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항상 빛나는게 사는법 : Man in the Mobile.
[칼럼] 항상 빛나는게 사는법 : Man in the Mobile.
  • 이슬기 차장
  • 승인 2022.10.09
  • 호수 1555
  • 7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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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기SBS 콘텐츠전략본부 홍보팀 차장
                                      ▲이슬기<SBS 콘텐츠전략본부 홍보팀> 차장

SNS엔 행복하고 즐거운 이미지들이 끝없이 올라온다. 지금 이 시점, 필자의 SNS 피드를 둘러보면 가장 먼저 △피트니스클럽에 있는 지인 △최신형 핸드폰으로 찍은 셀카 △프랑스 여행을 즐기는 커플 △호캉스 △#고기굽는남편00 등을 해시태그 한 홈파티로 이어진다. 하나같이 밝은 표정으로 일상을 살아가고 있다. 그 누구도 야근을 하거나 초라한 사람은 없는데 나만 아직도 회사에서 낮에 남긴 초코과자를 먹으며 글을 쓰고 있는가 보다. 아무리 SNS는 이용자가 자신에게 바라는 모습을 선택해 전시하는 결핍의 거울이며, 나는 그 행렬을 접하는 것이라지만 남과 비교를 안 하기는 쉽지 않다. 

다시 고개를 15도 들어 포털에 걸린 뉴스를 본다. 한 연예인이 ‘갈등이 있던 아버지에게 맞고 실신을 했다’는 기사가 먼저 보인다. 주요 매체 대부분이 이 기사를 썸네일과 함께 포털에 크게 큐레이팅 했다. 기사가 이렇게 큐레이팅 되는 큰 이유는 수요가 있기 때문이다. ‘장남’, ‘그래도 부모가’, ‘아들의 도리’ 등 많은 댓글이 생면부지 한 타인의 집안사를 비난하고 나섰다. 다양한 주제의 혐오와 차별도 줄을 이었다. 이렇게 모인 혐오들은 여론으로 포장돼 혐오의 덩어리로 이어지고 스테레오 타입이 돼, 내가 아닌 남이 내 인생의 기준이 되는 ‘눈치’를 만든다. 

한국의 ‘눈치’라는 단어는 조금 특별하다. 영어사전을 찾아보면 sense, wit 등으로 나오는데 딱 떨어지는 표현은 아니다. 한국인의 이 단어는 체면과 센스, 사회 통념적 태도 등을 포함한다. 서로를 감시해야 했던 일제강점기, 좌우로 이념이 갈린 한국전쟁을 지나 민주주의가 발아되는 진통의 시기를 지난 까닭일까? 한국인은 유난히 가족, 주변인의 가치로 개인을 평가하고 주위의 시선으로 내 위치를 고정하는 경향이 높다. 외적인 조건들을 제거할 수는 없지만 내 시선을 조금 움직일 수는 있다. 

주변을 조금만 돌아봐도 모두 빛나는 일상을 사는 것은 아니란 것을 알 수 있다. 슬쩍 고개를 다시 15도 더 들어보니 삼선 슬리퍼를 끌고 지나가는 지친 피디, 업무를 조율하는 막내들과 비가 올까 날씨 걱정하는 후배가 보인다. 30도만 고개를 들어도 다른 세상이 보이지만 이 착시 현상에서 눈을 떼기는 퍽 힘들다. 디지털 소음에 눈치 보기보단 그들과 다른 것이 틀리지 않음을 믿어보자. 대통령도 100% 지지율은 없다. 구약시대 로마인과 유대인을 기준으로 보면 예수도 안티가 몇 천 만 아니었던가.

어느 겨울 길가엔 덜 녹은 눈이 먼지가 덮여 회색으로 남아있었다. 진흙탕 주차장 얼음판을 투덜대며 지나치는데 옆에 친구가 ‘눈이 녹았다가 다시 얼었네..’라고 중얼거렸다. ‘저 회색 얼음이 눈으로 반짝이며 흩날렸던 시간이 있었다! 그리고 그 시간을 기억하고 ‘눈’이라고 말하는 누군가가 있다’ 그래 지금의 나도 그런 시간이 있었고 ‘얼음판’인 나를 ‘눈’으로 기억하는 누군가가 있을 것이다. 언제나 빛나는 사람은 없다. 다만 가끔 반짝이는 사람이 될 수는 있다. 

조금만 고개를 들자! 작은 사각형 안에 누군가를 부러워도 말고 함부로 평 하지도 말자. 검은 눈덩이도 곧 증발해 구름이 되고 눈이 돼 다시 반짝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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