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고라] 지금 이 순간 최선을 다한다면
[아고라] 지금 이 순간 최선을 다한다면
  • 채수민 기자
  • 승인 2022.09.26
  • 호수 1554
  • 6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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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채수민<대학보도부> 정기자

“집에 가고 싶어” 요양원에 계신 할머니가 가족들과 면회하며 처음 꺼낸 말씀이다. 가족들도 잘 알아보지 못하시는 할머니가 애달프게 집을 찾으시는 순간 머리가 멍해졌다. 

맞벌이를 하느라 바빴던 부모님을 대신해 방학 때마다 필자의 동생과 필자를 맡아 키워주셨던 할머니였다. 할머니는 손주들의 말썽에 엄격히 훈육하시다가도 잠들기 전 머리를 쓸어 넘겨주시는, 그런 큰 어른이셨다. 누구보다 강해 보였던 할머니의 약해진 모습을 보고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이기적이게도, ‘내 삶의 끝자락도 저런 모습일까’였다. 이제 막 어른이 돼가는 22살의 필자는 한 번도 고민해본 적 없는 삶의 늘그막에 대해 생각했다.

열심히만 살면, 그에 대한 보상으로 무엇에도 방해받지 않는 평안한 노년이 찾아올 거라 막연히 기대했다. 그래서 늘 치열하게 살았다. 시험 기간이 찾아오면 졸린 눈을 비비며 밤새워 공부했고, 중요한 갈림길에 설 때면 스스로의 선택이 옳았는지 의심하며 불안감에 또 다른 밤을 뜬 눈으로 지새웠다. 

할머니라고 달랐을까? 이제 갓 스물이 넘은 소녀가 버스 타고 한 시간이 넘는 거리의 먼 동네로 시집와 4남매를 낳고 기르며 농사일까지 도맡았다. 여든 평생 생계의 최전방에서 치열한 시간을 보내며 얼마나 수많은 밤을 고민과 걱정 속에 지새우셨을지 감히 가늠할 수도 없다.

오랜만에 할머니를 뵀던 요양원을 떠나 집으로 돌아오기까지 막막한 허무함이 밀려왔다. 그간 할머니가 쌓아온 최선의 시간이 그의 노년에 최고의 평안을 선물해주진 않았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동시에 최선을 다했던 할머니의 젊은 날과 지금 치열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 필자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요양원을 다녀오고 나서도 할머니의 힘없는 모습이 잔상처럼 기억됐다. 그리고 그 잔상 속에서 빠져나오기까지 며칠이 걸렸다. 할머니의 모습이 떠오를 때마다 결국 찾아올 무력한 끝을 생각하니 무기력해지기도 했다.

필자를 답답한 무기력함에서 빠져나오게 해줬던 건 오랜만에 만난 고등학교 친구였다. 친구는 떨리는 목소리로 자신의 근황을 전했다. 지금 하는 전공 공부를 멈추고 그동안 남몰래 감춰뒀던 연기의 꿈에 도전하겠단 것이었다. 평소라면 갑작스레 불안정한 길을 택한 그 친구에게 우려의 말을 먼저 건넸을 것이다. 그런데 “나 사실 연기가 너무 하고 싶었어”라고 말하는 친구의 반짝이는 눈이 너무 예뻐서 걱정은 접어두고 진심 어린 응원을 건넸다.

친구를 만나고 집에 돌아오며 문득 그런 예쁜 순간을 기억으로 간직할 수 있는 삶이라면, 그 끝이 어떤 모습이더라도 괜찮겠단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 정말 하고 싶은 것을 찾아 최선을 다한다면 결과가 어떻든 당신의 인생엔 몇 번 오지 않을 빛나는 순간이 남을 것이다. 그런 찰나를 새길 수 있는 삶이라면, 그 자체로 행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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