번역은 해석을 넘어 깊이 있는 지식과 언어·문장 능력을 복합적으로 필요로 하는 전문 기술이자, 예술이다. 번역가가 정당한 노동 가치를 인정받고 주체적으로 번역 활동을 이어갈 수 있도록 국가의 관심이 필요해 보인다.

도움: 김자경<중앙대 국제대학원> 교수
박진영<성균관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이미선 번역가
최정화<한국외대 통번역대학원> 교수
최재직<번역협동조합> 사무국장
함혜숙 번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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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혜원 2023-08-01 20:59:11
현재 번역가들은 적절한 보상과 사회적 존중을 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번역가들의 노동 가치를 인정하고 번역 산업을 성장시키기 위해 정부와 사회적 지원이 필요합니다. 번역은 예술적인 요소와 지식적인 깊이를 요구하는 전문 기술이며, 번역가의 역할과 기여에 대한 논의와 개선이 이뤄져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